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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사랑한 천재들 - 백석·윤동주·박수근·이병철·정주영
조성관 지음 / 열대림 / 2020년 10월
평점 :
백석·윤동주·박수근·이병철·정주영
열대림에서 출판한 천재연구가 조성관 작가님의 <서울이 사랑한 천재들>은 ‘도시가 사랑한 천재들’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조성관 작가님은 <월간조선> 기자를 거쳐 <주간조선> 편집장을 지냈다.
도시가 사랑한 천재라는 주제를 가지고 지난 15년간 9개 도시에서 54명의 천재를 조망했다.
<빈이 사랑한 천재들>에서는 클림트와 프로이트를, <뉴욕이 사랑한 천재들>에서는 앤디 워홀과 백남준을, <도쿄가 사랑한 천재들>에서는 도요다 기이치로, 무라카미 하루키를, <프라하가 사랑한 천재들>카프카를 소개하고 체코 정부로부터 공훈 메달을 수상했다.
이번에 발간된 10권인 <서울이 사랑한 천재들>은 시리즈의 완결편이라 한다.
요즘 들어 가장 주목받고 있는 시인은 ‘백석(1912~1996)’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백석은 ‘파란 혼불처럼 떠도는 문학사의 고아’라 불리듯이 그는 시인, 소설가, 번역가, 에세이스트로 활동한다.
이례적으로 ‘영문학 번역가’이면서 ‘러시아 문학 번역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백석은 98편의 시 작품을 남긴다. 200여 편을 남긴 김소월에 비하면 작품 수는 적은 편이지만, 그에 관한 연구는 매년 논문이 나올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다.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고, 조만식 선생이 교장으로 있던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고자 사범학교를 진학하고자 하지만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으로 <그 모와 아들>을 발표했다. 소설가는 열아홉 살의 백석. 고향 마을도 놀랐고 조선에서 주목받는 소설가 백석이 주목받는 사건이었다.
조선일보 방응모는 장학생으로 백석과 3명은 일본으로 유학하게 된다.
백석이 다닌 아오야마가쿠인 대학에서 그는 1학년 때 영어를 마스터했고, 2학년 때는 프랑스어를, 3학년 때는 러시아어까지 수강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후, 방응모 사장에게 인사를 하러 간 그에게 방사장은 자신의 옆에서 일하길 제안하고 이로써 백석을 조선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하게 된다.
서울에 연고가 없던 백석은 통의동 7-6의 한옥 문간방에서 하숙을 정했다. 경복궁 영추문 바로 앞이다.
조선일보를 사직한 후, 그는 영어교사로 재직하고 자신이 사랑한 여인이 친구와 결혼한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김영한을 만난다.
당대 문단의 여류작가 4인방 노천명, 모윤숙, 이선희, 최정희는 모두 그를 좋아했다.
하지만 가장 흥미로운 내용은 백석의 연인 김영한이 1995년 자신의 과거를 공개한 책을 내면서이다.
그녀는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서 고급 요정 대원각을 운영했다.
대원각은 1950~1970년대 서울의 3대 요정이었다.
그녀는 자전 에세이 <내 사랑 백석>을 통해 자신의 백석의 ‘자야’라 주장했다.
2년 후, 그녀는 세상을 또 한 번 놀라게 한다. 자신이 운영한 대원각의 부동산 일체를 부처님에게 시주하기로 한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감화되어 그는 대원각 부동산을 시주하고 사찰로 만들어달라고 법정에게 청했다. 법정은 이를 받아들이고 1997년 길상사가 창건된다.
김영한은 눈을 감으며 “천억 원의 재물도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는 말을 남긴다.
두 번째로 소개하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1917~1945)는 외사촌 송몽규와의 인연이 소개된다.
이는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를 통해 윤동주의 도쿄, 교토 도시샤 대학 시절과 후쿠오카 형무소 시절에 관한 내용이 책 속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윤동주는 북간도에서 태어나고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다.
박수근 화백과 관련한 서울의 공간은 창신동 박수근 화백의 자택이다.
현재 신세계백화점이 있는 자리는 과거 미군 PX 자리였는데, 그는 그곳에서 초상화를 그려 모은 돈으로 창신동 18평 한옥을 구입해서 12년 동안 단란하게 살았다고 전한다. (1952~1963)
박수근(1914~1965) 화백과 박완서 소설가의 <나목>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미8군 PX 초상화부에서 근무하는 동안, 화가와 미군을 연결해주었던 개풍 출신의 여성이 있었다. 이 여성은 화가들에게 일을 나누어주고, 완성한 그림을 미군들에게 되돌려주었다.
이 여성은 1970년 <여성동아>에 장편소설 <나목>이 당선되어 소설가로 데뷔한다. 그녀가 바로 박완서이고, 소설 <나목>은 박순근 화백을 모델로 한 소설이다.
이병철(1910~1987), 정주영(1915~2001) 회장 역시 1910년대 생이고, 서울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서울에서 사업을 크게 성장하는 경험을 한다.
이병철 회장과 관련한 서울의 공간은 신라호텔이다.
나는 이곳이 이전에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의 박문사 자리였다는 말을 듣고 신라호텔이 이 부지를 인수해서 ‘신라’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을 보고 혼자서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이토를 기리는 박문사에 안중근 선생의 아들을 데리고 와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과 악수를 하고 사죄하는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그곳을 매입해 신라호텔을 설립한 이병철 회장에 대해 호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정주영(1915~2001) 회장과 관련한 서울의 공간은 청운동 자택이다.
그는 강원도 통천에서 아버지가 소를 판 돈을 가지고 서울에 와서 쌀가게와 아도서비스(애프터서비스의 일본식 표현)으로 자동차 공장을 차리고 현대건설, 현대중공업으로 기업가 정신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가 노벨 경제학상에 추천되었다는 사실과 평소 문인들과 어울리고 그들의 행상에 꾸준히 참석하는 모습과 박경리 선생의 토지 완간 기념회에 박경리 선생, 박완서 선생과 함께 떡을 자르는 모습을 그의 색다른 모습이었다.
정주영 회장의 끊임없는 상상력의 발원은 문학작품에서 출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정주영 회장의 일화는 현대중공업을 설립하는데 필요한 차관을 얻기 위한 영국의 조선회사에서 추천서를 받는 장면이다.
영국의 조선회사의 회장은 우리의 기술력에 관해 비관적인 말을 계속하는 가운데, 정주영 회장은 바지속의 500원 지폐에 새겨진 거북선을 가르키며 영국은 1800년대에 선박을 건조하지만 우리나라는 1500년 대에 벌써 철로 만든 함선을 만들었다고 설득해 추천서를 받는 장면이다.
일전에 서울여행에서 계동의 현대본사에서 청와대 뒤편으로 걸어가 본 적이 있다.
정주영 회장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6시에 아들을 대동하고 청운동 자택에서 계동 사옥까지 50여 분의 거리를 매일 출근했다고 하는데 나는 간접적으로 그의 발자취를 느끼는 경험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 년 전에 태어난 서울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지금 우리의 문화,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는 점이다.
<서울이 사랑한 천재들>이라는 제목에서 천재들이 활약한 서울의 공간이 아직도 온전하게 찾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서울여행에서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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