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밤의 애도 - 고인을 온전히 품고 내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자살 사별자들의 여섯 번의 애도 모임
고선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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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헤어진다는 의미를 깨닫고 이별에 천착하던 시기가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죽음의 이미지를 꿈으로 꾸곤 했다. 예를 들면, 아주 어렵게 상대방과 통화를 하게 됐는데 내가 아무리 외쳐도 상대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나만 울면서 내 이름을 부르는 상대의 목소리를 듣는 꿈이다. 죽음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상대와 닿을 수 없게 만들었고, 그 사실은 절망을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아무 것도 물을 수 없다는 게 그렇게 무서운 일인 줄 몰랐다. 나 혼자 남겨져 절대 알 수 없는 답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지인의 부고를 듣고 의아했던 적이 있었다. 평소 지병도 없고, 밝고 유쾌했던 사람으로 기억하기에 같이 부고 알림을 받은 사람들도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피싱 문자가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그러다 나중에 기사로 죽음의 전말을 알게 됐다. 그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죽기 직전 약 30분 간의 행적을 글로 옮긴 기사였는데 기사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매일 뉴스를 보면서 보았던 안타까움 죽음과 그 죽음이 지인의 것이라는 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었고, 그가 뉴스'거리'가 되었다는 충격에 한동안 얼이 빠져 있었다. 그 뒤로는 자살이나 사고사 기사를 접하면 멍하니 행간을 읽는 버릇이 생겼다. 죽음을 가리키는 날짜와 정확한 시간, 죽음의 방식이나 원인을 추측하는 건조한 글로는 절대 담아낼 수 없는 가족이나 지인들의 충격을 잠시나마 애도하는 마음으로.





계속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위해




<여섯 밤의 애도>는 자살 사별자 모임에서 사별자 다섯 명과 나눈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




자살 사별자 중에는 애도를 부정 당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들은 바로 퀴어 커플이었다. 장례식장에서 파트너의 원가족에게 '친구 주제에' '네가 뭔데'라는 식의 말을 듣기도 하고,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했기에 사회로부터 파트너를 애도할 충분한 시간을 받아내지도 못한다. 심지어 자살 사별자 모임에 와서도 애인, 배우자를 의미하는 색깔의 팔찌가 아닌 지인이나 친구를 의미하는 색깔의 팔찌를 찼다는 구절에서 훌쩍이고 말았다. 남아있는 사람들이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어떤 형태의 이별이든 애도의 시간을 충분히 보장하도록 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자살 사별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내가 아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조심스럽다. 애도의 과정에서 무신경한 말로 상처입고 상처주고, 원망하고 원망받았던 적이 있어서 반성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내게 상처준 사람을 헤아리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자살 사별자들은 그 사람을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결국 자신이 그 사람의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서서히 깨달아가며 죄책감에서 벗어난다. 우리는 누군가의 어둠을 온전히 감당할 필요도, 할 수도 없다는 것. 고선규 박사는 그래서 애도를 '치열한 노동'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자살 생존자들을 위한 조언이 몇 가지 있었는데, 일부 옮겨본다.




8. 한 번에 한 순간씩, 하루씩 넘기며 살아가세요.



12. 선택은 당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존재일 수 없습니다.



13. 도중에 좌절 또한 찾아올 것입니다. 감정이 밀물과 같이 들이닥친다면, 당신은 슬픔의 잔여물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24. 당신이 가진 질문, 분노, 죄책감, 그리고 다른 모든 감정을 보내줄 수 있을 때까지 닳도록 곱씹고 또 곱씹어도 됩니다. 감정을 보내주는 것은 고인을 잊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이 당신의 것이 아니라는 문장이 자꾸 눈에 밟힌다. 당연한 사실도 글로 읽으니 새삼스럽다.


감정을 보내주는 것은 고인을 잊는 것이 아니다. 이별은 평생이 걸려도 둘레를 다 걸어볼 수 없는 거대한 빙하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함께 즐거웠던 순간마저 나의 무신경함을 탓하며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 어차피 이별을 알기 전으로 돌아가긴 글렀다.




