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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집
박완서 지음, 이철원 그림 / 열림원 / 2013년 8월
평점 :
나는 박완서 작가의 열혈 팬이다.
대학시절, 나는 국어수업 시연을 위해 교과서 내용을 선정하다 박완서 작가의 '그 여자네 집'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이 작가의 소설 내용을 아이들에게 심도 있게 전하고자 박완서 작가의 다른 소설도 읽어보겠노라며 도서관에서 박완서씨의 단편들을 읽다가 수업 준비는 뒷전으로 하고, 정신없이 소설읽기에 빠져들었던 젊은 날.
박완서 작가의 책을 보면 그 때의 열정 어린 내 모습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곤 한다.
덕분에 나는 박완서 작가의 웬만한 소설들은 다 읽어본 편이다. 어찌 보면 박완서 작가의 일생을 다 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야기를 들려주기 좋아하셨던 어머니, 6.25 때 사망한 오빠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귀한 아들을 일찍 잃은 그녀의 슬픔..
그래서인지 박완서 작가의 소설들은 다 비슷비슷한 기억의 얼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뒤로 갈수록 점점 완숙되어가는 소설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특히나 평온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말하고자 하는 바가 확실한 그녀의 수필집은 그 중에서도 백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박완서 작가의 유작들을 묶은 책이다.
그래서인지 박완서 작가의 이야기들이 가장 자연스럽게, 그러나 가장 깊은 내공으로 고여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처음에 나왔던 영감님과 마나님의 이야기는, 이제 늙어 죽음을 바라보는 할머니 박완서가 애정어린 눈으로 그려낸 이시대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아, 나도 저렇게 영감님과 알콩달콩 살면 얼마나 좋을까, 싶도록 흔연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영감님과 마나님의 이야기.
마치 박완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읽는 내내 마음이 따스했다.
마나님은 영감님이 혹시라도 아무도 대작할 이 없이 쓸쓸하게 막걸리를 들이켜는 일이 생긴다면
그 꼴은 정말로 못 봐줄 것 같아 영감님보다 하루라도 더 살아야지 싶고,
영감님은 마나님의 쭈그렁바가지처럼 편안한 얼굴을 바라보며
이 세상을 뜰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 요즘 들어 부쩍 마나님 건강이 염려스러운 것,
그건 그들만의 지극한 사랑법이다.
(p.33)
또한 박완서 작가의 수필은 인간과 자연을 향한 따뜻한 사랑의 시선이 늘 존재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인간애가 무엇인지를 느끼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책 또한 마찬가지인데,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에 대한 박완서 작가의 애정이 그대로 녹아있어 현재의 삶을 반성케 하는 대목들도 참 많이 있었다.
이렇게 좋은 세상을 못 본 조상들은 아무리 장수를 했어도 반세상밖에 못 살았다고 측은해하는 마음까지 품었었다.
그러나 그런 신기한 것들은 길들여지지마자 시들해지고 마는데
이 쑥잎이나 냉이 같은 보잘것없는 것들은 어찌하여 해마다 새롭고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것인가.
(p.48)
박완서 작가의 글들은 우리 어머니의 품처럼 참 따뜻하다. 박완서 작가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렇게 고인이 된 후에도 우리의 가슴 속에 잔잔한 감동과 따스함을 주는가. 작가를 꿈꾸는 나에게 롤모델인 박완서 씨를 살아생전 만나지 못 했던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박완서 작가의 순박하면서도 푸근한 웃는 얼굴 같은 책, '노란 집'
'그 여자네 집' 보다도 더 넓고 아름답고 사랑이 푸진 집을 방문하게 되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