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내가 무엇을 피하려고 했는지 이제는 안다. 내가 어떨 때 거짓말하는 인간인지, 무엇을 부끄러워하고 무엇에서 도망치는 인간인지 생각하기 싫었다. 그런 나를 내게서 빼고 싶었다. 그래서 잊고 살았다. 비슷한 일이 반복될수록 더 잊으려고 했다. 결국 나는 나쁜 것을 나누며 먹고사는 어른이 되었다. 괜찮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괜찮겠지, 괜찮겠지, 아직은 괜찮겠지, 기만하는 수법에 익숙해져 버린 형편없는 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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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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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중지


이웃 블로거였는데, 누군지 기억은 안 난다. 그 당시 계간 창작과 비평에 실린 소설 한 편을 소개했다. 제21회 창비신인소설상 당선작이었는데, 최근 본 소설 중 가장 참신하다고 했다. 궁금한 마음에 한달음에 링크를 클릭하고 들어가 읽었는데, 한호흡으로 쉬지 않고 읽었다. 다 읽고 나서 이 소설 뭐지? 하며 북마크에 저장해두고 몇 번 더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용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세상에, 작가의 이름을 까먹고 있었다. 최근 <일의 기쁨과 슬픔>의 추천과 광고를 보며 한때의 “마케팅”(최근 책에 대한 마케팅도 늘어나서 걸러보는 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이겠거니 했다. 맙소사, 이게 그때의 그 소설의 작가책이었다니. 이 사실을 알자마자 바로 전자책을 구매했다.



오랜만이었다. 단편을 마치 장편처럼 한 번에 쭉 읽어내려간 것은. 장편이 한 번에 읽힐 때와 단편소설집이 한 번에 읽힐 때의 기분은 무척 다르다. 물론 둘 다 한 번에 읽힌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기쁘지만. 어떻게 다르냐고 묻는다면 장편이 한 번에 읽히면 길을 벗어나지 않고 쭉 가준 작가에게 고마운 마음에 벅차고, 단편이 한 번에 읽히면 작가의 세계관이 한 세계 안에서 복작거리는 느낌이라 고맙다고 해야 할까.



내가 느낀 장류진 작가의 소설의 강점은 현실성이다. 정확하게 사회를 꿰뚫어본다. 판교 한가운데 서있는 기분. 너무 현실 같아서 서늘함마저 느끼진다. 하지만 결코 무겁지 않다. 반대로 가볍지도 않다. 적당한 무게로 써 내려간 느낌.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돌아보면 내 옆에 있는 것 같다. 어쩜, 그래, 맞아, 저런 사람 너무 싫어.라는 소란스러운 혼잣말도 몇 번이나 내뱉었다. 빛나 언니가 옆 사무실에 있는 것 같고 다음 달에 포인트로 월급을 받을까 봐 무섭기도 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가 너무 이해가 되어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고, 나의 첫 출근이 생각나기도 하고, 또..또.. 그렇게 나는 인물들에게 몰입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매 소설마다 나의 느낌을 말하고 싶은 지경이었다. 내가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지, 이게 얼마나 현실인지. 아마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 그랬었던 기억과 들었던 기억들을 동시에 떠올리며.



장류진 작가는 최근 본업을 “소설 쓰기”로 바꾸었다고 한다. “소설 쓰는 장류진”으로 소개했다. 이렇게 읽고 나서 흥분하고 추천하고 싶은 소설을 만날 때마다 기쁘다. 더 많이 써줬으면 좋겠다. 나는 소설이, 특히 한국소설이 좋다. 현실적이든 비현실적이든 고개가 끄덕여지고 소름 돋을 만큼 이해되는 다양한 인물들을 마주하는 게 좋다. 그 점에서 앞으로 “소설 쓰는 장류진”의 행보도 무척 기대된다. 더 많은 이야기와 삶과 사람을 만나고 싶다.

[발췌]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 거. 월세가 싼 방에는 다 이유가 있고, 칠억짜리 아파트를 받았다면 칠억원어치의 김장, 설거지, 전 부치기, 그밖의 종종거림을 평생 갖다바쳐야 한다는 거. 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 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 그걸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나는.

-잘 살겠습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안 해야 돼요.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머리가 이상해져요.”