*한겨레출판 서평단 1기 하니포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살 사별자들을 위로한다며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 사람의 선택입니다‘라는 말을 한다.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사람이 자살 사별자에게 하는 쉽고 편한 위로다. 자살은 사별자가 고인이 죽음을 향해 갔던 그 길을 고장난 기계처럼 무한정 구간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이해할까 말까 한 일이다.

사별 직후 자살 사별자들은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슬픔은 중요한 것을 상실했거나 목표를 잃어버리거나 달성하지 못한 것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다. 슬픔은 다른 사람에게 나의 필요를 전달하고 사랑받고 연결되기를 원하는 감정이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자살 사별자들은 ‘슬픔‘이라는 당연한 감정에 도달하여 온전하게 슬퍼할 수 있을 때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사별한 지 3개월 이내에 애도 상담에 찾아온 내담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슬퍼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무엇을 잃었는지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단 어떤 사람이 목숨을 끊으려고 결심한다면, 전적으로 설득당해 난공불락으로 닫힌 세상으로 그가 들어가버린 것이다. 그곳에서는 모든 세세한 것들이 맞아떨어지고 모든 일이 그의 결정을 강화해준다. 이러한 죽음은 모두 각각 그 나름의 내적 논리와 다시는 없을 절망을 담고 있다.

우리가 매일 고통과 상실을 마주해야 하는데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마치 물속에 들어갔는데 젖지 않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만큼 비현실적인 일이라고 한다.

떠난 사람을 서로에게 소개하고 그 사람을 우리 곁에 초대해 다시 기억하는 것이 "리멤버링"이며 애도는 리멤버링의 과정이다. 죽음이 삶의 일부이듯 세상은 묘지 위에 있고, 죽은 자는 산 자의 틈 속에서 영원히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애써 지우려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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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어둠 - 극단주의는 어떻게 사람들을 사로잡는가
율리아 에브너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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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생 저자나 감독을 볼 때마다 놀라는 짓을 그만두고 싶다. 이번이 마지막이길.





91년생 정치학자 율리아 에브너가 서문에 '이 책의 목표는 디지털 극단주의 운동의 사회적 차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밝혔듯이 저자 본인이 극단주의 집단에 잠입 취재 수기를 책으로 엮었다.




언시를 준비할 때, 욕하기 전에 그 집단을 관찰해 보라는 말을 듣고 극우로 유명한 커뮤니티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더라, 하는 말과 눈 앞에서 (물론 모니터 너머였지만) 그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건 너무 다른 일이었다. 한 페이지를 다 살펴보지도 못하고 토기를 느끼며 인터넷 창을 닫았다. (일단 너무 상스러운 말이 가득해서 진입장벽이 높았다.) 그런데 실물로 그들을 마주한다니. 너무 역겹지 않을까?






하지만 책에 나오는 극단주의 일원들은 겉으로는 모두 멀쩡해보인다. 그러니까 (보진 않았지만) <조커>처럼 불우한 과거를 가지고 있거나 음침해보이거나 햇볕을 보면 살갗이 타는 은둔자 스타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1장에서 소개된 '세대정체성'은 젊고 교육 수준이 높고(낮은 사람도 받지만 그들이 주가 되면 안된다고 말한다), 내부에서 따로 교양 교육을 시킬 정도로 철저하다.



그런 것 치고는 이들은 갖고 있는 공포는 순진하게 느껴지는데, '백인 말살' 정책이 행해진다고 믿고 있고 그래서 낙태와 동성애를 척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음...




이들의 도발적 퍼포먼스를 담은 게시물과 트윗은 순식간에 퍼져 나가 핵심 소셜미디어의 유명인사들에게 공유되었다. 이게 바로 '통제된 도발'이다. 이렇게 되면 전통적인 미디어 매체는 이들의 활동을 보도하며 이들에게 플랫폼을 제공할 수밖에 없다.




