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공간을 만드는 창업 가이드 - 작은 가게를 기획합니다
김란 지음 / 북바이퍼블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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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공간 창업을 꿈꾸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진 느낌이다. 모두가 감각적인 공간을 찾아 다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감각적인 공간, '인생샷'을 찍을 수 있는 장소, '핫한 카페'같은 곳에 열광하게 된 건 분명 인스타그램의 영향도 클 거라고 생각한다. 인스타그램은 정말 시간 잡아먹는 귀신이다. 피드를 내리거나 키워드를 몇 개 검색하면서 사진들을 구경하고 있으면 정신없이 시간이 휙휙 지나가니까. 요즘에는 다들 어떻게 그렇게 사진도 잘 찍는 건지,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가고 싶어지거나 뭔가를 사고 싶어지게 만드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사람들이 인플루언서가 되는 거겠지. 하여튼, 요즘은 취향과 감성이 중요시되는 시대다. 자신의 취향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자신의 취향을 남들과 나누면서 사회적 관계망을 넓혀 가는 삶이란 얼마나 멋지게 느껴지는가.

하지만 <나만의 공간을 만드는 창업 가이드>는 그런 달콤한 이야기만 하지는 않는다. 공간 창업의 꿈을 꾸는 누군가를 부추기고 부채질하기보다는 일단 말리고 보는 책에 가까우니까. 저자는 공간 창업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 공간 창업이 성공할 가능성은 대강 어느 정도인지(당연히 결코 높지 않다), 기획과 공사, 창업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온갖 문제들에 대해 여과 없이 말한다. 책의 앞부분에는 "(창업을)안 하는 게 돈 버는 거라고요."라는 문장이 있다. 그 문장 뒤에 달린 각주는, '자영업 10곳 문 열면 8.8곳 망했다(한국경제.2018.7.20)'이라는 차가운 문장이다.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고 사업가로서도 성공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지만, 현실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 책은 그런 만만하지 않은 현실에 대해 우선 이야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 창업을 포기하지 않을 사람들을 위해서는 팁을 제공한다.

목차를 보면 기획 과정에서 위치를 선정하는 법, 사업계획서 쓰는 법, 시공하기, 공간 운영하는 법은 물론이고 참고할 만한 공간 창업 예시들까지 소개하는 등 알차다. 여담이지만 공간 창업의 예시들로 소개된 장소들은 전부 매력적으로 보여서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소개된 가게들의 sns를 방문해 보기도 했다. 그 정도의 공간을 만들려면 수많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했으리라. 둘러보고 나니 창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보다는 작은 공간이라고 해서 쉽게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만 체감될 뿐이었다.

