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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서 바꿔봅시다! - 염동연이 말하는 노무현 신화의 탄생
염동연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5월
평점 :
염동연이 말하는 노무현 신화의 탄생
폴리티쿠스에서 출판한 염동연 전 의원의 <둘이서 바꿔봅시다>는 불꽃 같은 정치 인생을 남긴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과정을 그리고 있다.
[호칭이나 정치적인 입장은 저자인 염동연 전 의원의 기준과 입장으로 전합니다.]
노무현의 경선 승리 과정과 대선 과정에서 보여준 극적인 승리는 대한민국에서 눈에 띄는 정치 여정이었다. 염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에 나서는 결정적인 순간부터 두 사람의 교감한 장면과 이후 상황을 소개한다.
염동연 전 의원은 1946년 전남 보성군 벌교 출신이다. 잘 알려진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가 되었던 제석산 아래 홍교 다리 근처에서 태어났다. 소설 속 주인공 정하섭 가문이 양조장을 운영하는 지주 가문 출신인데, 염동연 의원댁도 보성에서 소주와 정종, 막걸리를 만드는 양조장과 수산물 가공공장, 냉동 창고를 운영하는 집안이었다. 한마디로 흔히 말하는 ‘금수저’ 집안 출신이었다.
주목할만한 내용은 문덕면 태생의 독립운동가 서재필 박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염 의원의 조부는 서 박사보다 그의 친동생 서재창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가르쳤다. 서 박사는 갑신정변(1884년)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조정에서는 서재창에게 형 서재필을 반역자라고 규탄하는 상소를 고종 임금에게 올릴 것을 강요했다. 만일 상소를 올리면 가족 모두를 살려주겠지만, 올리지 않으면 전 가족을 처형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서재창은 이를 의연히 거부하고서 참형되었다. 그의 나이 불과 열아홉이었고, 역적으로 몰린 아버지와 어머니, 형수와 누이들은 관노가 되기 직전에 음독자살했다.
그의 조부는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서재창을 서 박사보다 훌륭하다고 평가하셨는데, 이는 염 의원이 정치 인생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 큰 영향을 미친다.
그는 한국 외대 독어과에 진학해 대학교 1학년 때 운동권 선배를 만나 의식화 교육을 받게 되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신민당 김대중 후보의 장충단 공원 연설을 들었다. 이 연설을 대한민국 정치사의 한 획을 그었던 유명한 연설로 잘 알려져 있다. 국민의 뜻을 확인한 박정희 대통령은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직감한 순간이기도 하다.
김대중 후보의 ‘3단계 통일론’은 큰 충격이었다. 그를 정치로 이끈 것은 1980년 5·18광주 민주화운동이었다. 현장에서 참사를 지켜본 염 의원은 의료지원 활동을 했다. 이후 김대중 선생의 측근이자 고향 선배인 박준구 씨를 만나 정치에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김대중의 청년조직인 민주연합청년동지회(연청)이 1980년 ‘서울의 봄’에 조직되었다. 김대중 선생은 ‘5·17 내란음모사건’으로 체포 구금되었고, 5·18민주화운동이 터지자 연청 회원도 구속되었고 뿔뿔이 흩어졌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5공화국은 막을 내렸지만, 김대중 김영상 야당 후보의 단일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상태에서 여당 후보인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당선되어 군부정권은 연장되었다.
1992년 세 번째 대권 도전에 나서지만, 실패하고 1997년 네 번째 대선에서 승리한다.
1990년은 1월 대한민국 여당인 민정당, 야당인 통일민주당, 공화당이 민주자유당으로 합당한다. 당시 노무현은 자신을 정치로 이끌었던 김영삼의 정치적 결정을 따르지 않았고, ‘3당 합당’을 ‘호남을 고립시키는 정치적 야합’이라며 합류하지 않았다.
노무현과 통일민주당 내 합당 거부파 (이기택, 김광일, 장석화, 김정길)과 당시 무소속이었던 이철, 박찬종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했다. 이들은 속칭 ‘꼬마민주당’이라고 불렀다.
꼬마민주당은 1991년 9월 신민주연합당과 통합민주당을 창당했다. 노무현이 제1 야당의 총재였던 DJ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염동연은 당시 연청 사무총장이었고, 노무현을 만난 시점은 이때 당시인 1991년이었다. 1946년생으로 동갑이었던 두 사람은 어느 날 노무현 후보가 연청으로 찾아와 자신도 연청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는지 물어본다. 즉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염동연에게 노무현은 친구로 지내자고 제안한다.
이렇게 두 사람의 우정은 시작되었다.