전문 용어로 어그로?!



이들의 목표는 분열을 초래하는 콘텐츠를 퍼뜨려 중립을 취하는 모든 사람이 어느 한쪽을 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전략적 양극화'다.





책에 나오는 극단주의 사례는 (당연하지만) 백인 중심이라 그렇게 와닿지는 않았다. 극우들이 '전세계가 백인을 주목해!' 마인드가 너무 강해서 뭔가 전의를 상실하게 됨. Ok Bye...



그럼에도 백인 유모어에 자존심 상하게 웃긴 지점이 있었는데...




'백인' 애인을 만드는 데이팅 앱 사이트 이름 중 하나인 '트럼프싱글즈'. "데이트를 다시 위대하게"라니. 웃다 울었다. 자존심 상해.







히틀러랑 니체가 가상의 대화에서 싸우는 대목. 가상의 히틀러 나를 피식하게 만들다니. 진짜 자존심 상하네.





네오나치들이 뉴발란스 신는다는 것도 너무 웃겼다. (웃기면 안되는데) 쓸데 없는 기호에 혼자 의미부여하고 심각해지는 건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구나.






학부시절 전국 대학생들을 데리고 하는 토론 엠티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무슨 대학 지부라는 단체였고, 어디서 그 활동을 알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참가비가 거의 없다는 점이 계속 의심스러웠다. 콘도는 나쁘지 않았고, 식사도 잘 나왔고 간식과 밤에 마실 술도 넉넉했다. (물론 저는 술은 못 마시고 무서운 얘기하다가 귀 막고 엉엉 울어서 방으로 쫓겨났읍니다) 연사로는 큰 일간지의 논설위원이 왔었는데, 임의로 나눈 조 활동에서 우리에게 당시 이슈가 되던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결과를 제출하라고 했다.



진지하게 토론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몇몇은 의문을 제기했다. 활동을 뒷받침하는 돈의 출처가 어디냐는 거다. 이건 논의할 거리가 아니라는 말도 나왔다. 나는 옆에 앉은 언니랑 필담으로 이상하다는 말을 몇 마디 주고 받았다. 조장은 어떤 의견을 내든 상관 없다고 했고 순수한 단체라는 말을 반복했지만 이상해진 분위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연사의 이름과 그가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일간에서 퍼뜨리는 온난화는 낭설이라며, 컵에 물을 가득 담아보면 알겠지만 표면 장력이 생겨 물이 넘치지 않는다고 했다. 빙하가 녹아도 대지가 잠기지 않는 근거로 그는 표면장력을 들었다. 이렇게 세세히 기억하는 이유는 그걸 필기해 뒀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여전히 칼럼을 쓰고 있다니.



돌아와서도 그 단체의 정체가 종종 궁금했는데, 여전히 모르겠고 지금은 어느 커뮤니티에 잠입해 활동하지 않을까 싶어졌다.









친구 수가 많을수록 접하는 콘텐츠의 다양성이 줄어든다는 페이스북 모순은 확증편향이라는 말로 온갖 플랫폼에 갖다 붙일 수 있다. 아주 개인적인 통계이지만 어떤 콘텐츠를 접하는 시간이 길수록 더 편향적이 되는 것도 같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이유로 만나기 피곤해졌다. 대체 뭘 보는 건지 모르겠지만...



광기는 개인에게는 드문 일이다. 그러나 집단, 당파, 민족, 시대에는 늘 있는 일이다.



사실 집단주의에 대한 분석이 궁금해서 선택한 책이었는데, 다양한 극단주의 집단에 대한 사례가 더 많고 내가 궁금했던 부분은 거의 마지막장에 서술돼 있어서 분량이 조금 아쉬웠다.





