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정적 풍경 1 - 보나르 풍의 그림에 담긴 ㅣ 서정적 풍경 1
복거일 지음, 조이스 진 그림 / 북마크 / 2009년 3월
평점 :
'서정적'이란 단어, 낱말을 주제로 대학 졸업 학사 논문을 쓴적이 있다. 시도 아닌 소설을 주재료로 오탁번, 김용익 등의 소설을 예시로 인용하며 한국적 서정성을 이야기하는 논문이었는데, 논문은 어찌됐건 주제가 선명하고 정확하며 구체적이어야 하는데, 서정성이란 주제 자체가 그러지 못하다고, 아무리 다시 써봤자 추상적일 뿐이라며 다른 주제로 다시 쓰라는 학과 조교님의 충고를 받은 기억이 있다. 그 때 이 책을 봤다면 좀 나아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보나르 풍의 그림에 담긴 서정성이라... 보나르 풍의 그림이 무엇인지 일단 기본부터 모르니 궁금한 점 투성이인 책을 처음 받아보고, 글을 읽기 전 삽화부터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강렬한 듯 하면서도 파스텔톤이 묻어나는 은은한 유화... 아하.. 대충 어떤 식의 그림을 말하는 것인지 느낌이 왔다. 그리고 이 그림이라면 그래, 서정성을 말할 수 있겠다 싶었고, 논문에 그림 첨부도 되는 규칙이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내가 말한 서정성이 바로 이런거란 말이야!! 하고 조교님께 들이대고 싶은 욱하는 마음도 가지게 되는 삽화였다. 이 예쁜 삽화는 작가의 따님이 직접 그린 작품들이라는 작가의 머릿말에 내심 흥! 질투어린 마음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책장을 펼쳐 서정적인 풍경에 뛰어들어보고자 작정했다.
이 책을 전체적으로 정의하자면 수필형식을 띤 국내외 시 평론집이다. 시의 선택은 서정성을 기본 주제로 하고 있겠지만 객관적인 느낌으로는 작가의 개인 취향같다고나 할까. 국내외 시를 굳이 가리지도 않고,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서부터 오랜 과거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까지... 그 스펙트럼 역시 방대했다. 이 덕분에 처음 보는 어려운 시도, 많이 들어보고 귀에 익숙한 쉬운 시도 거리감없이 모두 뭉뚱그려질 수 있는 듯 했다.
수필 형식의 글이라 한토막 한토막 따로 읽어도 가능할 정도로 책이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중 내 개인적인 취향에 맞았던 글들을 가지고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먼저 가장 첫 글이 할 수 있는 '열린글의 노래'라는 글. 딱 지금 이 맘때, 이 계절의 한자락쯤 되는 때 쓰여진 글 같았다. 날씨는 봄날, 햇살은 포근하고 먼산에 내가 끼었다는 표현이 그야말로 서정적인 풍경이다. 이 풍경을 보고 있자면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이 거세게 일지만, 글빚에 눌려 주말여행은 엄두도 못 낸다는 글귀. 지금의 딱 내 처지라서 피식 웃음도 나고 울컥 하는 섧음도 치밀었다. 글로서 먹고 사는 나는 여기저기 글을 써줄때가 많다. 그 글들은 모두 마감일이라는게 있기 마련인데, 작가는 이 마감일에 맞춰 글 써주는 일을 일컬어 '글 빚'이라 하는 것이다. 참 귀여운 낱말이고나 할까. 앞으로 지인들에게 자주 써먹을 말이 될 것 같다.
'눈에 마법을 띠고'라는 글에서는 사랑을 다룬 시들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느 날 신문기사에, 요즘 젊은 작가들의 문학에서는 사랑이 사라졌다는 글이 실렸다 한다. 언제는 맨날 사랑 타령만하는 문학이라며 질떨어진다고들 흉을 보더니만 이젠 사랑이 없다고 난리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사랑이란 감정은 외면하기엔 너무나 강렬한 감정이라 문학에서 늘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이 말에 나도 적극 동감한다. 이 팍팍한 세상, 그 유치한 사랑마저 없으면 써서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말이다.
'반구제기'란 글에서는 자신과의 다툼, 시인이 천주교 신자라 종교적 뜻이 있는 시라는 작가의 시 소개가 곁들여진 시지만 나는 이런거 저런거 다 떠나서 참 발상이 참신하고 공감이 가서 앞으로 좋아하고 애송하게 될 시를 한 편 만났다. 그 시는 김형영의 '가을하늘'이라는 시다.
몇 십년을 두고 가슴에 든 멍이
누구도 모르게 품안고 살았던 멍이
이제 더는 감출 수가 없어
멀건 대낮
하늘에다 대고
어디 한번 보기나 하시라고
답답한 가슴 열어 보였더니
하늘이 그만 놀라시어
내 멍든 가슴을 덥석 안았습니다.
온통 시퍼런 가을 하늘이
왠지 모르게 마음의 위안이 되는 시 아닌가. 개인적으로 처음 접하지만 아주 좋은 시라고 생각이 들어, 같이 나눠보고 싶은 마음에 이 글 속으로 옮겨 보았다.
이밖에도 김광규, 김광균, 김광섭, 김소월, 김춘수, 노천명, 마종기, 맹교, 모윤숙, 박목월, 박성룡, 박이문, 변영노, 서정주, 왕발, 왕지환, 육유, 랜도, 로버트 헤이든, 시마자키 토오손, 앙드레 쉬바르츠 바르트, 에드몽 아로쿠르, 윌리엄 위즈워스 등의 시인들의 작품들을 수필로 잔잔하게 소개하고 있는 복거일의 글과, 그의 딸의 그림은 한없이 서정적인 풍경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힘이 있다. 따뜻한 봄날, 달콤한 차한잔과 함께 읽으면 더없이 좋을, 편안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