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온다 나온다 말은 많았고 매년 기대 신작 리스트에 올라갔지만 번번히 출간되지 않아 '환상 속의 그 책'처럼 되어버린 미치오 슈스케의 <랫맨>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많은 책을 읽은 것도 아닌데 어쩐지 한 열 권쯤은 읽은 것 같은 친근함이 느껴지는 작가 미치오 슈스케의 -어쩌면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을 너무 여러 차례 읽다 말아서 그런 걸지도,,;;- 이 책은 강렬한 빨간 표지만큼이나 독특한 느낌을 준다.
엘리베이터 안, 15년 전 죽은 사장 아들의 유령이 나온다는 흉흉한 이야기와 이어지는 엘리베이터 추락으로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오오!! 줄거리와는 좀 다른 것 같지만 이 책, 이런 내용이 담겨있구나!!!' 궁금해!! 엄청 긴장되는데!!!
위 내용은 본편의 내용과는 관계가 -별로- 없습니다.ㅡㅡ;;;
아마추어 밴드의 멤버인 히메카와 료. 그는 어린 시절 누나와 아버지의 죽음에 상처를 가지고 있다. 공연을 앞두고 연습을 거듭하던 밴드 멤버들은 얼핏 보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범인은 누구이며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을까? 밴드 멤버들 사이에 서서히 생기는 균열은 무엇 때문일까? 그리고 과거 히메카와의 기억 속 그 사건은 과연 어떤 실체를 가지고 있었을까?
날짜는 흐르고, 사람들은 새해 소망을 기원하면서 또 새로운 1년을 시작한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동안 보아 온 것, 들은 것의 색채는 서서히 희미해진다. 어느 날 어디선가 가만히 서서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봤을 때, 징검다리 돌처럼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은 언제나 실수뿐이다.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뿐이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 이야기의 초점은 히메카와의 과거에 맞춰져있다. 과거에 발생한 일들, 누나의 죽음, 사고인지 사건인지 알 수 없었고, 어린 히메카와가 이해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그 일,, 조금씩 조금씩 단서를 풀며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동일한 해석을 하게끔 만든다. 동적이었던 사건 발생 전에 비해 사건 발생 후는 오히려 조금 정적이다. 범행을 은폐하려는 히메카와의 행동은 약간의 초조함을 느끼게 하지만 '권선징악'을 생각하면 어차피 뻔한 결론일 것이라 어쩐지 느긋한 마음으로 읽게 된다. 궁금증은 사건 발생 전이나 후나 아직은 비밀을 품고 있는 히메카와의 과거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그런 생각이 든다. "음,, 역시 생각대로군."
최근에는 워낙 읽는 책마다 트릭이나 결말을 많이 맞춰왔으니까,,
이것이 랫맨의 정체이다. 네 명의 사람 이후에 나오는 그림과 네 마리의 동물 이후에 나오는 그림은 동일한 그림이다. 당신은 이 그림이 무엇으로 보이는가?
모두가 랫맨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두가'에는 당연히 나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책은 '아, 그렇구나'라는 생각을 오래 하도록 두지 않는다. 내가 바라보는 랫맨이 랫맨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조차 쉽지 않다. 하도 뒤통수를 맞아 나중에는 '안 믿어,,'하는 마음까지 생겼다. 읽는 내내 조금도 마음을 놓을 수 없게 하는 책이 바로 이 <랫맨>이다.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결말로 독자를 이끄는 미치오 슈스케에게 막연히 끌려가며 마냥 뒤통수를 맞았는데 책장을 덮을 때는 읽는 내내와는 참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 때 받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조차 이 책의 네타가 될 것 같아 조심스럽다. 되도록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순수하게(?) 뒤통수를 맞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나의 감정 표현은 자제해야겠다.
어디서부터 설명하면 좋을까. 어떤 식으로 이야기해야 할까. 과오란 뭔가. 누가 그것을 재판할 수 있을까. 무엇을 원하고 어떤 대가를 지불하면 사람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혹시 잘못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을 때 도대체 무엇을 기원해야 멈출 수 있는 것일까. 옳고 그름이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면 누가 그것을 구별할 수 있을까.
돌이킬 수 없는 걸까. 사람은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는 걸까.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자신이 아는 것, 믿는 것, 생각하는 것이 반드시 진실일 수는 없다는 것, 그래서 알고 믿고 생각하는 것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랫맨>은 재미있고, 가볍게 읽히지만 내용은 그만큼 가볍지 않고, 한없이 어두운 것 같으면서도 또 은근히 그렇지 않은 듯 보이기도 하고, 독자의 뒤통수를 남아나게 하지 않는, 그래서 책을 펼치는 순간 속지 않을 수 없게 만들지만 책을 덮으면서는 '잘 속았구나'하고 쿨하게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