*한겨레출판 서평단 하니포터 1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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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 유혹하는 예술가 - 시대를 앞선 발상으로 아르누보 예술을 이끈 선구자의 생애와 작품
로잘린드 오르미스턴 지음, 김경애 옮김 / 씨네21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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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예술의 전당 알폰스 무하 전시에 다녀왔다. 처음 봤을 때 무하의 그림이 타로 카드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가로보다 세로가 긴 프레임에 어딘가 온화한 얼굴의 여성, 그리고 사방에 화려한 장식이 더해지면 딱 타로 카드가 아닌가.


게다가 무하의 그림은 한때 카드캡터 체리 세계관에 진심이었던 나를 홀리고 말았다.


당연함. 카드캡터 체리도 타로카드도 전부 무하의 그림을 오마주한 거임.



예술가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겠지만, '무하 스타일'을 탄생시킬만큼 돌풍을 일으켰던 그의 그림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2013년 한국 전시가 아시아 최초 무하 전시라고 알고 있는데 그 이후에 종종 무하의 전시가 열리는 걸 보면 무하의 그림은 꾸준히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모양이다.


요즘 하도 방법서가 많이 나와서 그런지 <알폰스 무하, 유혹하는 예술가>라는 제목에서 이 책도 무하의 성공 가도에 어떤 비법이 있었나 생각하게 만들었다.


내게 알폰스 무하 첫 전시는 그림은 예쁜데 어딘가 심심한 작가라는 인상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무하가 삽화 위주로 작업했다는 걸 몰라서 그림 속의 사람들과 자꾸 눈이 마주치는 것과 풍경이나 여백 없이 인물로 꽉 들어찬 그림을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14~15세기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궁정 미술가인 줄), 19~20세기를 살다 갔고 무하의 아들이 1991년까지 살았으니 거의 현대 미술가가 아닌가? (아님)


미술사적으로 시대 구분을 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느끼기에 20세기 작가들은 자신들이 겪은 차별이나 전쟁의 공포를 그림에 반복되는 이미지로 녹여냈다. 멀리서 보더라도 어둠과 우울의 기운이 팍팍 뿜어져 나오도록.


무하의 그림 중엔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아서 그가 평탄하고 부유한 삶을 살았을 거라 멋대로 생각했다. (광고 삽화인데 어둡고 우울해 보이면 큰일이겠지...)


이 책은 마치 위인 전기처럼 무하의 생을 처음부터 쭉 따라가며 내 편견을 깨뜨렸다.


특히 청년 무하의 삶이 굉장히 와닿았다.



어쩐지 짠한 청년 무하

가족이 음식 꾸러미를 보내줄 때도 있었지만 두 청년은 거리 공연으로 생계를 이었다. 무하의 아버지는 학교를 그만두고 무일푼의 삶을 살아가는 무하가 브르노에서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몹시 화가 났다.


아저씨 나중에 그 아들 떼돈 버니까 그냥 두세요...


무하는 다르게 생각했다. 그는 사무실에서 하는 일, 반복되는 업무, 법원 사건을 처리하는 서류작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만두고 싶었지만 무슨 일을 해야 돈을 벌고 경력을 쌓을 수 있을지 고민이었다.


역시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해.


무하 고민 = 내 고민 = 이 시대 청년들 고민


무하가 공무원 일에 만족했다면

저의 카드캡터 체리X지수와 도진X청명 그리고 샤오랑은 없었겠지요.


이미 퇴사해서 성공가도를 달리다가

별세했지만 그래도

무하의 퇴사를 응원해!


무하는 어릴 때부터 그림과 음악에 두각을 보였는데, 프라하 미술 아카데미에 지원하지만 탈락한다. 권위를 가진 기관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는 것과

내 재능을 발휘하며 사는 건 전혀 상관이 없다는 행간을 읽어보고. 




무대 화가 일을 하며 이제 조금 돈을 보나 싶었는데 또 다시 사건 발생


1881년 12월 빈의 링 시어터에서 일어난 참혹한 화재로 5백 명이 사망하고 극장은 폐허가 되었다. 회사는 직원의 수를 줄여야 했고, 가장 젊은 나이였던 무하가 제일 먼저 해고되었다.

