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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는 꿈을 지킨다
무라야마 사키 지음, 한성례 옮김 / 씨큐브 / 2021년 7월
평점 :
생명을 가진 것들은 영원하지 않고, 소멸을 반복한다. 인간의 생이 끊임없이 뻗어가는 식물이라면 마녀의 생은 광물과도 같다. 아무리 원해도 인간은 인간 이외의 어떤 것도 될 수 없다. 그런 인간에게 천사 같은 존재가 있어 끈을 이어준다면 소멸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마녀들은 마법의 기적을 일으켜 그 끈을 연결해준다.
오래된 항구. 마녀가 사는 마을은 현실이지만 현실과는 조금 벗어난 거리에 있다, 그 마을에 들어서면 아무리 걸어도 같은 곳을 걷고 있다. 그러다 어느 새 와본 적 없는 길을 걷고 있고, 따뜻한 불빛이 골목을 환하게 비추이고 있다. 이 세상에서 아주 오래 산 마녀가 인간을 위해 밝혀놓은 등불이다. 멈춰 선 골목 끝에 카페 ‘마녀의 집’이 있다. 마녀들이 사는 집이다. 어두운 주변과는 달리, 불빛에 싸인 그곳의 마녀들은 간절히 염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가만히 기적을 걸어 꿈을 이뤄준다. 마녀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영혼들까지도 평온하게 이끌어준다.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사는 마녀들은 인간 가까이에 살며, 만나고 헤어짐을 거듭하며 살아간다.
170세의 아직 젊은 마녀 나나세와 사역마 고양이, 그리고 베테랑 마녀 니콜라. 그렇게 사람들 속에 스며들어 인간들과 어울려 살며 여행을 계속하는 두 마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기억을 망각하는 인간들과는 달리 마녀들은 모든 것을 간직한 채 오래오래 혼자 살아간다. 인간의 10년이 마녀들에게는 1년의 시간이다. 마녀들은 인간이 늙어 죽는 것을 수없이 봐왔다. 마녀들은 인간을 먼저 떠나보낼 때마다 애절하고 슬프다. 그들과의 사랑과 우정도 한 순간의 꿈처럼 허무하다. 하지만 마녀들은 그 사람들을 위해 알아채지 못하게 가만히 다가가 마법을 걸고 기적을 일으킨다. 그렇게 인간의 생명을 살리고 그들의 행복을 위해 소리 없이 도와준다.
각각의 이야기에서 사람보다 오랜 세월을 살아야 하는 마녀들의 슬픔도 느껴진다. 이 소설의 마녀들은 인간을 좋아하며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지만, 그 속에 녹아들지 못하여 고독을 느끼기도 한다.
어려서부터 접해온 마녀들은 ‘헨젤과 그레텔’,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같이 주로 악역이었다. 그러나 이 소설 속 마녀들은 한결같이 깊은 감동을 주는 착한 마녀들이다.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 화가가 아이였을 때 열차사고에서 살아남아, 자신을 구한 마녀를 천사였다고 말할 정도로 마녀들은 숭고한 존재들이다. 이야기 속의 마녀도, 고양이도, 인형도, 동물들도, 외로움과 슬픔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에 인간의 따뜻한 마음을 더욱 소중히 여긴다.
우리는 달에 토끼가 살고 있다고 믿었던 동심을 어른이 되면서 어딘가에 두고 왔다. 이 책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순수했던 어렸을 때로 독자를 데려다 주는 마법의 빗자루 같은 소설이다. 아이였을 때 마녀나 요괴, 천사의 존재를 믿었던 독자들이라면 자신의 이야기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이 책의 어느 이야기든 내면에 잠들어 있는 동심을 눈뜨게 해준다. 오래된 바닷가 마을의 정경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잊고 있었던 감각이 되살아나고, 검은 고양이가 딸린 그 마녀를 어딘가에서 꼭 만날 수 있을 것만 같고, 보이지는 않지만 주변 어딘가에 그런 마녀가 꼭 살고 있을 것만 같을 것이다.
