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꿈결 클래식 5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민수 옮김, 남동훈 그림 / 꿈결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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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아직도 소외되고 고독해서 현실과 괴리된, 현대인의 아픈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 소설을 읽으며 사회에서 고립되고 상처받은 현대인으로서의 ‘나’가 현대인의 전형적 인물(자의식과 연계해서, 특히 심리적 측면에서 진단해 봤을 때..)일 수 있다는 가정을 해보면서.... 따라서 그러한 ‘나도 일종의 현대인이다’라는 인식의 전제하에 ‘나’는 정신적, 심리적으로 나에 대한 일련의 구속, 소외, 파편화된 사회적 자아(사회적 위치에서 바라본 내 ‘자아’), 물질에 경도된 ‘나’, 등을 스스로 진단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에 대한 적절한 처방은 여전히 범람하는 현대를 상징하는 군중속의 고독 속에서 여태껏 요원하기만 했다. 이런 지경에서 이 책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게 됐다. 마음 속 기대에 부응한다면 변신은 ‘환상적인, 내가 상상 속에서만 그리던’ 그런 나의 욕구를 충족하는 이상적인 나가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당황스럽게도 변신하게 되는 대상은 ‘갑충(甲蟲, 딱딱한 등을 가진 벌레)’ 이었다. 나는 흥미를 잃고 무덤덤하다 못해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더 이상 읽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책을 내려놓을 수는 없었고, 의식적으로 책을 다시 손에 쥐고 읽어나갔다. 역시나 내용은 처음의 당혹감에 이어 전체 3장 내내 내가 가진 환상의 이미지를 쫓는 비현실성적 사고와 현실적 욕망으로 내재되어 더 발전한 모습의 변신으로라는 무리한 기대를 한 바 환상적 존재는 못되더라도 기적적으로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는 상상을 하다 ‘갑충’이 벌레로써 본연의 모습으로 죽음을 맞는 것을 읽는 것으로 종내 결말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책의 별도로 구성한 작품해설을 보며 흔히 주변 사람들이 <변신>을 읽는 이유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카프카에 대해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많은 주석들을 보면 그를 ‘실존주의문학의 선구자’라고하며 이를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이런 카프카문학에 대한 휘황한 수사나 표현도 보면, 반면 그를 단편적으로 인식하긴 쉽지만 그의 작품 속 내용을 통해 구체적으로 그의 문학을 표현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이렇게 현대인의 심리적, 병리적, 문제를 인식, 진단하는 ‘카프카의 정신’을 나 자신에게 적용해보고 나를 되돌아보자고 말이다. 이것은 일견 귀납적 추론이 말하는 오류에서 여전히 벗어나진 못하지만, 무식하고 단순한 역발상의 발로였고 그것의 심화였기로서 썩 나쁘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뭔가 풀려가는 듯 했다.

 현재의 ‘나’는 병리적(병에 걸린 상태) 상태이다.”라고 단언하기 시작해 “어제와 같은 삶을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고 있었다”라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또 “이 소설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아니 감정조차 없다라는 것은 카프카가 말하는 문학의 소명으로서 요구한 인간을 깨우는 고통, 자극제,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각성제로의 역할에 대한 지나친 기대에 대한 반응이 아닐까...”라고까지 생각을 하면서...

 

 이 지나친 기대는 ‘책을 읽고 있다’라는 의식작용 中 임에도 무의식이 침투당해서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의 말미를 보면 카프카 사후(카프카는 40세에 요절했다) 출판한 초판의 표지가 수록되어 있는데 당시에는 꽤나(?) 충격적이었을 이미지였다.

 


  현 시점에서 나는 이 소설의 진가를 모르지만 당시엔 갑충으로 변하는 현신(現身)의 변화가 당대 프라하 지식인들에게는 커다란 인상을 주었을 것이었음을 추측해본다. 그렇다면 나’가 생각하는 이러한 스토리(갑충으로 변한 주인공이 쓸쓸히 죽는 것)에서 느끼는 무덤덤함은 병리적 징후이므로 카프카가 말했던 바 문학적 비수(긍정적인 충격을 주는 비유로 이해해 주시기 바람)인 <변신>이라는 작품을 읽음으로써 이를 이해하기 위해, 마음 깊은 곳에서 인정하기 위해 모종의 생각(사유라면 더 좋겠지만...)을 이어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변신>은 주인공(곧 갑충)의 자의식의 변화(자기 자신을 인간으로 인식하다가 점차 가족  - 억압이 시작되는 가장 원시적인 제도인 가족...! - 에게서 마저 벌레로 취급되면서... )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자의식이 받은 충격이 현신(現身)의 자살(식음전폐)을 촉발하게 되었다.


  한편 작품과 작가는 따로 떼서 설명하기 어렵다고들 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작가의 생애가 문학작품에 투영되기도 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카프카의 <변신>을 해부하면  주인공이 갑충으로 변하는 것의 메타포(은유)적 의미는 현실에서의 해방, 치열한 삶에서의 면제를 의미한다고도 한다. 이러한 해석을 도출하기란 나 개인적으로는 문학평론가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미력이나마 자신에게 유익한 작품의의를 도출하려는 시도는 해볼 수 있을 것이므로,

 ​역자 박민수 교수가

 

  “우리의 모든 논의와 성찰은 카프카의 문학 세계를 더욱 풍요롭고 다채롭게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다”

 

라고 언급했듯 경우에 따라서 작품해석의 스펙트럼이 넓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도를 해본다면 현실의 부조리, 부당함에 따른 자기상실을 토로하기에 앞서 굳건한 자아를 형성키 위해 부단히 노력을 경주해야 하지 않겠나하는 생각을 한다. 덧붙여 주체적인 의식형성을 위한 자기만족감을 충족시키려는 노력도 수반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지금까지 얘기를 종합해보면 어찌됐든 현실에서 개인의 이상에 몰두한 기대는 하지 말고, 자기실존의식을 제고함으로써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작품이 주는 무게와 문학사적 의의를 내 것으로 받아들여, 때로는 각성하면서 이 효익을 극대화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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