어리면 돈을 안 벌어도 되나요...!



무하는 재능을 알아본 이들에게 후원을 받게 되었는데

후원도 넘나리 순탄치 않았던 거임


망한 후원썰1

처음에는 부유한 후견인의 도움을 받았지만, 후원이 끊어지자 렌틸콩 몇 알만으로 버티면서 매서운 추위와 허름한 숙소를 감내해야 했다.


망한 후원썰 2


1889년 1월 무하에게 갑작스러운 변화가 찾아왔다. 백작은 무하에게 매달 2백 프랑의 후원금을 즉시 중단하겠다고 통보했다. 너그러운 후원자의 도움으로 파리에 집을 얻고 일주일의 엿새를 미술 공부에 전념하던 무하는 이 가혹하기만 한 환경의 변화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두번째 후원자는 무하가 그림은 안 그리고 공부만 하니까

당근보다 채찍을 주는 마음으로 후원을 끊은 것 같다.


알고보니 일잘러



파리에서 거둔 엄청난 성공으로 무하는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작품 수요를 맞추기 위해 조수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도 있었다. 무하는 '진지한' 화가로 거듭나기 위해 1906년 미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무하는 연극계에서 초상화 의뢰를 받길 희망했고, 유명한 화가에게 초상화를 의뢰하고자 하는 부유한 고객을 찾으려 했다. 그는 훌륭한 화가였지만 삽화가로 너무 널리 알려진 나머지 순수미술을 할 기회를 얻기 힘들었다.


무하의 그림이 얼마나 사랑 받았는지,

그가 그린 극장 포스터는 붙여놓으면 사람들이 전부 떼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포스터를 대체 왜 떼어갔을까 싶다가도

요즘 매장에 놓인 유명인 등신대나 포스터를 가져가는 것처럼

무하의 포스터를 가져갔다고 생각하니 너무 귀엽다.

(그거 잘 보관했다가 물려주면 거의 코인 급일텐데...)



무하의 능력 중에 가장 부러운 능력


자신의 디자인을 의뢰인의 요구에 맞게 적용할 수 있는 능력

현대 사회인은 이것을 초능력이라고 불러요...


무하의 민족 정체성


무하는 체코에서 태어나 7살 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전쟁을 보고 자랐다. 프랑스로 가서 성공했지만 유년기에 보고 겪은 전쟁의 이미지가 평생 남아 있었고 그는 자신이 슬라브 민족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던 듯 하다.


나는 내 작품이 상류층 인사들의 응접실을 장식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화관과 그림이 있는 전설적 장면이 가득한 책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내 동포들의 것을 사악하게 도용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았다. 이 모든 장면을 목격하면서 내 생의 남은 시간 동안에는 오직 내 나라를 위한 작품을 만들 것을 엄숙히 다짐한다.


다짐이 바로 현실로 이어지진 못했다. 프랑스에서 거대한 성공을 거둔 무하는 체코인보다 프랑스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하는 <슬라브 서사시> 작품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1939년 독일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략했을 때 무하는 프라하에 살며 유대인 공동체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 때문에 심문을 받았고, 쇠약해진 몸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된다.



무하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른다면 꿈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책을 읽으며 그림처럼 아름답기만 했을 것 같은 무하의 삶을 가까이서 들여다보게 되었다. 여느 삶과 마찬가지로 굴곡이 있고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번갈아 찾아오지만 크게 꺾이거나 휘둘리지 않고 꾸준히 작업을 이어나갔다는 게 존경스럽다.


부와 명성을 모두 가진 무하라면 전쟁이나 세상의 갈등과 등 돌리고 말년을 편하게 보냈을 수도 있었을 텐데 편한 삶을 선택하지 않은 것도 그답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 무하 전시가 열린다면 말년의 작품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싶다.

