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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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눈을 떴을 땐 중환자실이었다. 공교롭게도 엄마가 입원해 있던 아산병원이었다. 위세척을 마친 뒤 혈액투석을 하고 있는데 발치에 엄마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내가 바랐던 얼굴은 아니었다. 내가 아는 우리 엄마는 이런 상황에서 소리를 지르며 나를 때리거나 냅다 울어버리거나, 주님,으로 시작하는 기도의 형식을 띤 한탄을 시작하거나 일단은 뭐가 됐든 아침 드라마처럼 감정을 터뜨리고 보는 사람이었는데, 그날의 엄마는 그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ㅡ 너무 애쓰지 마. 어차피 인간은 다 죽어.
그게 엄마가 할 말이냐고, 묻고 싶었다. 왜 이렇게 됐는지 묻는 게 순서가 아니냐고, 사실은 내내 내게 묻고 싶은 말이 있지 않았냐고, 물어봐야만 할 게 있지 않냐고, 묻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묻고 따지고 싶었지만 목구멍으로 인공호흡기가 삽관돼 있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 소설 속에서 규호는 여러번 죽었다.
농약을 마시고, 목을 매고, 교통사고를 당하고, 손목을 긋고……
규호는 헤테로 남자가 됐다 게이도 됐고, 여자가 되기도 하고, 아이도, 군인도 되고…… 아무튼 인간이 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다 되었다가 결국 죽는다.
죽은 상태로 내 사랑의 대상이 되고, 추억의 대상이 되고, 꿈의 대상이 되며 결국 대상으로 남는다. 내 기억 속의 규호는 언제나 완결된 상태로 차갑게 얼어붙어 있다.
그렇게 규호와 나의 기억도 유리막 너머에서 안전하고 고결하게 보존된 상태로 남는다.
영영 둘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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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너는 네덜란드에서 무슬림 인구가 늘어나면서 백인우월주의 운동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으며 재차 말했다. "네덜란드에서 말이에요. 다른 나라도 아니고."
네덜란드뿐만 아니다. 똑같이 진보적으로 알려진 덴마크도 이미지가 훼손되고 있다. 대부분 무슬림인 3만 6천여 명의 난민이 그 작은나라로 몰려들자, 덴마크 국민은 난민이 자국의 사회복지 시스템을 휘청거리게 하면서도 그들의 관습에는 적응하지 않는다며 분개하기시작했다.
와이너와 나는 잠깐 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언뜻 와이너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이어서 열린 마음을 가졌다고 보이는 사람들이 원하는 해결책은 소수를 자기들 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 자신들이 소수 편에 들어가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는다고 비꼬았다. 염세주의적 유머였다.
"다수에 속해 있는 한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도덕적으로 완벽하다고 느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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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수림
백민석 지음 / 예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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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에 노숙자들이 사는 육교 있잖아." 여자는 방금 씻고 나와 주방 식탁에 앉은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육교가 있어?" 여자는 저녁을 먹으며 서울역 인도육교와 그 육교에 사는 사내들에 대해서 말했다. "근처에 가지 말고 빙 둘러가. 그거 살 썩는 냄새야. 사람이 산 채로 썩어들어 가는 냄새라고."

억새다발 너머로 청색의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의 색이 지금처럼 단단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너무 단단해서 푸른빛이 도는 강철의 반들반들한 표면처럼 느껴졌다. 어떤 것도 하늘을 뚫고 그 바깥으로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 강철 같은 하늘이 억새밭 저 너머 마을까지, 마을 너머 산머리까지, 그리고 자갈톱 너머 하구까지, 하구 저 너머 잿빛의 바다까지 뻗어 있었다. 그는 백팩을 열어 서울에서 사온 번개탄을 꺼내 비닐포장을 뜯었다. 그러곤 아이들이 뒷좌석에 먹다 둔 버터쿠키 양철 케이스를 조수석 바닥에 뒤집어놓고, 번개탄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인간의 선량함이 그냥 주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의 선량함은 자기와의, 그리고 자기를 둘러싼 환경과 사회와의 투쟁을 통해 어렵사리 얻어지는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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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없는 이야기 - 최규석 우화 사계절 만화가 열전 2
최규석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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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얻은 단단한 깨달음 하나, 세상은이야기가 지배한다. 단순한 구조의, 적절한 비유를 사용하는,
짧은 이야기들, 교훈적인 우화들과 가슴을 적시는 수많은 미담들. 그 이야기들은 너무 쉽게 기억되고 매우 넓게 적용되며아주 그럴싸해서 끊임없이 세상을 떠돌며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들을 바라보는 강력한 관점을 제공한다.
 이것이 내가 가끔이지만 꾸준히 우화를 창작하는 이유다.
그러니까 나를 짜증나고 분노하게 만드는 수많은 이야기들에 대한 복수 같은 거다. 주먹에는 주먹, 이야기에는 이야기, 그런 거다. 그렇다고 해서, 너 따위가 몇 개 되지도 않는 이야기 로 수천 년 동안 유통되어 온 이야기들과 맞서려는 것이냐고책망하지는 마시라. 나도 안 된다는 것 알고 그럴 필요도 없다 고 생각한다. 다만 이 이야기들 중 몇 개만이라도 살아남아 다른 많은 우화들처럼 작자 미상의 이야기로 세상에 떠돌다 적 절한 상황에 적절하게 쓰이기를, 그리하여 오르지 못할 나무 를 찍는 열 번의 도끼질 같은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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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 그런데 이 우월함의 근거는 피해자가 생각하는 정의(justice)가 전부다. 피해=정의도 아닐뿐더러 누가 그것을 공감해주겠는가. 문제는 이것이다. ‘선’의 힘으로 ‘악’을 이기려 할 때, 인간은 부서지고 무너진다. 도덕적 우월감은 타락의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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