홍보하는 법, 모임 기획하는 법도 인상적이었다. 요즘 카페나 서점, 게스트하우스, 문화공간을 운영하려면 인스타그램은 필수다.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5천 명이라고 해서 5천 명이 전부 다 가게에 오지는 않는다는 저자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생각해 보면 아주 당연한 일인데도 말이다. 나만 해도 팔로잉은 해 놓고 몇 달째 찾아가지 않은 장소들이 도대체 몇 군데인지. 그러고 보니 인스타그램을 위주로 운영하는 가게들 중에서는 오픈 시간이나 마감 시간, 휴일 등이 정해져 있지 않은 가게들도 많다. 언제 문을 열고 닫는지가 지나치게 들쑥날쑥해서 인스타그램 DM을 통해 문의하고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방식에 금방 적응해서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방식을 끔찍하게 싫어해서 그런 가게에는 찾아가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꽤 많다. <나만의 공간을 만드는 창업 가이드>에 보면 오픈하는 날과 오픈 시간을 정하라는 이야기가 있다. 주 5일 영업으로 기억했던 서점이 어느 날 찾아가 보니 주 3일로 바뀌어 문이 닫혀 있다면 손님이 기분이 좋지 않을 거라면서. 그런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쓴다는 점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공간 창업을 진지하게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친절하고 상세하면서도 현실적이다. 아까 인용했던 문장을 한 번 더 인용하자면, "(창업을)안 하는 게 돈 버는 거라고요." 그래도 너무 하고 싶다면 일단 <나만의 공간을 만드는 창업 가이드>를 읽으면서 잘 생각해 보자. 읽고 나서도 잘 생각해 봐야 하겠지만, 결국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이 책만큼 든든한 아군이 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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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사들은 어떻게 어학의 달인이 되었을까? 시즌2
김병두 외 지음 / 투나미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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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외국어 공부를 목표로 세운다. 각종 외국어 입문서를 너무 많이 사서, 친구들끼리 우스갯소리로 "외국어 첫걸음으로 지구 한 바퀴"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보통 잘 해야 입문서 한 파트 정도를 조금 열심히 하는 척 하다가 치우는 수순을 밟는다. 외국어 공부를 하려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노력 없이 달콤한 과실만 얻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노력을 해야 한다면 가능한 한 효율적인 방법으로 하고 싶다. 즉 최소한의 노력을 통해 최대한의 결과를 얻고 싶다는 뜻이다.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 이 얼마나 도둑 심보인지. 어쨌든, 외국어를 잘 하고 싶은 욕심은 언제나 많아서 외국어 공부법에 대한 책들도 그냥 지나치질 않는다. <통역사들은 어떻게 어학의 달인이 되었을까? 시즌2>는 제목부터 나 같은 사람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는 책이었다. 통역사들의 이야기를 모아 둔 책이기 때문에 영어 통역사가 남긴 영어공부 팁도 있고, 중국어 통역사가 남긴 중국어를 쉽게 이해하는 법도 있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언어는 표지에서 보이듯 영어, 프랑스어, 일어, 중국어, 독일어, 스페인어, 그리고 러시아어까지 다양하다. 한 가지 언어에 대한 깊은 고찰을 읽어 보고 싶은 사람보다는 전반적인 외국어 학습법, 그리고 통역사들의 공부법이나 일화가 궁금한 사람들에게 적절하다. 나는 여러 가지 외국어를 겉핥기로 공부하는 데서 재미를 느끼기 때문에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각 언어의 특징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공부법도 조금씩은 다르지만, 사실 전반적인 골자는 거의 같다. 외국어를 잘 하고 싶으면 많이 접하고 꾸준히 공부하라는 것이다. 외국어를 들리는 그대로 따라하는 섀도잉은 특히 모든 통역사들이 추천하는 공부법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통역사들이 한국식 단어 외우기, 즉 외국어 단어 옆에 한국어 뜻을 써 놓은 것을 보고 외우는 방법은 그다지 권장하지 않는다. 그런 방식으로 단어를 외우게 되면 외국어 단어 하나의 뜻을 제한적으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를테면, 한국에서 '분위기'라는 단어는 어떤 사람이 가지는 고유한 아우라를 나타내는 뜻으로도 쓰이고, 특정한 장소 안에서 흐르는 감정적인 기류를 나타내는 뜻으로도 쓰인다. 좋은 경치를 보고 '분위기가 좋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영어로 치면 'mood'가 나타내는 뜻도, 'image'가 나타내는 뜻도 있다. 분위기라는 단어를 'mood'로만 기억하고 외우게 될 경우 그 단어의 다른 뜻은 흡수할 수 없다. 그래서 많은 통역사들이 외국어로 외국어 단어를 설명하는 사전, 즉 영영사전이나 중중사전과 같은 사전들을 추천하고 있다. 역시 외국어를 가능한 한 많이 접해 보는 것이 왕도인 모양이다.

