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소전쟁 - 모든 것을 파멸시킨 2차 세계대전 최대의 전투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오키 다케시 지음, 박삼헌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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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9 독소전쟁. 오키 다케시

 

독소전쟁. 독일과 소련의 전쟁(2차 세계대전)을 책 한권에 압축해 놓은 책이다. 전쟁도서에 관심이 많은 나는 독일과 소련전쟁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였다. 한편 잔인하고 처절한 [절멸전쟁]이었다. , 적을 죽이고 포로도 죽이는 주민도 죽이는 전쟁이다. 다시 말해 몰살정책인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적어도 둘 다 똑같다는 결론이다. 나는 삼국지를 보며 수많은 전쟁으로 인명피해를 주목했는데 독소전쟁도 만만치 않았다. 정말 놀랍니다. 독일이 유대인 학살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 베일을 벗는 계기가 독소전쟁인 것 같다. 독일 소련전쟁의 총정리인 셈이다.

 

[도서 정보]

독소전쟁오키 다케시 지음, 박삼헌 번역,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5장과 머리말+종장으로 구성, 32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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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 주요 연표

1941

622독소개전

628일 독일군, 민스크 점령

88일 스탈린, 붉은 군대 최고사령관 취임

102일 태풍작전(독일군, 모스크바 공략작전 발동)

1942

611일 미소 상호원조협력 조인

628일 독일군, 청색작전 발동

823일 독일군, 스탈린그라드 도달

1119일 소련군, 천왕성 발동(스탈린그라드 반격작전)

1943

22일 소련군, 별작전 발동(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 항복)

710일 서측연합군, 시칠리아 섬 상륙

93일 서측연합군, 이탈리아 본토 상륙

1944

127일 소련군, 레닌그라드 해방

66서측연합군, 노르망디 상륙

73일 소련군, 민스크 해방

825일 서측연합군, 파리 해방

1945

112소련군, 독일 본토 진공 개시

413일 소련군, 빈 점령

416일 소련군, 베를린 공략개시

430히틀러 자살

57독일 항복

58독일, 소련군에 대한 항복문서 조인




P6.소련은 1939년에 인구 18,8793천 명이었지만, 2차 세계대전으로 전투원 8668~1,140만 명을 잃었다고 한다. 군사행동과 집단학살에 의한 민간인 사망자 450~1,000만 명, 그 외에 질병이나 기아에 의한 민간인 사망자는 800~900만 명이었다. (중략) 2천만 명으로 공식화, 하지만 소련이 붕괴하고 현재는 2,7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전체인구에 14%)

독일(1939) 총인구 6,930만 명에 사망 831만 명(전체인구에 12%)

 

P28. 약해진 소련군

이때 숙청당한 숫자는 사람을 섬뜩하게 만든다. 1937년에서 1938년까지 장교 34,301명이 체포되거나 추방당했다. 그중 22,705명은 총살당하거나 행방불명되었으며 그 실태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또 고급 장교일수록 숙청의 희생자가 많아서, 군의 최고 간부 101명 중 91명이 체포되었고 그중 80명이 총살당했다고 한다. (중략) 1940년 여름에 현장부대 다수를 사찰한 붉은 군대 보병총감은 “225개 연대의 지휘관 중에서 육군대학교 졸업자는 한 명도 없고 각종군학교 졸업 25, 나머지 200명은 장교 속성과정을 밟은 임관한 자들뿐이다라고 보고 했다. 사단장 70%이상, 연대장의 약 70%, 정치위원과 정치부대장의 60%는 그 직책에 오른 지 1년 정도의 경험밖에 없었다.

