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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의 시간 - 결국 현명한 자는 누구였을까
안석호 지음 / CRETA(크레타) / 2021년 4월
평점 :
세계를 움직이고 개인의 삶을 뒤흔든 장벽의 운명사
장벽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막는가?
크레타에서 출판한 안석호 국제 분쟁 전문 기자님이 생생하게 경험한 장벽의 실체를 다루고 있는 <장벽의 시간>은 세계에서 주목할 20세기 다섯 개의 장벽을 소개하고 있다.
‘냉전의 상징’ 베를린 장벽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의 분리장벽, 미국의 멕시코 국경 장벽, 한반도 비무장지대에 만들어진 철책과 장벽, 그리고 ‘보이지 않는 장벽’인 무역장벽이다. (8쪽, 프롤로그 중)
다섯 개의 장벽을 어떤 계기에 의해서 누구 쌓아올렸는지 들여다보고 우리 사회에 적용할 부분을 파악하는 것은 불안이 엄습했다.
독일의 베를린 장벽은 동독이 건설했다. 베를린 장벽의 생긴 원인이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을 분할 통치하고 특히 베를린은 연합국 승전국인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가 분할하는 과정이 계기가 되었다.
패전국을 분할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에서 연합국은 태평양 전쟁의 전범국인 일본을 분할하려 했고, 이 분할선이 한반도로 옮겨진 것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뼈아픈 역사다.
양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이 2차 세계대전후 소련의 공산주의를 막아야 하는 자유세계의 선봉장이 된 것은 또 하나의 아이러니다. 미국은 마샬 플랜을 통해 서독과 서베를린을 지원하기로 한다. 일차적인 과정은 화폐 개혁이다.
1948년 6월 18일 어두운 밤하늘을 뚫고 1천1백 톤에 달하는 새로운 도이치마르크화를 싣고 3백 대 이상의 트럭이 서독의 비밀 장소로 향했다. 하루아침에 서독은 새로운 화폐를 사용하게 되었다.
승전국으로 가장 피해를 본 소련은 전후 배상을 톡톡히 받아내고자 했다. 독일에 전쟁 배상금으로 2백억 달러를 요구했고 전담 조직을 신설했다. 나치 소유였던 기업 수백여 곳을 해체하고 수십만 대의 기계와 생산 설비를 몰수하고, 1만 킬로미터가 넘는 철도 선로까지 소련으로 가져갔다.
소련은 전승국으로서 얻은 국제사회 영향력을 더욱 확장하려 들었고, 루마니아와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은 공산화했다.
서방 연합국은 긴장했다. 이런 와중에 미국의 재무 장관 조지 마셜 국무장관이 발표한 유럽경제재건계획의 가장 선두에 서독이 자리했다. 서독에 막대한 경제 지원은 서독과 동독의 경제력의 차이를 가져왔다. 특히 서베를린의 경제 발전을 지켜본 동베를린 사람은 서베를린으로 넘어가려 했다. 이런 물결이 차츰 심해지자 동독과 소련은 동베를린에 장벽을 설치하게 된다.
가장 극적인 장면은 소련이 서베를린으로 진입하는 육로를 봉쇄한 경우이다. 미국을 필두로 하는 자유세계 진영은 항공편을 통해 서베를린 국민이 생존할 필수품을 전달했다.
하루 1천3백여 편의 수송기가 열 달 동안 수송기 17만 8,228편의 식량과 물자, 연료 등 232만 6406톤을 실어 날랐다. 서베를린의 육로를 통제하면 서방 연합군이 철수할 거라는 소련의 계산은 빗나갔다.
흐루쇼프와 케네디의 치킨게임은 3차 대전 직전까지 간다. 케네디의 가장 큰 도박 중 하나인 쿠바의 공산정부를 전복하려는 피그만 침공 작전이 실패하고 소련은 이에 대한 분노로 핵미사일을 쿠바의 해군 기지에 설치하려 한다. 핵미사일을 실은 소련 선박은 미국 해군 함대 바로 앞까지 진군했고, 미국 B-52 전략폭격기는 소련을 즉각 공격할 핵폭탄을 싣고 공중 대기 중이었다.
