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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바닐라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5월
평점 :

정한아 작가의 소설집은 처음 접했다. 대체로 소설은 이야기의 줄거리로 쓰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인데, 나도 이 당연한 말을 하고 웃었다. (웃음) 사실 나도 소설은 이야기고 줄거리라는 주의다. 물론 소설의 다양한 장르 속엔 묘사나 그림을 그리듯 사실주의, 또는 공상과학, 공포 등 다양한 분야가 있다. 다만 소설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적어도 내가 쓰고 있는 소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작가적인 입장에서 지나친 스토리를 강조하다 보니 이게 맞나 싶었다. 그런 찰나에 정한아 작가의 소설을 만나니 반갑고 외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적어도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술과 바닐라’ 표지부터 바닐라 향이 나는 것 같다. (웃음) 이 소설의 특이한 점은 보통 소설집을 연이어 읽게 되는데 정한아 작가의 소설은 붙여 일기가 조금 부담스럽다. 왜냐하면 각각의 소설마다 스토리의 개성이 탄탄하고 강해 다음 작품을 읽는데 부담과 혼선이 온다는 사실이다. 하나하나의 소설마다 정말 마력을 지닌 것 같다. 나는 그래서 오전과 오후, 그리고 시간 텀을 두어서 소설을 접했다. 나는 이런 부류의 소설이 나에게 맞는 모양이다. (또 웃음)
각각의 소설을 읽고 짧은 메모를 했다. 정한아 작가를 알게 되어 기쁘고 반가웠다.

○ 잉글리시 하운드 독
민욱과 미연, 성재와 연주. 젊은 날 유럽 30일 여행으로 인연. 사회에서 각자 부부의 삶을 살았지만, 결과가 달라지고 막다른 곳으로 내몰린다. 연주가 망설였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만약 자고 가라고 말했다면 그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커다란 개의 운명처럼 먹먹하고 가벼운 느낌이다.
○ 술과 바닐라
한편의 장편소설을 읽은 느낌이다. 스토리로 꽉 채워진 소설이라는 생각이다. 지금 내가 추구하는 소설 장르다. 변화가 필요함을 느낀다. 남에게 보이는 티끌이 내게 붙어 있음을 인지하는 시간이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느낌. 앞니 빠진 얼굴을 올려다보는 느낌의 소설이다.
○ 참새 잡기
나는 나의 교활함-생명력에 감탄했다. 할머니도 나의 그런 면을 인정해주었다. 그녀가 나를 딸로 받아들인 것은 바로 그 이유라는 걸 나는 안다._P103
형광 연두색 플라스틱 바구니에 짧은 막대기 하나 끈 묶은 새 덫이다. 참새 다리에 실을 묶어 주었다. 살아있는 생명체에 경의와 놀라움. 다음날 바구니가 하늘을 향해 누워 있다. 밤새 참새를 풀어주었다. 그런 나의 교활함과 생명력에 감탄했다는 말에 교활함과 생명력이라는 단어에 꽂혀 곰곰이 생각을 몰아 쉰다.
○ 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
윤을 만나기 위해 나는 많은 것을 인정해야 했다. 나라는 인간에게는 친구도 뭐도 없다는 것, 남자에게 환장해서 물불 가리지 않는다는 것, 외로움이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린다는 것.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한 것이 열등감으로 작용했는지도 몰랐다._P120
어찌 보면 이질적인 단어들이다. 소설을 다 일고 그것들이 위태롭고 거미줄에 묶음으로 앉아 있는 것 같다. 엄마와 딸, 두 번의 이혼, 엄마와 분리된 남매들. 조금 복잡하고(장편소설의 소재?) 혼란스럽다. 그것이 소설 속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모호하다. 꼭 세상살이같이.
○ 고양이 자세를 해주세요
그들은 내가 무슨 일하는지. 가족은 어떻게 되는지. 어디 사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대개 말을 흐리며 웃어 보였다. 대단한 비밀이라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펼쳐 놓을 기력이 없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인생이란 얼마나 간편한가.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전생처럼 아득하기만 했다._P159
어찌 보면 제목이 조금은 야했다. 근데 실제 내용도 자유로웠다. 언젠가 나도 쓸 터이다. 머릿속에 맴돈다. 다만 필력이 미치지 못할까 걱정이다. 인연은 불현듯 연결되고 끊인다. 다만 각자만 알뿐이다. 인생이 각자에게 소중하고 중요하듯 그렇게 시간의 돛단배에 실려 간다.
○ 기진의 마음
기진은 냉소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단 한 번도 누군가가 하는 말을 비웃거나 속으로 빈정거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은 변한다. 액체처럼 흐르고, 튀고, 때로는 증발해버린다. 기진은 이제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_P194
조금은 장황한 글이다. 즉 본론에 앞서 사서가 길고 복잡하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암 환자의 심리나 감정을 깊이 있게 잘 표현했고 간혹 뾰족한 감정표현이 백미다. 노인과 동행처럼 원래 인생사 어둡고, 확인되지 않은 길을 함께 걷는 게 아닐까. 홀로 내 감정을 추스르며.
○ 할로윈
죽은 자의 날(할로윈). 한국에선 이태원 압사 사고가 있었다. 내가 청춘 20代 살던 한남동에서 늘 그곳을 지나야 했다. 뽀얀 안개 속을 걷듯 나는 나의 인생을 통째로 그곳에 올인했다. 그래서 후회는 없다. 소설 속 그녀도 새로운 출발 앞에서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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