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밤의 애도 - 고인을 온전히 품고 내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자살 사별자들의 여섯 번의 애도 모임
고선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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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헤어진다는 의미를 깨닫고 이별에 천착하던 시기가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죽음의 이미지를 꿈으로 꾸곤 했다. 예를 들면, 아주 어렵게 상대방과 통화를 하게 됐는데 내가 아무리 외쳐도 상대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나만 울면서 내 이름을 부르는 상대의 목소리를 듣는 꿈이다. 죽음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상대와 닿을 수 없게 만들었고, 그 사실은 절망을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아무 것도 물을 수 없다는 게 그렇게 무서운 일인 줄 몰랐다. 나 혼자 남겨져 절대 알 수 없는 답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지인의 부고를 듣고 의아했던 적이 있었다. 평소 지병도 없고, 밝고 유쾌했던 사람으로 기억하기에 같이 부고 알림을 받은 사람들도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피싱 문자가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그러다 나중에 기사로 죽음의 전말을 알게 됐다. 그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죽기 직전 약 30분 간의 행적을 글로 옮긴 기사였는데 기사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매일 뉴스를 보면서 보았던 안타까움 죽음과 그 죽음이 지인의 것이라는 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었고, 그가 뉴스'거리'가 되었다는 충격에 한동안 얼이 빠져 있었다. 그 뒤로는 자살이나 사고사 기사를 접하면 멍하니 행간을 읽는 버릇이 생겼다. 죽음을 가리키는 날짜와 정확한 시간, 죽음의 방식이나 원인을 추측하는 건조한 글로는 절대 담아낼 수 없는 가족이나 지인들의 충격을 잠시나마 애도하는 마음으로.





계속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위해




<여섯 밤의 애도>는 자살 사별자 모임에서 사별자 다섯 명과 나눈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




자살 사별자 중에는 애도를 부정 당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들은 바로 퀴어 커플이었다. 장례식장에서 파트너의 원가족에게 '친구 주제에' '네가 뭔데'라는 식의 말을 듣기도 하고,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했기에 사회로부터 파트너를 애도할 충분한 시간을 받아내지도 못한다. 심지어 자살 사별자 모임에 와서도 애인, 배우자를 의미하는 색깔의 팔찌가 아닌 지인이나 친구를 의미하는 색깔의 팔찌를 찼다는 구절에서 훌쩍이고 말았다. 남아있는 사람들이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어떤 형태의 이별이든 애도의 시간을 충분히 보장하도록 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자살 사별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내가 아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조심스럽다. 애도의 과정에서 무신경한 말로 상처입고 상처주고, 원망하고 원망받았던 적이 있어서 반성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내게 상처준 사람을 헤아리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자살 사별자들은 그 사람을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결국 자신이 그 사람의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서서히 깨달아가며 죄책감에서 벗어난다. 우리는 누군가의 어둠을 온전히 감당할 필요도, 할 수도 없다는 것. 고선규 박사는 그래서 애도를 '치열한 노동'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자살 생존자들을 위한 조언이 몇 가지 있었는데, 일부 옮겨본다.




8. 한 번에 한 순간씩, 하루씩 넘기며 살아가세요.



12. 선택은 당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존재일 수 없습니다.



13. 도중에 좌절 또한 찾아올 것입니다. 감정이 밀물과 같이 들이닥친다면, 당신은 슬픔의 잔여물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24. 당신이 가진 질문, 분노, 죄책감, 그리고 다른 모든 감정을 보내줄 수 있을 때까지 닳도록 곱씹고 또 곱씹어도 됩니다. 감정을 보내주는 것은 고인을 잊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이 당신의 것이 아니라는 문장이 자꾸 눈에 밟힌다. 당연한 사실도 글로 읽으니 새삼스럽다.


감정을 보내주는 것은 고인을 잊는 것이 아니다. 이별은 평생이 걸려도 둘레를 다 걸어볼 수 없는 거대한 빙하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함께 즐거웠던 순간마저 나의 무신경함을 탓하며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 어차피 이별을 알기 전으로 돌아가긴 글렀다.




*한겨레출판 서평단 1기 하니포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살 사별자들을 위로한다며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 사람의 선택입니다‘라는 말을 한다.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사람이 자살 사별자에게 하는 쉽고 편한 위로다. 자살은 사별자가 고인이 죽음을 향해 갔던 그 길을 고장난 기계처럼 무한정 구간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이해할까 말까 한 일이다.

사별 직후 자살 사별자들은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슬픔은 중요한 것을 상실했거나 목표를 잃어버리거나 달성하지 못한 것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다. 슬픔은 다른 사람에게 나의 필요를 전달하고 사랑받고 연결되기를 원하는 감정이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자살 사별자들은 ‘슬픔‘이라는 당연한 감정에 도달하여 온전하게 슬퍼할 수 있을 때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사별한 지 3개월 이내에 애도 상담에 찾아온 내담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슬퍼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무엇을 잃었는지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단 어떤 사람이 목숨을 끊으려고 결심한다면, 전적으로 설득당해 난공불락으로 닫힌 세상으로 그가 들어가버린 것이다. 그곳에서는 모든 세세한 것들이 맞아떨어지고 모든 일이 그의 결정을 강화해준다. 이러한 죽음은 모두 각각 그 나름의 내적 논리와 다시는 없을 절망을 담고 있다.

우리가 매일 고통과 상실을 마주해야 하는데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마치 물속에 들어갔는데 젖지 않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만큼 비현실적인 일이라고 한다.

떠난 사람을 서로에게 소개하고 그 사람을 우리 곁에 초대해 다시 기억하는 것이 "리멤버링"이며 애도는 리멤버링의 과정이다. 죽음이 삶의 일부이듯 세상은 묘지 위에 있고, 죽은 자는 산 자의 틈 속에서 영원히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애써 지우려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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