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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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이라는 작가의 단단한 마음이 좋다. 무심한듯한 문체에 누구보다 따뜻하고 반듯한 마음으로 적었을 이 일기가 좋다. 일기를 쓰기 싫을때마다, 잘못된 생각을 할때마다 나는 아마 76페이지를 펴보게 될것 같다.

사람들은 온갖 것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기억은 망각과 연결되어 있지만 누군가가 잊은 기억은 차마 그것을 잊지 못한 누군가의 기억으로 다시 돌아온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 화석이다. 뼈들은 역사라는 지층에 사로잡혀 드러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퇴적되는 것들의 무게에 눌려 삭아버릴 테지만 기억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기억은 그 자리에 돌아온다.
기록으로, 질문으로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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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고 있잖아 오늘의 젊은 작가 28
정용준 지음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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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이 재밌고 슬프다. 그러면서 내가 몰랐던 세계를 한꺼풀 벗겨내어 보여주며 ‘이봐, 너도 이렇게 생각했지?’라고 묻는 책 같다. 나의 편협한 시각을 들킨 것 같아 마음에 뾰족한 가시가 있는 것 같이 따끔하기도 했다. 나는 24번이 좋다. 마냥 착하지 않아 좋다. 생각이 많아 좋다. 말이 많아서 좋다.

나는 잘해 주면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다. 누군가 한 손을내밀어 주면 두 손을 내밀고, 껴안아 주면 스스스 녹아 버리는 눈사람이다. 내 첫사랑은 열한 살 때 만난 부반장이다. 치아에 금속 교정기를 장착하고 이마엔 좁쌀 여드름이 퍼진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쓴 아이였는데 그때 난 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표정은지나치게 차갑고 툭눈붕어를 닮은 돌출된 눈동자에 나를 향한 모멸의 불꽃이 이글거렸는데 그땐 그런 것조차 사랑스럽보였다. 왜냐고? 나에게 잘해 줬기 때문에.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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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소설 초입을 읽을 때 왠지 모르게 불편함을 느낀다.
왜 불편한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중반부에 접어들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초반부를 읽을 때까지만 해도 나의 뇌에서 개밥 쉰내 나는 가부장제를 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대단한 사실을 완독 후 샤워하다가 알게 됨)
대가리에 힘 빡 주고 기억하자.
가.녀.장

소재가 흥미로운데 위트있는 글체까지 더해지니 더할나위 없다.

"이 분 전입니다!"
슬아는 끈적끈적한 니플 패치를 손에 들고 있다. 붙이기만 하면 된다. 붙인 뒤에 마이크를 차고 방송에 임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아는 돌연 골똘해진다.
‘이거 안 붙이면 어쩔 건데, 씨바?‘
그야 슬아도 모른다. 한국에서 노브라로 방송에 출연한 여자를 한 명밖에 본 적 없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무사하지 않았다.
슬아는 그 일을 오랫동안 곱씹었다. 그 여자가 유별난 것처럼 이야기되던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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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10만부 기념 특별한정판)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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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156p까지 읽었을 때 내가 준 별점은 고작 2점이었다. 그러나, <탐페레 공항>을 읽은 순간 별 두 개가 번쩍 더 추가 되었다. 이 단편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 같다. 누구에게다 마음에 오래 남는 나이 든 친구 하나 쯤은 있다. 그 친구가 보고 싶어진다.

Do not bend (Photo inside) 구부리지 마시오 (사진이 들어 있음)말 그대로 노파심이라는 게 이런 걸까. 사진이 지구 반대편 먼길을 거쳐가는 동안 행여나 구겨질까, 노인은 많이 걱정했던 것 같다. 나는 시리얼 상자를 가위로 자르고, 그것을 풀로 사진의 뒷면에단단히 붙이는 노인의 모습을 상상했다. 하얀 밤, 태양이 뭉근한 빛을 내는 창가에 앉아 가위와 풀과 사진 그리고 편지 사이를 천천히오가며 더듬거리는 노인의 쭈글쭈글한 손을.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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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찾아오는 구원자 안전가옥 오리지널 8
천선란 지음 / 안전가옥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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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란의 책은 늘 신선하다.
지나간 책이 궁금하여 내 손 끝에 닿은 이 책은
뱀파이어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나
결코 문장이 가볍지 않다.

"외로움과 고독 끝에 몰린 사람들은 울지 않거든. 잊었다고 해야 할지 소용없는 걸 안다고 해야 할지. 영혼 없는 눈동자로 허공만 바라보며 하루를 까먹지. 슬플 때 눈물이 난다는거, 그래서 울 수 있다는 거, 그 나름대로 살아 있다는 의미야.
의욕을 잃은 사람들은 울지 않거든. 운다고 속이 시원해지는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울지 않으면 몸속 수분이 밖으로 빠져나가지를 못해. 그 수분 때문에 피가 아주 묽어지는 거지. 잘숙성된 적포도주처럼. 그들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후각이 발달해서 그 고독한 피의 향을 맡을 수 있어."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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