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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이제야 언니에게 ㅣ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평점 :
판매중지
“하루를 묻는 시간, 가만히 앉아서 글자에 일상을 가두는 시간이. 일어난 일을 나열하다보면 불분명하던 감정도 한군데로 고여 어떤 단어가 되었다. 엉켜있던 생각을 정리하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결말에 닿기도 했다. 일기를 쓰면서 울기도 졸기도 했다. 미소 지을 때도 있었다.”고 말하던 네가 그날엔 더 이상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걸 보면서 그건 당연한거라며 고개를 끄덕였어. 그래, 2008년 7월 14일. 수없이 그 날로 돌아가는 너의 모습을 보며, 나 역시 나의 메모장에 그 날짜를 적어놓고, 그날을 기준으로 너의 앞과 뒤의 날들을 그리고 또 그 날을 계속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
“글을 잘 쓰는 제니도 부러웠지만, ‘싫어요’라고 말하는 제니가 더 부러웠”다고 말하는 너. 어른들말에 고분고분했던 널, 늘 괜찮다고 말했던 널, 어른스러움를 당연하게 생각했던 널, 스스로 원망하는 모습을 보며 나 또한 어린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어. 그래야만 하던 어린시절. 그렇게 무언의 강요를 받으며 커야만 했던 어린시절. 너도 나도 맏이라서 더 그랬겠지. 어렵사리 너의 일을 고백하는 네게 “이거는 너랑 나 말고 아무도 알아서는 안 돼”라고 말하는 엄마를 보며, 너는 한번 더 네 자신이 갈갈이 찢기는 고통을 느꼈을거야. 정말 딸을 위한 일이었을까. 그래, 나름대로 그분의 최선이었겠지. 자신을 또 너를 지키기 위한 최선. 그렇게 믿지 않고선 우린 견딜수가 없을테니까.
그로인해 넌 더욱더 두려움를 느꼈지. 이대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두려움. 거기에 제니를 지킬 수 없다는 두려움까지. 이 모든것이 너를 움직이게 했어. 하지만 어른들은 너의 두려움마저 짓밟았어. 참 쉽더라. 그지? 너 하나 먼지로 만들고, 있던 일을 없던 일로, 증거마저 다른 일로, 널 영악한 아이로 만들어 버리는 일. 돈이면, 정말 돈이면 다 되는 세상. 너는 더작아질 수 밖에 없었지. 내가 네 곁에 있었다면 나는 무엇을 해 줄 수 있었을까. 나는 거기의 어른들과 다르게 널 도울 수 있었을까. 아니, 최소한 너의 진실을 믿어줄 수 있었을까. 말이 말을 만들고 소문이 소문을 만드는, 이젠 진실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세상속에서 나는 과연 너를 믿을 수 있었을까. 나도 나를 못믿겠어.
끝내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안에서 쳇바퀴를 돌듯 돌고 도는 널보며, 과연 무엇이 널 도울 수 있었을까 생각했어.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이미 그 기회를 잃고 말았지. 그 날, 진심으로 도와달라던 너의 다급함을 우리 모두 외면하고 말았던거지. 우린 네게 씻을 수 없는 큰 빚을 지고 말았어. 그것도 너의 인생이라는 거대함 앞에서. 그랬기에 “나는 내 인생 최대 불행이 강간당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내 인생 최대 불행은 이런 세상에, 이런 사람들 틈에 태어난 거다.”라고 했을때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었어. 어떻게 너에게 지금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다시 시작해보자는 등 그런 희망적인 말을 할 수 있겠어.
결국 넌 너로 살기위해, 소중한 것들도 놓기로 해. 너를 기만하지 않기 위해, 소중한 것들까지 놓아가며 넌 0이 되기 위해 노력해. 완전한 0을 위해 제니고 승호도 놓아버리는 용기. 지난날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경찰서를 찾았던 소녀의 모습으로 넌 지금의 너를 지키기 위해 다시 떠날준비를 하지. 지금으로부터 벗어나 너를 찾아가는 길. 우리는 어떤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완전히 괜찮아지는 널, 꿈꾸는건 모순일거야. 그래도 너의 용기라는 희망이 지금보다 더 나은 너로 홀로 설 수 있게 하길. 그렇게만 된다면 우린 너에게 기대어 너에게 조금은 사죄할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앗아버린 너의 찬란한 청춘을 되돌릴 순 없지만 적어도 앞으로 이런일이 생기지 않도록 우린 부단히 노력해야겠지. 특히 너의 마지막 당부도 잊지말고, 그렇게.
“만약에 네가 성범죄를 당한다면 증거를 꼭 남겨야 해. 녹음이든 사진이든 남겨야 해. 몸을 씻지 말고 바로 경찰서로 가야 해. 당시 입었던 옷과 속옷도 다 챙겨야 해. 안전한 장소는 없어. 집도 바깥도 위험해. 사람이 많은 곳도 사람이 없는 곳도 위험해. 도시도 시골도 버스도 택시도 공개된 장소도 밀폐된 장소도 위험해.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밤도 새벽도 다 위험해. ‘괜찮겠지’란 생각은 위험해. 상대가 그러기로 마음먹었다면, 성범죄를 피할 방법 따윈 없어. 조심하라는 말이 아니야. 죽일 수 있다면 죽이라는 말이야. 살아남으라는 말이야.”(제니에게 쓴 편지 중)
누군가 내게 상처 입힌 일에도 내 잘못부터 찾으려고 했다. 내 잘못을 찾을 수 없을 때는 타인의 잘못을 실수라고 이해했다. 나만 잘하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어른스럽다’라는 말을 칭찬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고 자랐다. 책임을 묻거나 외면하거나 눙치려는 어른이 아니라 ‘미안하다’고 말하는 어른,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어른이 한명이라도 나타나길 바랐다는 것을 어른이 되고서야 깨달았다. ‘저런 어른이 되어야지’라는 생각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여전히 내 잘못을 먼저 찾는다. 이제는 정말 그래야만 하는 어른이니까. 익숙한 감정 속에서 울다가 지치고도 잠들지 못하는 밤이 그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날도 있다.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