-일의 기쁨과 슬픔





걷다보니 어느새 하카타역 근처에 도착했다. 역사 입구에 꾀죄죄한 보자기를 둘러쓴 할머니가 종이컵을 들고 구걸하고 있었다. 아주 작은, 쪼그라들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작은 할머니였다. 마침 잘됐다. 나는 주머니에 들어 있던 엔화를 한움큼 집어 거지 할머니의 종이컵에 쏟아부었다. 뒤이어 참방, 하는 소리가 났다. 동전을 던져 넣었던 손이 갑자기 축축해졌다.

“에에?”

할머니는 비명을 지르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말도 안 돼. 종이컵 안에는 커피가 들어 있었다. 거지가 아니라 그저 커피를 마시고 있는 할머니였을 뿐이라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커피에 젖은 손이 기분 나쁘게 끈적거렸다. 당황해서 끈적이는 손가락만 접었다 펴며 머뭇거리는 사이, 건너편에서 한 거구의 남성이 알 수 없는 일본어로 소리를 지르며 다가왔다. 반짝이는 대머리에 턱수염과 콧수염만 잔뜩 기른, 한마디로 야쿠자같이 생긴 남자였다. 얼마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지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이마에 튀어나온 힘줄이 다 보였다. 저 남자는 대체 누구지. 이 할머니 아들인가.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으니까 더 무서웠다. 나는 백팩을 추켜올리고 지하철 역사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갔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나는 알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후회하는 몇가지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애써 다 털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내 안 어딘가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고, 떼어내도 끈적이며 남아 있는, 날 불편하게 만드는 그것. 내가 그것을 다시 꺼내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꺼내서 마주하게 되더라도 차마 똑바로 바라보기는 힘들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탐페레공항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오래 울었는데도 이상하게 진정이 잘 되지 않았다. 심장이 물에 뜬 듯 출렁이는 것만 같았다. 나는 봉투 안에 든 편지를 꺼내서 펼쳤다. “글씨를 힘차게 쓰던 용감한 한국의 숙녀분께.”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구나. 나는 마치 그 편지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노인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한줄 한줄 읽어내려갈 때마다 알 수 없는 곳을 향한 미안함의 눈물이 자꾸 흘렀다. 편지의 끝에는 연락하고 지내자는 말과 함께 숫자 열세개가 적혀 있었다. 노인이 전화번호까지 적어줬었어? 왜 나는 이런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을까. 대체 왜.

-탐페레공항





타인이 건네는 따뜻한 온도를 잊지 않으면서도 4대 보험의 푹신한 촉감도 무시하지 않는 현실 인식. 이것이 장류진의 소설을 지탱하는 고유한 균형감각이다.

-해설/인아영





장류진의 소설은 말한다. “잘 살 수 있을까. 부디 잘 살 수 있으면 좋겠는데.” 빛나 언니와 ‘나’에게 동시에 향했던 「잘 살겠습니다」의 이 마지막 문장은 이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이 소설집의 바람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삭막하고 냉혹한 세계일지라도 우리, 부서지지도 먹히지도 말자고, 잘 살아보자고. 장류진 소설의 개인들은 시스템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지도, 그렇다고 무모하게 달려들지도 않으며, 일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작은 슬픔과 행복을 긍정한다.

-해설/인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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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 요조와 임경선의 교환일기
요조.임경선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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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 작가에 대해

임경선 작가 초청 북콘서트에 참여한 적이 있다. 이미 작가의 팟캐스트를 열렬히 듣고 있었고, 임경선 작가의 책이라고 하면 소설, 에세이 할 것없이 죄다 찾아 읽을때인지라 열렬한 자세로 참여했다.(신청시간에 맞춰 알람까지 설정해두었다.) 아직도 기억나는것 하나는 책 이야기를 조금 하다가 “자 이제 각자 고민이나 이야기 해봐요. 토요일 낮에 이곳에 오는 사람치고 사연 없는 사람 없다.”고 했다. 실제 당시 내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사람과 관계에 치여, 방향을 잃은 느낌. 말그대로 바닥을 치고 있었다. 내 마음을 아는걸까, 모두가 다 그렇게 사는걸까. 내심 위로가 되던 순간이었다. 딱히 내 고민에 대해 이야기하진 못했지만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었던 순간이었다.