이 책에서는 통역사가 되는 방법이나 통역사로서 겪은 일화, 통역 일을 할 때의 팁과 같은 정보들도 가볍게나마 다루고 있다. 통역사를 지망하는 사람들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정보들이겠지만 그래도 참고해 볼 만 하다. 통역사는 최소 두 가지 언어에 통달한 사람들이다. 즉 외국어 실력뿐만 아니라 한국어 실력까지 어느 정도 수준을 갖춘 사람들만이 통역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통역사나 번역가를 꿈꾸는 사람들 중에 의외로 한국어의 중요성을 늦게 깨닫는 사람들이 많다는 모양이다. 전문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텍스트 읽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통역사들 중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조금 놀랐다. 그리고 이 책에서 인상깊은 조언이 하나 있었는데, 외국어 공부에는 반드시 슬럼프가 찾아오지만 슬럼프라고 생각하는 기간 동안에도 꾸준히 실력은 늘고 있다는 말이었다.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공부를 포기하려는 사람들에게 힘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외국어 공부를 즐기는 사람이나 진지하게 외국어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 통역사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통역사들은 어떻게 어학의 달인이 되었을까? 시즌2>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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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플링
줄리 머피 지음, 심연희 옮김 / 살림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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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뚱한 사람이 주인공인 책은 흔하지 않다. 특히 뚱뚱한 여자라면 더 그렇다. <덤플링>의 주인공은 뚱뚱한 소녀인 윌로딘이다. 윌로딘은 이렇게 생각한다. "TV나 영화에 뚱뚱한 여자애가 나오는 게 싫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시선이 카메라에 뚱뚱한 사람을 담아도 괜찮을 때는 단 두 경우일 뿐이기 때문이다. 뚱보들은 스스로의 모습을 비참하게 여기는 모습 아니면 주인공의 유쾌한 절친으로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윌로딘은 주인공의 유쾌한 절친이 아니라 주인공이지만, 가끔 스스로의 모습을 비참하게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윌로딘이 스스로를 가끔 비참하게 여기게 되는 건 결코 윌로딘의 잘못이 아니다.

윌로딘은 자신이 뚱뚱하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소녀였다. 미스 틴 블루 보닛 미인대회의 우승자 출신인 어머니와는 가끔 갈등을 빚고, 자신을 놀리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에서 잘생기고 매력적인 보를 만나 가까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보와 가까운 관계가 되면서부터 윌로딘은 점점 흔들리기 시작한다. 책을 읽다 보면 윌로딘은 잘생긴 보가 뚱뚱한 자신과 함께 어울려 다니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놀림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부담감 역시 윌로딘을 괴롭힌다. 사실 윌로딘은 당당하고 매력적이지만, 세상은 언제나 윌로딘이 스스로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을 방해해 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특히 윌로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마름과 아름다움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어머니는 은연중에 윌로딘이 넘어야만 할 산 같은 존재가 되어 간다.