1993년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 때, 당내 지지기반이 미약했던 노무현은 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한 1998년 6월에 두 번째 지방선거가 있었다. 서울 시장 후보는 정치권의 핫 이슈이고 한광옥 후보가 서울 시장에 나가겠다고 가장 먼저 출마 의사를 밝혔다. 상대 후보인 한나라당 최병렬 후보와의 대결 구도에서 한광옥 후보는 지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고건 총리는 승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무현은 한광옥 후보 대신 자신이 서울 시장 후보에 나가겠다는 의사를 피력하지만, 당에서 고건 총리를 영입하겠다고 하자 깨끗이 물러났다.
꼬마민주당 시절 1996년 제15대 총선 때 종로구에 출마해 3위로 낙선한 노무현은 종로구 당선자 이명박이 공직선거 및 부정선거 방지법 위반 혐의로 피소되어 의원직을 잃게 되면서 치르게 되는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어 3번의 낙선 끝에 10면 만에 현역의원으로 복귀한다.
노무현은 다음 총선에 부산으로 출마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1999년 2월 다음 총선에서 부산에서 출마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했다.
노무현은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는 부산 동구에서 출마해 떨어졌고, 1995년 부산광역시장 선거에서 패했고, 제15대 총선에서도 서울 종로구에서 3위로 떨어졌고, 제16대 총선에 또 떨어진 것이다.
노무현은 2000년 4월 총선 때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당시로서는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선거에서 낙선한 후, 노무현은 “농부가 어찌 밭은 탓하리오?”라며 유권자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그런데 그게 새옹지마가 되었다. 그의 낙선이 국민에게 당선보다도 더 큰 감동을 준 것이다.
인터넷 상에 ‘바보 노무현’이라는 말이 회자됐고, 헌정사상 최초로 정치인에 대한 팬 카페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생겼다.
김대중 대통령은 총선 4개월 뒤 노무현을 해양수산부 장관에 임명했다. 김 대통령은 그해 12월 김중권 전 비서실장을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지명했다. 노무현은 김중권을 ‘기회주의자’라고 비판해 사실상 DJ에게 반기를 들더니, 언론사 세무조사 때는 제1 야당의 대표까지 정면으로 비판하며 김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옹호한 것이다.
노무현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면 복잡하게 앞뒤 사정 재지 않고 언제는 할 말을 하는 그런 정치인이었다.
생각해보면 특별한 경험이었다. 당내 기반이 미약한 후보가 대선 후보로 나서기까지 그를 지지했던 팬클럽의 응원이 없었다면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는 위치였다. 염동연은 동교동계 핵심 인물이었고, 그는 영남 출신의 호남 지지를 얻는 후보가 대선에 나가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노무현은 그가 생각한 적임자였다.
여의도 민주당 사무실 인근의 금강빌딩에서 사무실을 만들었고, 그들은 금강 캠프라고 불렸다. 그들의 최우선 목표는 금강 캠프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염 총장의 역할은 살림을 맡아서 재정적인 부분을 도맡았고, 당내 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노무현을 대선 후보로 받아들여달라고 부탁했다.
금강 캠프로 사람이 모였고, ‘아름다운 바보’를 후원하는 팬클럽이 형성됐고, 노사모의 온라인 모임의 규모도 커졌다.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가장 선두에 선 사람은 한화갑, 이인제, 정동영, 노무현이었다. 경선에서 승리한 노무현은 정몽준과 대선 야당 후보 단일화를 이루어낸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2002년 5월부터 11월 중순까지 6개월이 넘도록 압도적 1위를 달려왔다. 한나라당은 일찌감치 형성된 이회창 대세론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정권을 되찾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노무현 후보는 정몽준 후보와 11월 말 후보등록일 직전에 가까스로 후보단일화를 했다. 정몽준 후보가 사퇴하면서 25%였던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은 44%로 껑충 뛰어 단숨에 이 후보를 제치고 1위로 부상했다.
그런데 어렵사리 이룬 후보단일화의 틀이 12월 18일 한밤에 깨졌다. 선거일은 불과 1시간 30분가량 앞두고 정몽준 대표가 돌연 노무현 후보의 지지를 철회한 것이다. 노 후보는 정 대표의 집에 찾아갔지만 끝내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때 당시 언론은 생방송으로 이 상황을 보도했다.
마침내 선거일이 되었고, 참여정부가 탄생했다.
이제 20대 대통령 선거는 2022년 3월 9일 치러진다. 지금부터 계산해도 D-279일이다. 생각해보면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은 누구나 각본 없는 드라마를 통해 그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책임감도 막중한 자리이다. 지금부터 대통령 선거는 각 당의 대선후보 예비경선을 통해 진행될 것이다.
염동연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당선 과정과 당선 후 과정을 2권을 통해 후대에 전하기 위해 자신이 경험한 일을 책으로 남기기로 했다. 금강 캠프의 설립부터 누구보다 많은 경험을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했기에 기록을 남길 적임자 중 한 명임이 틀림없다.
저자는 앞으로 2권도 앞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지난 대통령 중 노무현 대통령에게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극적이었던 경선 과정을 되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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