자부할 수 있다. 임경선 작가의 책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봤노라고. 소설, 에세이 할 것 없이 모두다. 개인적으로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작가의 입장을 고수한 작가의 소설을 에세이보다 더 좋아한다. 특히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내가 무너질때마다 정독하는 책이다.(벌써 몇번이나 정독했는지 모른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소설 속 씩씩하고 묵묵한 인물들이 나에게 힘을 내라고, 응원해주는 것 같다.(이번 방콕여행 후에도 정독한건 절대 안비밀) 오래 글을 썼으면 하는 작가, 임경선 작가. 끝끝내 후리스와 내복을 입지 않았으면 좋겠다.





요조 작가? 뮤지션? 책방주인?에 대해

다재다능한 여자같으니라고. 요조에 대해선 무엇을 붙여야할지 모르겠다. 내게 가장 익숙한 것으로 이야기하라면 팟캐스트 진행자인데. 사실 요조에 대해 아는거라곤 “사랑의 롤러 코스터~”밖에 없었다.(홍대여신으로 이름을 떨칠때에도 나는 요조의 존재를 몰랐다.) 이마저도 부르는걸 본 적은 없고 그저 라디오에서 몇 번 들었는데 음이 원체 특이해서 그냥 외워졌다. 팟캐스트 세계에 발을 들이고 한참이 지난 어느 날, 빨간 책방이 슬슬 지겨워진 어느 날 알게된 “책 이게뭐라고”. 내가 좋아하는 장강명 작가잖아?라며 듣기 시작했는데 요조가 있었다. 그땐 궁금했다. 요조가 왜 책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것일까. 알고보니 요조는 책방 주인이었고, 책을 좋아하고, 이미 글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요조를 딱히 좋아하지 않았는데 팟캐스트를 듣다보니, 목소리가 너무 매력적이다. 특히 그 느릿느릿한 말투. 아무리 누가 뭐라해도 절대 빨라지지 않을 것 같은 말투. 그렇게 나름대로 정을 쌓아갔다.(일방적인 정) 팟캐스트를 챙겨듣고, 제주도 책방 무사를 찾아갔다.(그것도 두번이나!!) 하지만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어마어마한 사실을 알았다. 내가 좋아하는 임경선 작가와 무척 친하다는 사실(뭐랄까, 혼자 대단한 사실로 여겨짐). 난 이 사실이 왜 이렇게 반가웠던걸까. 기본적으로 “끼리끼리” 친해진다고 생각한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 같은 부류의 사람들. 그때부터 더 좋아진 요조. 언젠가 음반을 꼭 발매했으면 좋겠고, 지치지 말고 자신의 목소리를 냈으면 하는 사람. 그런 목소리로 책을 냈으면 좋겠는 사람. 영원히 잭키찬으로 남았으면 하는 사람, 내게 요조는 그런 사람이다.

두 사람이 만나 “교환일기”라는 다소 낯간지러운 이름으로 팟캐스트를 시작했다. 그녀들의 일기 혹은 수다는 범위라는게 없었다. 물론 “여자”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책 제목도 결국 “교환일기”라는 낯간지러운 이름 대신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가 아니었을까. 그녀들은 자신에게 또 서로에게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한다. 어떠한 형식이나 틀에 구애받지 않은 날것이지만 농도가 짙은 이야기는 듣는내내 마음을 울리더니 읽는동안에도 마음을 울렸다. 천천히 읽으며 밑줄을 긋게 만든 책이었다.



각자 18번씩 서로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한다. 자칫 개인적일 수 있는 이야기들을, 덤덤하게 말한다. 주춤거림이 없어 좋은 이야기. 나아가고 참고 해내는 대신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고 멈춰서 생각하고 참는대신 풀어내라고 응원하는 것 같다. 두사람만의 특유의 열심과 성실과 자유로움이 묻어 있는 글을 읽으며 내내 감탄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녀들의 삶과 생각에 나의 삶과 생각을 빗대어 보았다. 나 잘하고 있는건가, 반성을 하고 조바심을 내기도 하고 위안을 하기도 했다. 결국 그녀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였다. 책을 읽는내내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나서 기뻤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기쁨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발췌]