변해 가는 스스로의 모습에 초조해지고, 남자 친구('썸남'에 가깝긴 하다)나 친구와의 문제 등 여러 가지 사건들을 겪으며 괴로워하던 윌로딘은 결국 미스 틴 블루 보닛 미인대회에 참가 신청을 해 버린다. 거기에 뚱뚱한 체형과 눈에 띄는 옷차림으로 항상 놀림의 대상인 밀리, 다리에 장애가 있어 교정 신발을 착용하고 다니는 아만다, '도미니카계 흑인이자 뻐드렁니 난 레즈비언인' 해나가 합류하면서 미인대회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미인대회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궁금했지만, 읽다 보니 미인대회의 결과 같은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요한 사실은 윌로딘과 친구들 역시 다른 많은 여자아이들처럼 미인대회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줄거리의 지나치게 많은 부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어떤 인물들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 한 명 있다. 윌로딘의 이모인 루시다. 루시는 200킬로그램이 넘게 나가는 여성이었고 서른여덟 살에 심장마비로 죽어 작중에서는 이미 고인으로 나온다. 그러나 루시는 윌로딘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인물이고, 언제나 윌로딘과 함께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윌로딘은 어렸을 때 무용 교실에 가려다가 뚱뚱한 자신의 모습이 창피해서 차에서 내리지 못한다. 그 때 루시는 윌로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생을 너무 많이 허비했어. 사람들이 뭐라 말할까, 어떻게 생각할까, 너무 많이 생각하며 보냈지. 그래서 가끔은 슈퍼마켓이나 우체국도 가지 못했어. 물론 그건 사소한 일이었지. 하지만 때로는 정말 특별한 일인데도 결국은 하지 못하게 될 때도 있었어.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너무 무서워서 결국 난 안 될 거라고 포기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넌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시선에 신경 쓸 필요 없단다. 나는 그 시간을 죄다 낭비했지만 너는 그럴 필요 없다고. 일단 저 안에 갔는데 이건 아닌 것 같다는 결론이 나면 다시는 가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지금 너한텐 어쨌든 기회가 있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너무나 멋진 어른이다. 세상의 모든 소녀들에게 루시와 같은 이모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루시 이모의 존재 없이도 수많은 윌로딘들이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조롱 섞인 시선이나 경멸 어린 말들을 듣고, 입고 싶은 옷도 마음껏 입지 못하는 세상에서 스스로를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뚱뚱한 사람에 대한 차별이나 혐오는 완전히 사라져야만 한다. 아니, 결과적으로는 이목구비의 모양이나 체형, 피부 색과 같은 것들이 더 나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으로서는 그런 날이 언제쯤 되어야 올지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세상은 점점 더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덤플링>은 세상을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고 싶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 줄 만한 책이다. 외모 때문에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법을 찾는 데 이 책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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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불행을 선택하세요
데이나 슈워츠 지음, 양지하 옮김 / 오월의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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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서문은 "가족들이 부디 이 책을 읽지 않기를."이라는 문장이었다. 덕분에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특이한 책이다. 이 책은 어떤 여성(기본적으로 저자의 이야기이지만, 나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의 이야기지만 어드벤처 게임 북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선택지들 중 a를 고르면 18페이지로, b를 고르면 28페이지로, c를 고르면 36페이지로 가던 그런 책들 말이다. 독자는 어떤 여성의 삶을 따라가 보며 중요한 순간들마다 선택을 하게 된다. 예를 들면 두 남자 중 어떤 남자를 만날지, 영 별로였던 남자에게 연락을 해 볼지 하지 않을지, 해외 여행을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갈지 정착하려고 노력할지와 같은 선택들이다. 잘못된 선택을 할 경우 으레 게임 북에서 그렇듯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몇 번 정도 배드 엔딩을 보고 나서 생각했다. 진정한 해피 엔딩이 있긴 한 걸까? 어쩌면 주인공인 여성은 어떤 선택지를 고르더라도 불행하거나 영 좋지 않은 상황을 맞닥뜨리도록 되어 있는 게 아닐까?

저자는 1993년생 여성으로, 영어권 트위터에서는 꽤 유명한 유저인 모양이다. 책을 읽어 나가면서 서문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당신의 불행을 선택하세요>는 저자의 자전적인 이야기였던 것이다(책 뒷표지에도 나와 있다). 주인공은 형편 없는 남자에게 매달리기도 하고, 식이 장애에 시달리기도 하고, '인싸'를 동경해서 그들의 세계에 기웃거리다가 뼈 아픈 실패를 겪기도 한다. 독자는 선택지 두 개를 보고 이 둘 중 꼭 하나를 골라야 한단 말야? 하고 생각하거나, 마지못해 고른 선택지의 결과를 확인하곤 한숨을 쉬며 돌아와 반대쪽 선택지를 확인해 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아직 이 책의 모든 부분을 읽지는 않았고, 몇 개의 '엔딩'을 보았을 뿐이지만 나도 그랬다. 애초부터 주어진 선택지 자체가 형편 없거나 어느 쪽을 골라도 불행만이 기다릴 것 같은 순간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는 그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훌륭하게 이런 책을 써 냈으니, 그 불행들이 저자를 무너뜨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위안삼을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책이 그렇지만 특히 이 책은 게임 북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을 말하면 재미가 크게 줄어든다. 가능한 한 아주 구체적인 내용을 적지 않도록 노력했다. 개인적으로는 저자와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이라면, 그리고 게임 북을 접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 부분의 '감사의 말'을 보면 저자는 자신과 잤던 모든 남자들에게, '나에게 상처를 줬다 해도 내가 아직 어릴 때 깨달음을 줘서 고맙다'라고 말한다. 어떤 불행들은 깨달음이 된다. 저자가 겪은 크고 작은 불행들이 그에게 깨달음이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더 많은 여성들이 불행을 겪더라도 넘어지지 않고 나중에 돌아보며 그건 깨달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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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침대 위에서 이따금 우울해진다 - UNTRUE
웬즈데이 마틴 지음, 엄성수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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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RUE : 나는 침대 위에서 이따금 우울해진다>(이하 UNTRUE)는 여성들의 섹스와 성적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남편이나 파트너를 두고 다른 사람과 성적 관계를 갖는 수많은 여성들의 사례를 소개하고, 많은 이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일부일처제가 여성을 구속하는 사회적 시스템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영원히 배타적이면서도 상대방에게 충실한 일대일의 연애/결혼 관계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주장과 그를 뒷받침하는 연구는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특히 책에서도 언급되는 폴리아모리(한 명 이상의 파트너를 만나는 것, 다자연애)에 관한 담론들은 슬슬 우리 사회에서도 가시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절대다수의 사회에서는 일부일처제만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양한 형태의 연애나 결혼 생활에 대한 가능성 자체를 열어 두지 않는다. <UNTRUE>는 불륜이나 다자연애에 대한 본인의 견해와는 무관하게, 연애와 결혼에 대한 사고를 넓혀 줄 만한 다양한 이야기를 제시하는 책이다.

