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본격 한중일 세계사 10 - 강화도조약 Ominous ㅣ 본격 한중일 세계사 10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3월
평점 :
위즈덤하우스에서 출판하고 굽시니스트 김선웅 작가님이 저술한 <본격 한중일 세계사 10 강화도조약>은 서양 천하를 둘러보고 온 일본 집권 세력이 강화도 조약을 맺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과거 한중일 역사 교과서가 공동으로 제작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세 나라의 국민이 서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순간이 다가오는 것 같아 내심 기뼜는데, 일본이 이번에 모든 교과서에 수록한 역사를 왜곡한 교과서를 전면 제작하는 모습을 보고는 20년 동안 그들이 단계적으로 꾸준하고 음험하게 준비해온 과정을 완성하는 모습이 이제 드러내는 것 같아 씁쓸하다.
한중일이 공동 역사 교과서를 편찬해 학교에서 채택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바램일까?
이번 <본격 한중일 세계사 강화도조약>은 1870년대 혼란스러운 프랑스 정국을 시작으로 한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미국을 거쳐 유럽의 여러 나라를 돌아보며 일본이 배울 수 있는 나라를 고민한다. 그들은 이념 갈등으로 내전이 벌어지고 민주주의와 사상의 자유를 백성이 고민하는 프랑스는 본받을 나라가 아니라고 단정한다.
사절단은 독일의 비스마르크 수상이 초대한 파티에서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국제사회의 논리에 독일이 최근 힘을 과시하는 모습을 배우라는 말에 독일처럼 힘을 키우기로 결심한다.
사절단은 귀국후, 요직을 차지하고 군제를 개혁한 후 전국에서 징병제를 통해 3,272명의 병사를 충원한다.
이들은 해외 원정의 첫 번째 목표물은 대만으로 정한다.
1871년 12월 류큐 미야코섬 사람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대만에 표착한 후 그곳의 파이완족에서 류큐인 54명이 참수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청나라에 자기 국민이 살해당했으니 대만에 군대를 보내 사건을 조사하려 한다. 이로써 류큐와 대만을 집어삼킬 첫걸음이 시작된다.
1874년 5월, 일본 정토군 3,600명은 대만 남부 헝춘반도에 상륙 류큐 표착민 학살 사건의 주범인 무단사 마을의 추장 아록고와 그 아들을 사살한다. 이어서 한 달 동안 주변 원주민 마을들을 불태우며 토벌 작전을 진행한다.
해군이 없는 청조는 일본의 대만 침략에 맞설 해양 전력이 없었다.
이에 주청 영국 공사 웨이드의 주선으로 이호앙과 오쿠보가 베이징에서 협상에 임해 1874년 10월 청일양국호환조관을 체결하고 류큐를 복속한다.
다음은 조선이다. 조선에 국서를 보냈지만 4년 동안 대답이 없고 오히려 동래부사 정현덕은 일본은 무법지국이라한다. 이에 일본은 조선이 쓰시마에만 허용했던 왜관을 동래에도 설치하고 국서를 수납하라고 요구하며 1872년 9월에는 군함 2척과 병력을 이끌고 입항한다.
왜관에 쳐들어온 일본 병력을 격퇴해야 했지만, 당시 조선은 강화도 지역을 지키는 것에 부산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1875년 9월 20일 일본 운요호는 식수가 떨어진 긴급 구난 상황에는 영해, 영토에 진입할 수 있다는 국제법을 내세워 강화도 앞바다로 진입하나. 작은 보트를 타고 진입하려는 순간 조선 수군은 이들을 향해 대포를 발포하고 이들은 다음날 아침 초지진으로 포격을 개시한다.
운요호는 오후 영종도 앞바다에 정박하고 22명의 군인으로 영종진을 함락한다. 운요호 사건을 보고받은 조정은 조일수호조규 즉,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다.
이 책은 강화도 조약에 이르기까지 조선, 청조, 일본의 국내 정치상황을 주도 세력의 권력 투쟁 과정을 보여준다.
조선
조선의 경우, 고종의 즉위 과정과 흥선대원군의 섭정 동안 이루어진 일과 고종의 친정을 위해 대원군 세력의 실각을 보여준다.
명성황후와 대원군 세력이 돌이킬 수 없는 원수가 되는 사건을 민승호 대감 집에서 일어난 폭탄테러 사건으로 보고 있다.
1875년 1월 5일, 민승호는 생모의 모친상으로 휴직 기간 중 뇌물인 줄 알았던 선물 상자를 개봉하는 순간, 폭탄이 터져 본인과 아들, 양어머니가 사망하게 된다. 이 양어머니가 중전인 명성황후의 생모였다. 중전은 대원군 세력이 저지른 일이라 의심하고 친흥파 세력을 모두 제거하고 경복궁과 흥인군 자택에 방화 사건이 일어나고 대원군의 측근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일본
일본의 경우, 이와쿠라 사절단이 떠난 2년 9개월 동안, 유수 정부의 수석 참의 사이고 다카모리는 제도 개혁과 새로운 정책을 발표하며 빠르게 정권을 장악한다.
각의를 장악해 정치 권력을 손에 넣고, 육군 대장 근위도독이 되어 육군을 손에 넣고, 에토 신페이와 손잡고 사법 권력을 손에 넣고, 누가 봐도 그 야심을 의심치 않을 수 없지. (79쪽, 메이지 6년 정변 중)
국내 세력을 평정하고 권력을 장악한 사이고 정한론을 논의하고자 조선에 직접 특사로 가고자 한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귀국해 국내 경제 발전에 집중해야 한다고 하자 삿쵸(사쓰마, 조슈)를 기반으로 한 이와쿠라 세력과 사이고 세력 간 충돌은 불가피했다. 이와쿠라는 열세인 세력 균형을 회복할 핵심을 알고 있었다.
천황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천황 칙답을 발표해 사이코 세력을 몰아낸다.
청나라
청나라는 서태후가 권력을 차지하고 호남 출신의 섬감총독 좌종당과 안휘 출신의 북양대신 이홍장 세력을 이용해 서로 견제하는 형국이었다.
1862년에 터진 감숙성과 섬서성의 이슬람 반란이 13년 동안 지속되었고, 더 서쪽의 신장위구르 지역은 1860년대 중반 청조에 대한 복속에서 벗어난 지 10년이 되어 독립국을 건설하려 했다.
이홍장과 유명한 해방새방(海防塞防) 논쟁을 벌이게 되는데, 좌종당은 러시아를 경계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남하에 맞서 북방의 방비를 주장했고, 이홍장은 영국 세력을 경계했기 때문에 해안지대의 방비를 주장한 것이다.
신장위구르의 독립은 몽골이 무너지고 만주가 무너질 수 있어 청조는 이를 막기에 혈안이 되었다.
서태후는 국방 예산을 8:2로 신강 원정이 중요하게 여겨 돈을 몰아준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둘러싼 한중일의 당시 상황을 나라별로 알 수 있어 흥미로웠다. 한중일을 이끌었던 인물에 관해 개별적으로 알고 싶은 점들이 생겨 당시 인물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찾아보기로 생각했다.
세계사에 관심을 가진 분이라면 <본격 한중일 세계사>시리즈를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본격한중일세계사 #굽니시스트 #위즈덤하우스 #강화도조약 #역사 #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