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듬히 - 시인의 사물이 있는 정현종 시선집
정현종 지음 / 문학판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스듬히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철면피한 물질

 

 

끝없는 물질이 능청스럽게 드러내고 있는

물질이 치열하고 철면피하게 기억하고 있는

죽음.

내 귀에 밝게 와서 닿는

눈에 들어와서 어지럽게 흐르는

저 물질의 꼬불꼬불한 끝없는 미로들,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능청스런 치열한 철면피한 물질!

 

 

 

()

 

 

새는 날아다니는 자요

나무는 서 있는 자이며

물고기는 헤엄치는 자이다

세상 만물 중에 실로

자 아닌 게 어디 있으랴

벌레는 기어다니는 자요

짐승들은 털난 자이며

물은 흐르는 자이다

스스로 자인 줄 모르니

참 좋은 자요

스스론 잴 줄을 모르니

더없는 자이다

人工은 자가 될 수 없다

(모두들 人工을 자로 쓰며

깜냥에 잰다는 것이다)

자연만이 자이다

사람이여, 그대가 만일 자연이거든

사람의 일들을 재라

 

 

 

구름

 

 

지리산 근처의

구름 보셨나요?

(그 아래 질주하는

자동차도 보셨지요?

경주가 안 되지 않아요?)

하여간 그 아래서 나는

시골버스를 기다리면서

큰산들에 둘러싸여 행복하여

버스는 오든지 말든지

그냥 거기 공기로 섞여 어정거리며,

여러 해 전 새재 골짜기에서

구워먹은 구름 생각도 했습니다.

그때 골짜기에서

돌 위에 고기를 구우면서

내가 창자를 다해 구워먹은 건 실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구름이었습니다.

 

정현종 시인의 <비스듬히> 시선집을 소개합니다.

 

정현종 시인은 1939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철학과과 졸업했다.

1965<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뒤, <사물의 꿈>을 비롯한 다수의 시선집과 산문집을 출간했다.

 

번역서로 파블로 네루다의 작품과 릴케, 네루다, 로르카의 해설집을 출간했다.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를 역임한 시인은 한국현대시를 대표한다.

이번 시선집은 그의 등단 50년에 맞춰 기획된 작품이고, 그의 시를 모았을 뿐 아니라 그의 서재, 시인의 유화 작품, 고풍스러운 소장품과 니체의 친필원고도 실었다.

 

 

그의 작품 <비스듬히>를 보고 있으면,

마치 사람()이라는 한자가 저절로 떠오른다.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는 우리 말이다.

 

우리가 오늘 처한 현실은 사람이 다가오고 서로 교류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외면하는 것은 본성에 어긋난다.

 

생명은 본질은 서로 기대며 살아간다.

나무조차 공기에 기대어 살아간다는 시인의 관점은 상당히 공감한다.

 

다시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가 비스듬히 다른 이와 비스듬히 받치는 일상으로의 회복을 기대한다.

 

 

<구름>을 감사하며 나 역시 지리산 종주할 때 계속 하늘을 올려다본 기억이 떠오른다.

산의 일기는 시시각각 변하고 구름의 형상과 이동은 산행의 일정을 계획하게 한다.

종주를 마치고 내려와 바라본 구름은 빠르게 다시 산을 덮어갔다.

당시 바라본 구름의 이동은 나의 뇌리에 또렷이 각인되어 있는데,

시인은 돌 위에 구워 먹은 것도 구름이라고 한다.

 

그는 인간과 자연을 중요시한다.

인공에 대한 부정을 강조하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깨닫기를 희망한다.

 

그의 서재를 바라본 순간, 니체, 릴케, 네루다를 본 순간 나의 이런 생각은 더욱 확신으로 갈무리된다.

 

일전에 <일 포스티노>의 주인공 네루다를 보고 그의 일생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데, 민중을 사랑하는 그의 활동이 떠오른다.

 

한편으로 시인의 서재 속 니체의 책을 본 순간,

나는 안도한다.

 

예전에 읽었던 니체의 작품을 읽어보고 나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손때가 묻은 여러 차례 펼쳐진 그의 책을 보니, 나도 다시 한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며 나의 동선과 그와의 접점을 발견하고 많이 놀랐다.

카이로의 상형문자와 대영박물관의 로제타스톤은 그의 관심사를 엿본 기분이다.

 

니체의 친필원고와 똑같은 원고지에 자신의 애장하는 만년필로 한 글자 한 글자 꼭꼭 눌러쓰는 그의 시는 지향하는 점을 분명히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비스듬히 #정현종 #문학판 #책과콩나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