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자책]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평점 :
판매중지
이웃 블로거였는데, 누군지 기억은 안 난다. 그 당시 계간 창작과 비평에 실린 소설 한 편을 소개했다. 제21회 창비신인소설상 당선작이었는데, 최근 본 소설 중 가장 참신하다고 했다. 궁금한 마음에 한달음에 링크를 클릭하고 들어가 읽었는데, 한호흡으로 쉬지 않고 읽었다. 다 읽고 나서 이 소설 뭐지? 하며 북마크에 저장해두고 몇 번 더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용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세상에, 작가의 이름을 까먹고 있었다. 최근 <일의 기쁨과 슬픔>의 추천과 광고를 보며 한때의 “마케팅”(최근 책에 대한 마케팅도 늘어나서 걸러보는 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이겠거니 했다. 맙소사, 이게 그때의 그 소설의 작가책이었다니. 이 사실을 알자마자 바로 전자책을 구매했다.
오랜만이었다. 단편을 마치 장편처럼 한 번에 쭉 읽어내려간 것은. 장편이 한 번에 읽힐 때와 단편소설집이 한 번에 읽힐 때의 기분은 무척 다르다. 물론 둘 다 한 번에 읽힌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기쁘지만. 어떻게 다르냐고 묻는다면 장편이 한 번에 읽히면 길을 벗어나지 않고 쭉 가준 작가에게 고마운 마음에 벅차고, 단편이 한 번에 읽히면 작가의 세계관이 한 세계 안에서 복작거리는 느낌이라 고맙다고 해야 할까.
내가 느낀 장류진 작가의 소설의 강점은 현실성이다. 정확하게 사회를 꿰뚫어본다. 판교 한가운데 서있는 기분. 너무 현실 같아서 서늘함마저 느끼진다. 하지만 결코 무겁지 않다. 반대로 가볍지도 않다. 적당한 무게로 써 내려간 느낌.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돌아보면 내 옆에 있는 것 같다. 어쩜, 그래, 맞아, 저런 사람 너무 싫어.라는 소란스러운 혼잣말도 몇 번이나 내뱉었다. 빛나 언니가 옆 사무실에 있는 것 같고 다음 달에 포인트로 월급을 받을까 봐 무섭기도 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가 너무 이해가 되어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고, 나의 첫 출근이 생각나기도 하고, 또..또.. 그렇게 나는 인물들에게 몰입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매 소설마다 나의 느낌을 말하고 싶은 지경이었다. 내가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지, 이게 얼마나 현실인지. 아마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 그랬었던 기억과 들었던 기억들을 동시에 떠올리며.
장류진 작가는 최근 본업을 “소설 쓰기”로 바꾸었다고 한다. “소설 쓰는 장류진”으로 소개했다. 이렇게 읽고 나서 흥분하고 추천하고 싶은 소설을 만날 때마다 기쁘다. 더 많이 써줬으면 좋겠다. 나는 소설이, 특히 한국소설이 좋다. 현실적이든 비현실적이든 고개가 끄덕여지고 소름 돋을 만큼 이해되는 다양한 인물들을 마주하는 게 좋다. 그 점에서 앞으로 “소설 쓰는 장류진”의 행보도 무척 기대된다. 더 많은 이야기와 삶과 사람을 만나고 싶다.
[발췌]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 거. 월세가 싼 방에는 다 이유가 있고, 칠억짜리 아파트를 받았다면 칠억원어치의 김장, 설거지, 전 부치기, 그밖의 종종거림을 평생 갖다바쳐야 한다는 거. 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 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 그걸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나는.
-잘 살겠습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안 해야 돼요.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머리가 이상해져요.”
-일의 기쁨과 슬픔
걷다보니 어느새 하카타역 근처에 도착했다. 역사 입구에 꾀죄죄한 보자기를 둘러쓴 할머니가 종이컵을 들고 구걸하고 있었다. 아주 작은, 쪼그라들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작은 할머니였다. 마침 잘됐다. 나는 주머니에 들어 있던 엔화를 한움큼 집어 거지 할머니의 종이컵에 쏟아부었다. 뒤이어 참방, 하는 소리가 났다. 동전을 던져 넣었던 손이 갑자기 축축해졌다.
“에에?”
할머니는 비명을 지르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말도 안 돼. 종이컵 안에는 커피가 들어 있었다. 거지가 아니라 그저 커피를 마시고 있는 할머니였을 뿐이라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커피에 젖은 손이 기분 나쁘게 끈적거렸다. 당황해서 끈적이는 손가락만 접었다 펴며 머뭇거리는 사이, 건너편에서 한 거구의 남성이 알 수 없는 일본어로 소리를 지르며 다가왔다. 반짝이는 대머리에 턱수염과 콧수염만 잔뜩 기른, 한마디로 야쿠자같이 생긴 남자였다. 얼마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지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이마에 튀어나온 힘줄이 다 보였다. 저 남자는 대체 누구지. 이 할머니 아들인가.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으니까 더 무서웠다. 나는 백팩을 추켜올리고 지하철 역사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갔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나는 알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후회하는 몇가지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애써 다 털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내 안 어딘가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고, 떼어내도 끈적이며 남아 있는, 날 불편하게 만드는 그것. 내가 그것을 다시 꺼내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꺼내서 마주하게 되더라도 차마 똑바로 바라보기는 힘들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탐페레공항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오래 울었는데도 이상하게 진정이 잘 되지 않았다. 심장이 물에 뜬 듯 출렁이는 것만 같았다. 나는 봉투 안에 든 편지를 꺼내서 펼쳤다. “글씨를 힘차게 쓰던 용감한 한국의 숙녀분께.”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구나. 나는 마치 그 편지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노인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한줄 한줄 읽어내려갈 때마다 알 수 없는 곳을 향한 미안함의 눈물이 자꾸 흘렀다. 편지의 끝에는 연락하고 지내자는 말과 함께 숫자 열세개가 적혀 있었다. 노인이 전화번호까지 적어줬었어? 왜 나는 이런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을까. 대체 왜.
-탐페레공항
타인이 건네는 따뜻한 온도를 잊지 않으면서도 4대 보험의 푹신한 촉감도 무시하지 않는 현실 인식. 이것이 장류진의 소설을 지탱하는 고유한 균형감각이다.
-해설/인아영
장류진의 소설은 말한다. “잘 살 수 있을까. 부디 잘 살 수 있으면 좋겠는데.” 빛나 언니와 ‘나’에게 동시에 향했던 「잘 살겠습니다」의 이 마지막 문장은 이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이 소설집의 바람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삭막하고 냉혹한 세계일지라도 우리, 부서지지도 먹히지도 말자고, 잘 살아보자고. 장류진 소설의 개인들은 시스템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지도, 그렇다고 무모하게 달려들지도 않으며, 일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작은 슬픔과 행복을 긍정한다.
-해설/인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