그가 평생 그리고 싶었던 작품,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작품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궁금하다.


무하의 전시에 가보면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크기의 그림들이 전시 되어 있는데 책에서는 삽화가 아주 큼직큼직해서 확실히 보는 재미가 있다. 대충 그림만 휘리릭 넘겨도 눈호강. 


관객 없이 여유로운 전시장을 이곳저곳 누비는 기분이었다. 이 시국에 가장 안전하고 황홀한 전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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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최혜진 지음, 해란 사진 / 한겨레출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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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시기에 나를 지탱해준 그림책이 있었다. 스무살에 읽은 숀 탠의 <빨간 나무>는 이십대를 관통하며 내 안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혼자 떠난 여행에서 만난 <잃어버린 영혼>은 내 남은 삼십대를 함께 보내리라 생각한다.


그림책은 설명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위로가 됐다. 공허하고 외로운 이유를 밝히지 않고,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 그 자체로 존재하는 인물에 깊이 공감했다. 장면과 장면, 대화와 대화의 행간이 무척 넓다. 가끔은 그 여백에 내가 원하는 말이 들어있다. 어린왕자가 선물 받은 상자 속 양처럼. 그래서 너무 사랑하는 이들이 힘들어할 때, 직접 도울 방법은 없고 멀리서 보기만 해야할 땐 종종 그림책을 선물한다. 내가 읽지 못한 행간에 어딘가에 그들이 충분히 기대고 쉴 수 있길 바라면서.


사람들에게 쉼을 선물하는 그림책 작가들과 어떤 질문을 던지고 답을 들었을지 궁금했다.





생의 각 길목에서

‘돌파하는 힘’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림책 작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책에 빼곡히 인덱스를 붙여가며 읽고 나서야 책 소개에 적힌 말이 다시 보인다. .


'생의 각 길목'을 조금 더 일상적인 말로 적어봤다.



1. 투두리스트를 다 끝내지 못해서 자괴감이 들 때

2. 하고 싶지만 용기가 없어서 투두리스트를 적는 것조차 어려울 때

3. 그냥 인생 ㅈ됐다 싶을 때 / 리셋 버튼을 누르고 싶을 때

4. 내일 일어나는 게 너무 두려울 때

5. 타인의 말에 내 삶의 주도권을 내어줄 때

6. 결과가 노력을 배신할 때


7년 전쯤, 잠이 들 때마다 지구가 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집밖을 나서는 게 무서워서 집에 돌아와 현관에 주저앉아 엉엉 운 적도 있었다. 매일이 버거워서 덤불 숲을 맨손으로 헤쳐나가는 기분이었는데 자꾸 발목을 잡혔다. 그때 나는 덤불 숲을 정원으로 가꾸려고 했다. 할 일은 태산인데 하루 종일 겨우 한움쿰 풀을 베어내는 게 고작이라 내게 실망하고 좌절하고 원망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저기' 있고 그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괴로워했던 것 같다. 그냥 덤불을 매트리스 삼아 눕는 법을 배울 걸.



어차피 미래를 걱정한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고, 원하는 방향으로 가려면 결국 오늘의 내가 뭔가를 해야 하잖아요. 그렇다면 오늘 마주한 상황에서 가장 최선의 것을 선택하는 데에 에너지를 쓰는 게 낫죠. 순간에 온 마음으로 머물다 보면 하루살이처럼 살아도 방향성이 생겨 있을 거라 기대해요.

104p, 이수지 작가




그 시간들이 있어서 이런 대답이 더 와닿는 걸지도 모르겠다.




온통 너덜하던 때가 있었다. 평생 낙천적인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한톨의 낙관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로 삶을 온 몸으로 거부하고 살다가 정신을 차린 뒤에 식물을 들였다. 내가 너덜하든 말든 식물은 햇빛과 물이 있으면 자랐다. 어떤 식물은 반그늘에서만 자랐고, 어떤 식물은 좀 더 밝은 곳을 좋아하고 또 어떤 식물은 바람이 잘 드는 자리를 좋아했다. 꽃을 사철 피우는 애도 있고, 가을에 파종해 한 겨울에 꽃을 보는 애도 있었다.