두 사람이 서로만을 영원히 존중하고 사랑하는 일이 가능할까? 살다 보면 그렇게 살아가는 연인이나 부부들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세상에는 분명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부부 관계에서 큰 행복을 느끼고 아무런 문제 없이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연애나 결혼에 질려 버리고, 다른 사람을 찾아 바람을 피우고, 사랑이 식은 채로 무의미한 관계를 이어 가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다. 그렇다면 일부일처제가 인간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의 제도가 맞는 것일까? 하고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일부일처제가 인간에게 가장 잘 맞는 제도라면, 일부일처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을 리는 없으니까. <UNTRUE>는 일부일처제가 인간의 본능이 아니라 어떤 전략이었으며, 그 전략도 지금은 최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책에 언급되는 사례들 중 하나만 소개하도록 하겠다. 나미비아에 거주하는 유목민들인 힘바 족은 혼외정사에 관대하고 공개적이라고 한다. 즉 간통을 금기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힘바 족의 여성들은 남편이 있더라도 다른 남성들과 관계를 가지고,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를 '오모카' 아이라고 한다. 오모카란 밀회를 즐긴다는 은어이다. 힘바 족의 문화가 이렇게 개방적인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우선 힘바 족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물려 줄 재산이 거의 없다. 그리고 아이들은 비교적 어릴 때부터 집안의 일을 돕거나 가축을 돌봄으로써 가정에 보탬이 된다. 즉, 아이의 존재는 보탬이 될 뿐 큰 부담이 되지 않으니 남편의 입장에서는 부인이 낳은 아이가 자신의 친자가 아니더라도 비교적 관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힘바 족의 남성들도 여성들처럼 성적으로 개방적이기 때문에, 자신이 여자친구를 만나는 동안 부인이 남자친구를 만나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한다. 남편은 자신의 부인이 낳은 모든 아이를 책임지기 때문에, 오모카 아이의 생존율도 높다고 한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들이 있어 쉬운 내용을 다루고 있지는 않음에도 책이 잘 넘어가는 편이었다.

<UNTRUE>는 다양한 성 담론을 다루고 있다. 여성들의 불륜에 관한 이야기뿐 아니라, 일부일처제가 허상에 가깝다는 주장, 일부일처제는 현대 사회로 오면서 고착화되었을 것이라는 연구, 폴리아모리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 흑인 여성들이 받는 성적 억압과 흑인 여성들을 둘러싼 편견, 인간과 비슷한 영장류들의 섹스, 핫와이프(남편의 동의 하에 다른 남자들과 성관계를 하는 여성)와 그 남편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여성의 성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터부시되기 쉬운데, 이 책은 아주 솔직하다. 흥미로운 이야기도 불편한 이야기도 있고,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잘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도 있다. 책 뒷표지에 있는 '성 담론에 과학, 철학, 문화인류학을 결합한 책'이라는 평가가 딱이다. 불륜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기는 하지만 불륜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여성의 성 해방에 대한 이야기에 더 가깝다. 권위 있는 학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여성의 성 이야기를 하는 책이기 때문에 재미있으면서도 유익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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