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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름은 어디에
재클린 부블리츠 지음, 송섬별 옮김 / 밝은세상 / 2022년 5월
평점 :
절판
당신은 이미 나에 대해 알고 있을 거야. (중략) 알 수 있는 건 그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어떤 인물이었는지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말하는 인상일 뿐이야. 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당신에게 직접 내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해.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나면 당신은 비로소 내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정확하게 알게 될 테니까.
이 소설은, 뉴욕에 온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살해된 소녀가 들려주는 그녀 자신의 이야기이다.
권총 자살한 어머니, 누군지도 모를 아버지, 그리고 자신을 매몰차게 내쫓은 그. '앨리스'는 자신의 열여덟 살 생일, 갓 성인이 된 그 날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뉴욕으로 향한다. 그리고 새롭게 찾은 꿈을 향해 달려보기도 전에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다.
다른 여자와의 결혼을 앞둔 남자친구가 있는 '루비'는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뉴욕에 왔다. 그리고 폭우 속을 조깅하다 어떤 소녀의 시신을 발견한다. 경찰의 조사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소녀. 루비는 그녀에 대해 조사를 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에게 내 신원은 범인이 누군지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만 의미 있을 뿐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 (중략) 범인이 누군지 알게 되는 순간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그에게로 쏠리게 되어 있으니까.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는 사람, 추리소설의 내러티브를 장악하는 사람은 바로 내가 아니라 그일 테니까.
이 소설은 이미 시작에서 자신이 죽었다고 말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말하는 소녀의 입을 빌려 전개된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왜 뉴욕에 오게 되었고, 무엇을 꿈꾸며 그 때 그 곳에 갔고,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지금의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보통의 소설이라면 피해자의 과거와 현재까지는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알 수 있어도 그 사람이 평소에 하던 생각, 몰래 감추고 있던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그 사람이 바라던 미래까지는 알 수 없다. 그 모든 것은 누군가에 의해 이미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반면 범인이 검거된 후에는 그 범인이 여태 살아온 인생과 범행을 저지른 동기가 낱낱이 밝혀지고, 여기에 뻔히 그려지는 장면, 수많은 기자들이 내미는 마이크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을 내뱉는 것도 볼 수 있다. 누군가가 말을 할 수 있는 권리,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앗아간 사람에게는 주어지는 권리. 그리고 피해자보다는 가해자에 더 관심을 갖는 현실. 작가는 너무도 당연하게만 느껴지던 범행 '사실' 혹은 '동기', '범인' 등에 맞춰지던 초점을 오로지 피해자에 두고, 그녀의 입으로 들려주는 그녀의 이야기로 한 권의 소설을 채우고 있다. 죽기 전, 죽는 순간, 죽은 후..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었던 그녀의 모든 이야기로.
참 어려운 소설이다. 읽기 어려운 책도 아니고, 가독성도 좋고, 내용 자체도 아주 자극적이지 않고, 어떻게 보면 꿈 많은 두 여성의 이야기를 출판사의 소개글에서 말하는 것처럼 '서정적으로' 들려준다고 볼 수도 있는데, 이미 살해당한 소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녀의 꿈이 손을 뻗으면 잡힐 만큼 가까워질 수록, 그 꿈이 반짝반짝 빛날 수록 슬프게 느껴진다. 그 날이 마지막인 줄 몰랐던 그녀의 삶. 죽은 후에도 이름이 밝혀지지 않아 '제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야 했던 그녀의 짧은 생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심지어 살아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던 사람들의 삶까지 바꿔놓았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그녀의 삶은 더이상 바뀔 수 없이 끝나버린 것까지 잔잔한 전개에도 사정없이 가슴을 움켜쥐는 것만 같다. 안타깝고 또 안타까워서. 강렬하지 않은데 그 어떤 소설보다 강렬하게 느껴졌고, 몰입하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몰입이 되고, 어쩔 수 없이 감정이입이 되어서 읽는 내내 -역설적으로 소설 속에서 꿈과 희망이 반짝반짝 빛날 수록 더욱- 마음이 힘들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온전히 피해자의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라서, 생각이 많아지고 동시에 여운이 참 오래 남을 것 같은 그런 책이었다.
출판사로부터 책만을 협찬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