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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최혜진 지음, 해란 사진 / 한겨레출판 / 2021년 10월
평점 :
힘든 시기에 나를 지탱해준 그림책이 있었다. 스무살에 읽은 숀 탠의 <빨간 나무>는 이십대를 관통하며 내 안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혼자 떠난 여행에서 만난 <잃어버린 영혼>은 내 남은 삼십대를 함께 보내리라 생각한다.
그림책은 설명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위로가 됐다. 공허하고 외로운 이유를 밝히지 않고,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 그 자체로 존재하는 인물에 깊이 공감했다. 장면과 장면, 대화와 대화의 행간이 무척 넓다. 가끔은 그 여백에 내가 원하는 말이 들어있다. 어린왕자가 선물 받은 상자 속 양처럼. 그래서 너무 사랑하는 이들이 힘들어할 때, 직접 도울 방법은 없고 멀리서 보기만 해야할 땐 종종 그림책을 선물한다. 내가 읽지 못한 행간에 어딘가에 그들이 충분히 기대고 쉴 수 있길 바라면서.
사람들에게 쉼을 선물하는 그림책 작가들과 어떤 질문을 던지고 답을 들었을지 궁금했다.
생의 각 길목에서
‘돌파하는 힘’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림책 작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책에 빼곡히 인덱스를 붙여가며 읽고 나서야 책 소개에 적힌 말이 다시 보인다. .
'생의 각 길목'을 조금 더 일상적인 말로 적어봤다.
1. 투두리스트를 다 끝내지 못해서 자괴감이 들 때
2. 하고 싶지만 용기가 없어서 투두리스트를 적는 것조차 어려울 때
3. 그냥 인생 ㅈ됐다 싶을 때 / 리셋 버튼을 누르고 싶을 때
4. 내일 일어나는 게 너무 두려울 때
5. 타인의 말에 내 삶의 주도권을 내어줄 때
6. 결과가 노력을 배신할 때
7년 전쯤, 잠이 들 때마다 지구가 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집밖을 나서는 게 무서워서 집에 돌아와 현관에 주저앉아 엉엉 운 적도 있었다. 매일이 버거워서 덤불 숲을 맨손으로 헤쳐나가는 기분이었는데 자꾸 발목을 잡혔다. 그때 나는 덤불 숲을 정원으로 가꾸려고 했다. 할 일은 태산인데 하루 종일 겨우 한움쿰 풀을 베어내는 게 고작이라 내게 실망하고 좌절하고 원망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저기' 있고 그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괴로워했던 것 같다. 그냥 덤불을 매트리스 삼아 눕는 법을 배울 걸.
어차피 미래를 걱정한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고, 원하는 방향으로 가려면 결국 오늘의 내가 뭔가를 해야 하잖아요. 그렇다면 오늘 마주한 상황에서 가장 최선의 것을 선택하는 데에 에너지를 쓰는 게 낫죠. 순간에 온 마음으로 머물다 보면 하루살이처럼 살아도 방향성이 생겨 있을 거라 기대해요.
그 시간들이 있어서 이런 대답이 더 와닿는 걸지도 모르겠다.
온통 너덜하던 때가 있었다. 평생 낙천적인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한톨의 낙관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로 삶을 온 몸으로 거부하고 살다가 정신을 차린 뒤에 식물을 들였다. 내가 너덜하든 말든 식물은 햇빛과 물이 있으면 자랐다. 어떤 식물은 반그늘에서만 자랐고, 어떤 식물은 좀 더 밝은 곳을 좋아하고 또 어떤 식물은 바람이 잘 드는 자리를 좋아했다. 꽃을 사철 피우는 애도 있고, 가을에 파종해 한 겨울에 꽃을 보는 애도 있었다.
몸이 지닌 생명의 본성은 해치는 쪽보다는 건강하게 번성하는 쪽이에요. 엊그제는 마당에서 장대비에 줄기가 꺾인 분꽃을 발견했어요. 한타까운 마음에 지지대를 만들고 꺾인 줄기에 반창고를 감아서 세워주었어요. 그랬더니 다시 잎이 살아나요. 참 신기하죠. 어떤 생명이든 아무리 상처 입어도 댕강 잘리지 않은 이상은 심지가 버틸 수 있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요즘의 평온함은 천국에 비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다 다시 벼락 맞을 날도 있겠지만 실컷 아프고 나니까 이제 더는 같은 이유로 꺾일 일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장담은 하지 말까? 아직도 이별이 너무 무서운데!) 나만 나를 버리지 않으면 또 어떻게든 휘뚜루 마뚜루 견뎌내고 살아가겠지.
그림책의 해피엔딩은 우리가 어둠을 통과할 때 떠올릴 수 있는 좋은 날에 대한 기억을 심어줘요. 용기를 내면 분명 무언가 달라진다는 믿음과 함께요. 낙관성을 담아내는 일이 곧 가벼움이 되지 않도록 주인공이 세계를 긍정하기까지의 과정을 고심하며 잘 보여주려고 노력해요.
동화의 세계를 사랑한다. 뜬금 없는 고백인데, 어떤 방식으로든 산타와 요정이 존재하는 세상을 믿는다. 누가 뭐래도 내 낙관의 원천은 네버랜드와 요정들이 밤을 지새우는 신발가게와 루돌프가 쓰는 썰매에 있다. (그리고 약간의 해리포터.) 너무 많은 신데렐라 스토리가 해피엔딩을 의심하게 만들었지만 주인공이 결국 난관을 이겨내고 자신만의 세계를 지켜내는 해피엔딩을 좋아한다. 그래야 이 모든 게 과정일뿐이라고 속고, 또 믿을 수 있으니까.
Q. 관계 맺기에 있어 작가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 있을까요?
A. ‘말에는 힘이 없다’라는 사실이요. 말에 힘이 생기는 순간은 누군가 그 말을 주웠을 때뿐이에요. 제가 컵을 향해 움직이라고 백번 말해도 컵은 움직이지 않지요. 제 말을 누군가 듣고 옮겨줄 때 말의 힘이 발생해요. 즉, 내가 타인의 말을 줍지 않으면 그 말에는 힘이 없어요.
나만의 세계를 구축한 작가들의 이야기에는 견고한 세계의 시작이 되는 씨앗이 있었다. 나무가 될지 꽃이 될지 모르지만 일단 썩지 않게 씨앗을 틔워내고 잘 가꿔낸 사람의 이야기에는 힘이 있다. 실내에서만 키운 싹과 바깥 바람을 쏘이며 키운 싹은 줄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바람에 흔들린 나무는 뿌리 가까운 쪽부터 색이 바래며 단단해지는 목질화가 일어난다. 부침이 있어 성장을 한다는 소름돋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고, 단단해보이는 세계가 스스로 씨앗의 이야기를 할 때 나는 그 세계가 더 견고하고 믿음직스러워 보인다. 앞으로 내가 좀 더 부침을 겪어도 꺾이지는 않겠구나 하는 낙관도 생겨난다. 날이 싸늘해지면 한해를 돌아보게 된다. 올해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에 이 책의 질문과 답이 충분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한겨레출판 서평단 하니포터 1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