“저는 정말 바보 눈에는 바보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을 백 퍼센트 믿거든요. 그래서 어떤 영화나 책이 명백한 문제는 없는데 감흥이 없고 별로라고 여겨질 때, 일단 문제는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55쪽, 요조)



“나는 아무리 건강한 게 최고라고 해도,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갈 때 건강하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냐고 항변하고 싶어. 건간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말은 맞지만 그렇다고 ‘건강이 인생의 모든 것’은 아닌 것 같아. 건강 자체가 삶의 목적이나 열정이 되는 인생은 어쩐지 심심하고 쓸쓸해.”(65쪽, 경선)



“인간은 ‘감정’이라는 영역을 가지고 있어 종종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는데, 그건 그것대로 과히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 아니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고 때로는 위대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 “(95쪽, 경선)



“앞으로 무슨 어려움이 있든 간에, 어떤 형태로든 표현하는 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어. 하지만 그와 동시에 행여 나의 슬픔, 나의 고통에만 예민하게 집중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항상 서늘하게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도 필요하겠고.”(196쪽, 경선)



“다만 제가 겨우 아는 것은 나는 나를 모른다는 것, 그저 나도 어쩔 수 없는 나의 선택들이 나를 더욱 나로서 만들어준다는 것뿐이에요.”(235쪽, 요조)



“몸을 열심히 부려서 땀을 흘리면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고, 거창한 표현이긴 하지만 어쩐지 생의 작은 한순간에 최선으로 임한 것처럼 뿌듯하고, 심지어 변태처럼 이 땀을 어딘가 자랑하고 싶은 마음마저 들어요.”(264쪽, 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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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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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묻는 시간, 가만히 앉아서 글자에 일상을 가두는 시간이. 일어난 일을 나열하다보면 불분명하던 감정도 한군데로 고여 어떤 단어가 되었다. 엉켜있던 생각을 정리하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결말에 닿기도 했다. 일기를 쓰면서 울기도 졸기도 했다. 미소 지을 때도 있었다.”고 말하던 네가 그날엔 더 이상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걸 보면서 그건 당연한거라며 고개를 끄덕였어. 그래, 2008년 7월 14일. 수없이 그 날로 돌아가는 너의 모습을 보며, 나 역시 나의 메모장에 그 날짜를 적어놓고, 그날을 기준으로 너의 앞과 뒤의 날들을 그리고 또 그 날을 계속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

“글을 잘 쓰는 제니도 부러웠지만, ‘싫어요’라고 말하는 제니가 더 부러웠”다고 말하는 너. 어른들말에 고분고분했던 널, 늘 괜찮다고 말했던 널, 어른스러움를 당연하게 생각했던 널, 스스로 원망하는 모습을 보며 나 또한 어린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어. 그래야만 하던 어린시절. 그렇게 무언의 강요를 받으며 커야만 했던 어린시절. 너도 나도 맏이라서 더 그랬겠지. 어렵사리 너의 일을 고백하는 네게 “이거는 너랑 나 말고 아무도 알아서는 안 돼”라고 말하는 엄마를 보며, 너는 한번 더 네 자신이 갈갈이 찢기는 고통을 느꼈을거야. 정말 딸을 위한 일이었을까. 그래, 나름대로 그분의 최선이었겠지. 자신을 또 너를 지키기 위한 최선. 그렇게 믿지 않고선 우린 견딜수가 없을테니까.

그로인해 넌 더욱더 두려움를 느꼈지. 이대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두려움. 거기에 제니를 지킬 수 없다는 두려움까지. 이 모든것이 너를 움직이게 했어. 하지만 어른들은 너의 두려움마저 짓밟았어. 참 쉽더라. 그지? 너 하나 먼지로 만들고, 있던 일을 없던 일로, 증거마저 다른 일로, 널 영악한 아이로 만들어 버리는 일. 돈이면, 정말 돈이면 다 되는 세상. 너는 더작아질 수 밖에 없었지. 내가 네 곁에 있었다면 나는 무엇을 해 줄 수 있었을까. 나는 거기의 어른들과 다르게 널 도울 수 있었을까. 아니, 최소한 너의 진실을 믿어줄 수 있었을까. 말이 말을 만들고 소문이 소문을 만드는, 이젠 진실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세상속에서 나는 과연 너를 믿을 수 있었을까. 나도 나를 못믿겠어.