일촉즉발 치킨게임은 소련이 핸들을 돌리며 피했다. 흐루쇼프가 쿠바 미사일 기지를 폐쇄하고 무기를 철수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해상 봉쇄를 풀고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때 당시 13일간의 쿠바 미사일 위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순간으로 꼽힌다.
미국은 소련을 경제적으로 와해시킬 작전을 진행한다. 소련의 경제가 석유가격에 기반하는 점에 착안해 사우디아라비아와 OPEC를 움직여 지속적인 유가 하락을 이끌어낸다. 이는 우리에게는 3저 호황의 기회가 되지만 1980년대를 끝으로 소련은 해체되기에 이른다. 소련의 해체로 독일을 가로막았던 장벽은 해체되었다.
지금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동독 출신이고 동독 출신의 정치인이 활약하고 있지만, 비율로 따지면 동서독의 격차는 여전하다. 통일된 동독 주민은 바로 서독처럼 잘 살줄 알았지만, 대기업의 위치와 경제 수준은 아직 서독에 미치지 못한다.
동독의 생활 수준은 이탈리아, 스페인과 비교하면 더 잘사는 것이 분명하지만 동독 주민의 비교대상은 오직 서독 주민이기에 상대적 박탈감도 여전하다.
이스라엘 장벽의 시작은 응축된 에너지가 불꽃에 의해 폭발하듯 생뚱맞은 드레퓌스 사건부터 출발한다. 유대인은 지난 2천 년 동안 디아스포라 이후 유대인들은 유럽과 북아프리카, 중동 등 세계 곳곳을 떠돌며 서러움과 박해를 견뎌야 했다.
유대인인 땅을 소유하기 힘들었고 농업에 종사할 수 없었다. 직업 선택가지 제한돼 중세시대부터 기독교인이 경멸하고 천시해온 고리대금업과 무역, 상업, 세무와 같은 직업이 유대인에게 넘겨졌다.
그런데 19세기 산업혁명으로 자본주의 시대가 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유대인들에게 금융과 무역을 지배해 부를 쌓아온 것이 기회가 되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우리에게 에밀 졸라를 먼저 떠오르게 하지만, 헤르츨이라는 이스라엘 국부가 이때 등장한다. 헤르츨은 드레퓌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을 확인하고 유대 민족이 피할 국가가 필요했다. 유대 국가 건설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1896년 그가 출판한 <유대 국가: 유대인 문제의 혀대적 해결 시도>는 팔레스타인을 독립국으로 넘겨달라는 시오니즘을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유대인들이 보여주는 방식은 전형적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에게 땅을 매입하고 절대 그들에게 다시 팔지 않는 방식으로 차츰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한다.
벤구리온의 정치력과 바이즈만의 아세톤 화약 대략 생산법은 2차 세계대전 동안 폭탄이 부족한 연합국에게 화약 생산법을 알려주어 벨푸어 선언의 기초를 마련했고, 유대계 금융재벌 로스차일드 백작은 영국 외무장관 벨푸어에게 편지로 유대 민족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승인을 받게 된다.
문제는 영국이 1차 세계대전의 오스만제국을 분산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아랍권 지도자에게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지역에 아랍의 독립국 건설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아랍권 지도자와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 헨리 맥마흔이 밀약한 맥마흔 선언이었다.
이때 당시를 다룬 영화가 데이비드 린 감독의 <아라비아의 로렌스>이다. 벨푸어 선언과 맥마흔 선언에 이어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팔레스타인의 분쟁의 씨앗은 잉태되었다.
땅을 서서히 사들인 유대인은 빠르게 공동체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1919년에서 1923년 사이에 러시아 출신 유대인을 중심으로 약 3만5천 명이 이주했다. 이들은 집단농장 키부츠를 세우며 경제 공동체의 초석을 놓았다.