레닌이 죽은 후 스탈린의 권력 기반의 불안정한 상태에서 반역을 막기 위한 대숙청 시행

 

P65. 경이로운 진격

찬란한 초여름의 하루였던 1941622일 오전 315, 나치 독일은 소련을 위한 침공을 시작하였다. 총 병력은 약 330만 명. 이와 같은 대군이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거의 3,000Km에 달하는 전선에서 일제히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P128. 위기 극복을 위한 전쟁

타국 병합에 의한 자원과 외화 획득, 점령한 국가의 주민 강제노동으로 독일 국민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군비확장 경제를 유지했다. 물론 이러한 내치적 요인으로 추진된 영토 확장정책은 타국의 분쟁을 고조시키는 것이었지만, 나치 독일은 위기극복을 위해 전쟁에 돌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P130. 세 개의 전쟁

독소전쟁은 이른바 통상전쟁’ ‘수탈전쟁’ ‘전멸전쟁세 개의 전쟁이 합쳐져 실행된 복합전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P146. ‘출동부대편성

출동부대는 소련 각지에서 학살을 이어갔다. 이틀 동안 여성과 아이를 포함한 유대인 33,771명의 생명을 빼앗은 키예프 근교 바비야르 학살(19419)1942년 초 하리코프에서 행해진 10,000명의 사살 등, 출동부대 손에 죽은 사람들의 수는 적어도 900,000명이라 추정된다. 단 그 수가 너무 많은 탓에 정확한 희생자 수는 오늘날까지도 확정되지 않고 있다.

 

P149. 1941년 단계에서 포로수용소 81곳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직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충분하지 못했다. 기아, 동상, 전염병 때문에 소련군 포로 다수가 죽어갔다. 반항하거나 탈주를 도모했다는 이유로 사살되는 포로도 있었다. 그리하여 최종적 통계는 무시무시한 숫자이다. 570만 명의 소련군 포로 중에서 300만 명이 사망한 것이다. 실제로 53%에 달하는 사망률이었다.

 

P157. 굶주리는 레닌그라드

결국 900일이나 지속된 포위결과, 100만 명이상이 희생되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숫자는 확인할 수 없다.

P167. 소련군에 의한 포로 학대

19416월 개전 때부터 19432월까지 17~20만의 독일군 장병이 포로로 잡혔지만, 그중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5%에 불과하다고 추산되고 있다. 포로에 관한 소련군의 대우는 독일군 만큼은 아니었다 해도 독일군 같이 국제법을 짓밟은 참혹한 것이었다.

 

P176. 모스크바인가 석유인가

독일 동부군은 엄청난 손해를 입은 상태였다. 단적으로 군을 움직이는 리더 격인 장교의 사망수를 보도록 하자. 19416월 말~19424월까지 사망한 장교는 15천 명이었다. (1939년 개전부터 소련침공 19416월까지 사망한 장교가 1,250명이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이 숫자가 의미하는 바가 분명해진다) 더구나 사망한 장교들 중 대부분은 전선에서 직접 지휘하던 위관급(소위에서 대위까지)장교였기 때문에, 이는 곧바로 부대 전력 저하로 이어졌다.

 

P219. 전략적 공세 능력을 잃은 독일군

스탈린그라드에서 포로로 잡힌 독일군 장병 9만 명 중 전후에 고국으로 살아 돌아온 사람은 약 6천 명에 불과했다.(7%)

 

P281. 포츠담의 종지부

독일이 점령했던 토지에서 입식(개척지나 식민지에 들어가 생활하는 일)했던 사람들, 러시아, 폴란드, 체크슬로바키아, 헝가리 각국의 독일계 주민이 소련 점령군과 전후에 성립한 중동부 유럽 각국의 신정권에 의하여 추방됨으로써 막대한 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들 피추방민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기아와 전염병에 시달리며 대다수는 걸어서 독일로 향했다. 그 총수는 1,200~1,600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 중에서 사망자는 100~200만이라 전해진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과 독일이 소련을 바라보는 시각이 비슷하다는 것에 놀라웠다. 원인은 독일이 제공했지만 소련도 만만치 않는 몰살정책으로 일관했다는 증거다. 적군, 포로, 주민까지 학살을 자행했으니 전쟁이란 참으로 슬프고 잔인한 것이다. 우리는 분단국가로써 전쟁 중(휴전상태)인 곳이다. 우리의 착각으로 휴전을 전쟁종식으로 알고 있지만. 그래서 독소전쟁이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아울러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전쟁역사를 살펴보고 교훈을 삼아야 할 일이다.

 

 

물오른 봄의 전령사 산수유를 기다리며 (芸談)이 쓰다.

 




 ····· 이 서평은 도서협찬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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