끝내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안에서 쳇바퀴를 돌듯 돌고 도는 널보며, 과연 무엇이 널 도울 수 있었을까 생각했어.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이미 그 기회를 잃고 말았지. 그 날, 진심으로 도와달라던 너의 다급함을 우리 모두 외면하고 말았던거지. 우린 네게 씻을 수 없는 큰 빚을 지고 말았어. 그것도 너의 인생이라는 거대함 앞에서. 그랬기에 “나는 내 인생 최대 불행이 강간당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내 인생 최대 불행은 이런 세상에, 이런 사람들 틈에 태어난 거다.”라고 했을때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었어. 어떻게 너에게 지금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다시 시작해보자는 등 그런 희망적인 말을 할 수 있겠어.

결국 넌 너로 살기위해, 소중한 것들도 놓기로 해. 너를 기만하지 않기 위해, 소중한 것들까지 놓아가며 넌 0이 되기 위해 노력해. 완전한 0을 위해 제니고 승호도 놓아버리는 용기. 지난날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경찰서를 찾았던 소녀의 모습으로 넌 지금의 너를 지키기 위해 다시 떠날준비를 하지. 지금으로부터 벗어나 너를 찾아가는 길. 우리는 어떤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완전히 괜찮아지는 널, 꿈꾸는건 모순일거야. 그래도 너의 용기라는 희망이 지금보다 더 나은 너로 홀로 설 수 있게 하길. 그렇게만 된다면 우린 너에게 기대어 너에게 조금은 사죄할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앗아버린 너의 찬란한 청춘을 되돌릴 순 없지만 적어도 앞으로 이런일이 생기지 않도록 우린 부단히 노력해야겠지. 특히 너의 마지막 당부도 잊지말고, 그렇게.

“만약에 네가 성범죄를 당한다면 증거를 꼭 남겨야 해. 녹음이든 사진이든 남겨야 해. 몸을 씻지 말고 바로 경찰서로 가야 해. 당시 입었던 옷과 속옷도 다 챙겨야 해. 안전한 장소는 없어. 집도 바깥도 위험해. 사람이 많은 곳도 사람이 없는 곳도 위험해. 도시도 시골도 버스도 택시도 공개된 장소도 밀폐된 장소도 위험해.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밤도 새벽도 다 위험해. ‘괜찮겠지’란 생각은 위험해. 상대가 그러기로 마음먹었다면, 성범죄를 피할 방법 따윈 없어. 조심하라는 말이 아니야. 죽일 수 있다면 죽이라는 말이야. 살아남으라는 말이야.”(제니에게 쓴 편지 중)

누군가 내게 상처 입힌 일에도 내 잘못부터 찾으려고 했다. 내 잘못을 찾을 수 없을 때는 타인의 잘못을 실수라고 이해했다. 나만 잘하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어른스럽다’라는 말을 칭찬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고 자랐다. 책임을 묻거나 외면하거나 눙치려는 어른이 아니라 ‘미안하다’고 말하는 어른,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어른이 한명이라도 나타나길 바랐다는 것을 어른이 되고서야 깨달았다. ‘저런 어른이 되어야지’라는 생각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여전히 내 잘못을 먼저 찾는다. 이제는 정말 그래야만 하는 어른이니까. 익숙한 감정 속에서 울다가 지치고도 잠들지 못하는 밤이 그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날도 있다.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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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상처 입힌 일에도 내 잘못부터 찾으려고 했다. 내 잘못을 찾을 수 없을 때는 타인의 잘못을 실수라고 이해했다. 나만 잘하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어른스럽다’라는 말을 칭찬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고 자랐다. 책임을 묻거나 외면하거나 눙치려는 어른이 아니라 ‘미안하다’고 말하는 어른,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어른이 한명이라도 나타나길 바랐다는 것을 어른이 되고서야 깨달았다. ‘저런 어른이 되어야지’라는 생각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여전히 내 잘못을 먼저 찾는다. 이제는 정말 그래야만 하는 어른이니까. 익숙한 감정 속에서 울다가 지치고도 잠들지 못하는 밤이 그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날도 있다.

-알라딘 eBook <이제야 언니에게> (최진영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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