이후 폴란드 유대인 6만여 명 독일에서 약 16만 5천 명이 팔레스타인으로 밀려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연합국은 승리했다. 팔레스타인 내 유대와 아랍의 문제는 수면 위로 떠올랐다. 양측에게 그들만의 국가를 건설해주겠다고 약속한 영국은 이 문제를 유엔으로 넘겨버린다.
유대인은 반유대감정이 크지않고 실력자로 떠오른 미국에 막대한 자금력으로 로비 활동을 벌여 유대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약속을 얻어낸다.
미국과 유엔은 팔레스타인 땅을 아랍과 유대 민족이 나눌 것을 제안했다. 팔레스타인의 44%를 아랍에, 56%를 유대에 나눠주기로 했다.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등 여러 종교에서 성지로 간주하는 예루살렘은 특별 국제 관리구역으로 지정했다.
당시 팔레스타인내 아랍 인구가 130만 명, 유대인이 약 60만 명이었고 비율로 치면 7대 3 정도였다. 그런데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 땅의 절반 이상을 분할하게 한 것은 불합리했다. 당시 유대인이 소유한 땅은 전체 팔레스타인 땅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랍인들의 나라를 세우는 걸 돕겠다던 맥마흔 선언은 휴지조각이 되었다.
유엔 결의안이 가결된 후 이스라엘은 건국했다. 벤구리온의 자경단 ‘하가나’를 근간으로 군대를 창설하고 입법기관도 조직하기 위해 서둘렀다.
1948년 유대인 극우조직 ‘이르군’이 예루살렘 인근의 작은 마을 데일 야신촌을 습격했다. ‘이르군’ 조직원들은 집마다 들어가 팔레스타인 주민에게 무차별로 총격을 가했다. 순식간에 254명이 숨졌고, 아랍 주민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무서운 나라인지 공포감을 체험했다.
야신촌 학살 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여 뒤인 1948년 5월 14일 시오니즘 지도자 하임 바이즈만은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했다.
이스라엘은 국경선을 확정하는 ‘그린라인’을 놓고 이웃 나라와 갈등을 반복하게 된다. 이른바 중동에서 일어난 이스라엘과 아랍 민족과의 중동 4차 전쟁의 서막에 올랐다.
결과는 모든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압도적인 우위를 나타내며 아랍 민족을 패배시켰고, 전쟁이 끝날 때마다 이스라엘 국경 내 기존의 팔레스타인 아랍 민족을 특별 구역으로 몰아넣었다.
하나는 요르단강 서쪽의 서안지구와 하나는 지중해와 맞닿은 가자지구이다. 이스라엘은 장벽을 세우고 서서히 아랍 민족을 고사시키는 전략에 들어간다. 이 전략은 지금도 지속적으로 시행되고 국경 장벽에 따라 하루 아침에 아랍 민족은 분할되기도 한다.
유대 민족의 나라 사랑은 대단하다. 2천여 년 동안 나라없는 설움을 겪은 그들은 영토 수호 의지가 남다르고, 남녀 모든 국민이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고 군인에 대한 존경을 보낸다. 전쟁이 날 때마다 전세계에서 이스라엘로 참전하기 위해 입국하는 유대 민족의 행렬은 그들의 영토 수호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예이다.
우리는 인간이 만든 극악의 장벽인 DMZ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대한민국 내에 기존의 장벽을 만들어온 영토를 전략적으로 침범하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외국인이 토지를 매입하고 다시 팔지 않으면 그 땅은 우리 땅이라 할 수 없다. <장벽의 시간>을 읽는 동안, 인간이 만든 장벽을 만들 때보다 교류를 통해 더욱 발전한 것이 사실이다.
모두가 장벽의 역사에서 장벽이 가지는 의미를 심층 기사를 다루는 듯 하나에서 열까지 기록하고 있어 세계사와 개인의 관계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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