몸이 지닌 생명의 본성은 해치는 쪽보다는 건강하게 번성하는 쪽이에요. 엊그제는 마당에서 장대비에 줄기가 꺾인 분꽃을 발견했어요. 한타까운 마음에 지지대를 만들고 꺾인 줄기에 반창고를 감아서 세워주었어요. 그랬더니 다시 잎이 살아나요. 참 신기하죠. 어떤 생명이든 아무리 상처 입어도 댕강 잘리지 않은 이상은 심지가 버틸 수 있어요.

43p, 권윤덕 작가




그때를 생각하면 요즘의 평온함은 천국에 비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다 다시 벼락 맞을 날도 있겠지만 실컷 아프고 나니까 이제 더는 같은 이유로 꺾일 일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장담은 하지 말까? 아직도 이별이 너무 무서운데!) 나만 나를 버리지 않으면 또 어떻게든 휘뚜루 마뚜루 견뎌내고 살아가겠지.




그림책의 해피엔딩은 우리가 어둠을 통과할 때 떠올릴 수 있는 좋은 날에 대한 기억을 심어줘요. 용기를 내면 분명 무언가 달라진다는 믿음과 함께요. 낙관성을 담아내는 일이 곧 가벼움이 되지 않도록 주인공이 세계를 긍정하기까지의 과정을 고심하며 잘 보여주려고 노력해요.

266p, 노인경 작가



동화의 세계를 사랑한다. 뜬금 없는 고백인데, 어떤 방식으로든 산타와 요정이 존재하는 세상을 믿는다. 누가 뭐래도 내 낙관의 원천은 네버랜드와 요정들이 밤을 지새우는 신발가게와 루돌프가 쓰는 썰매에 있다. (그리고 약간의 해리포터.) 너무 많은 신데렐라 스토리가 해피엔딩을 의심하게 만들었지만 주인공이 결국 난관을 이겨내고 자신만의 세계를 지켜내는 해피엔딩을 좋아한다. 그래야 이 모든 게 과정일뿐이라고 속고, 또 믿을 수 있으니까.




Q. 관계 맺기에 있어 작가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 있을까요?

A. ‘말에는 힘이 없다’라는 사실이요. 말에 힘이 생기는 순간은 누군가 그 말을 주웠을 때뿐이에요. 제가 컵을 향해 움직이라고 백번 말해도 컵은 움직이지 않지요. 제 말을 누군가 듣고 옮겨줄 때 말의 힘이 발생해요. 즉, 내가 타인의 말을 줍지 않으면 그 말에는 힘이 없어요.

이지은 작가



나만의 세계를 구축한 작가들의 이야기에는 견고한 세계의 시작이 되는 씨앗이 있었다. 나무가 될지 꽃이 될지 모르지만 일단 썩지 않게 씨앗을 틔워내고 잘 가꿔낸 사람의 이야기에는 힘이 있다. 실내에서만 키운 싹과 바깥 바람을 쏘이며 키운 싹은 줄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바람에 흔들린 나무는 뿌리 가까운 쪽부터 색이 바래며 단단해지는 목질화가 일어난다. 부침이 있어 성장을 한다는 소름돋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고, 단단해보이는 세계가 스스로 씨앗의 이야기를 할 때 나는 그 세계가 더 견고하고 믿음직스러워 보인다. 앞으로 내가 좀 더 부침을 겪어도 꺾이지는 않겠구나 하는 낙관도 생겨난다. 날이 싸늘해지면 한해를 돌아보게 된다. 올해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에 이 책의 질문과 답이 충분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한겨레출판 서평단 하니포터 1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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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ZOO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7월
평점 :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짧은 단편 안에서 튀어나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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