원래 아동문학가였던 저자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판타지 소설과 시리즈물을 다수 출간했는데, 이번에는 남녀노소가 두루 즐길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접할 때처럼, 일본의 연중행사와 전통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도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된다.
과학은 마법의 힘을 갖지 않은 인간들에게 주어진 “인공의 마법”이라는 마녀의 말은 놀랍다. 판타지 소설이지만 마녀는 현실적인 관점에서 과학을 말한다. 이 책에서 마법은 만능도 아니고 공격적이지도 않다. 마녀들은 후회도 하고 고통스런 기억이나 슬픔, 추억 따위로 힘들어하기도 한다. 세상에 남아 있는 마녀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한때 마법과 기적이 중심이었던 시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과학과 기술의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마녀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과학이 중심축을 이루는 시대가 되면서 신비주의 세계는 발붙일 곳을 잃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마녀들만이 은밀히 몸을 숨기고 살아간다. 사람들이 어둠을 멀리하고 기적을 믿지 않게 되면서 마녀들은 설자리를 잃었다. 과학이 만들어낸 빛이 세상의 어두운 구석을 환하게 밝히게 되면서 오로지 사람들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 과학은 인간들에게 “인공의 마법”이라고 마녀가 말했지만, 지금 우리 인간들은 과학을 인류 모두의 행복을 위해 사용하고 있을까. 과학이 사람을 구하는 마녀들의 마법을 대신하고 있을까.
마녀나 등장인물들은 하나 같이 주변이 모두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 따뜻한 존재들이어서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독자들은 위안을 받고 있다고 느껴질 것이다. 현실이 힘들다 해도 마녀들의 기적 같은 힘에 이끌려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만 같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수호천사 같은 마녀가 한 명 쯤 뒤를 봐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꿈을 지켜주는 마녀들의 진혼곡 같은 이야기도 큰 감동을 준다. 죽은 자들도 니콜라의 카페를 찾아와서 살았을 때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때로는 자신이 죽은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귀신도 있다. 마녀는 위험에 빠진 인간을 구하기도 하지만, 길 잃은 영혼들과 소통하여 그 영혼들에게 가야할 길을 인도해주기도 한다. 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마녀의 마법을 빌어서 이 세상을 떠난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과 한 순간만이라도 만나고 싶어질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이들에게 마녀는 “영혼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녹아있다”라고 알려준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상실감으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이 얼마나 큰 위로의 말인가. 마녀가 등장하는 판타지 소설이지만 이처럼 깊은 감동을 주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저자가 '후기'에서 “아무런 힘도 없고, 역사도 바꿀 수 없고, 그저 한 줄기 실에 지나지 않는 제가 누군가의 작고 사랑스러운 일상을 축복해주고, 불행하게 쓰러지는 사람들에게 손길을 내밀어주는 이야기였기를 바랍니다.
저는 마법을 부릴 능력도 없습니다. 이 이야기도 언젠가는 잊혀져가겠지요. 이 이야기를 읽은 누군가가 지금까지 살아온 한 가닥 한 가닥의 실을 상상해준다면 제 이야기는 바로 그때 마법으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썼듯이,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며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면 언젠가 기적 같은 삶으로 바뀌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은 깜깜한 어둠 속을 걷는다 해도 용기 내어 나아갈 수 있으리라.
이 소설을 읽는 당신의 주변에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마녀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웃집에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이사와 있는 낯선 주민, 그리고 항상 웃는 얼굴이었지만 한두 마디밖에 대화를 나누지 않았는데 어느 새 어디론가 이사가버린 그 이웃이 바로 마녀였을지도 모른다.
천사 같은 마녀가 가까이에 살고 있고, 그 마녀가 자신을 지켜준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해질 것이다. 어딘가에서 인간 세상을 위해 애쓰고 있는 그런 마녀들 덕분에 더 나은 세상이 오지 않을까 기대감마저 생긴다.
이 소설은 한국 독자의 정서에 맞춰 내용을 약간 수정했음을 밝혀둔다.
기적 같고, 행복의 부적 같은 이 소설이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많이 사랑 받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