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사랑법 - 인간의 사랑법에 지친 당신에게
이동현 지음 / 오푸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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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학급문고에서 꺼내본 ‘고학년을 위한 만화 그리스 신화’를 통해서였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신은 나르시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나의 기억 속에 박힌 ‘신’이란 존재들은 무모하기 짝이 없고, 어처구니없으며, 황당한 인물들의 군상이다.

그런 캐릭터들의 사랑법이라는 직접적인 제목의 이 책은 읽기 전부터 난잡할 것임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읽고 난 뒤의 느낌은... 이렇게까지 난잡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찌보면 여러 가지 자신의 체면이나 사회적 페르소나에 갇혀 숨기고 있을 뿐, 그 모습들이 우리 인간들의 숨겨진 본성일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가운데서도 인간들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이란 감정에 빠지게 될 때면 인간들은 너도나도 유치해지기 마련이다. 유치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체면과 가식을 벗어버리고 동물적(?)으로 솔직해진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너무나도 본능에 충실한, 우리들의 진짜 모습을 까발리는 책이다.

수많은 신들의 사랑, 그들의 치정의 출발을 이 책에서는 제우스로부터 잡아간다. 제우스는 그야말로 천하의 바람둥이다. 처녀, 유부녀는 물론, 동성, 여동생, 누이까지... 그에게 모든 여자는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이다. 원하는 대상과 관계를 맺기 위해 반인반수로의 변신은 기본이고, 완벽한 짐승으로도 변신한다. 그 중에서도 감옥에 갇힌 여인과 관계를 맺기 위해 빗물로 변신해서 그 여인의 사타구니로 흘러들어갔다는 내용에서는 세상에, 이럴수도 있구나 싶어 까무러칠 정도였다.

이 지독한 바람둥이를 남편으로 맞아들인 여신이 있었으니 바로 헤라다. 화장품 이름으로 더 익숙한 이 여신은 제우스의 아내로서 가히 여신 중의 여신이라 할만하다. 바람둥이인 제우스를 붙잡아 두기 위해 무진 애를 쓰지만 자꾸만 빠져나가는 남자를 위해 제우스와 관계를 맺은 여인들과 싸움을 벌이기도 하고, 암소로 변신한 제우스의 내연녀를 알면서도 잡아 가둬두어 제우스의 항복을 받아내기도 한다. 마치 억척스러운 한국 아줌마를 보는 듯하다.

이 외에도 여자 제우스라고 할 수 있는 아프로디테와 아레스, 솔로몬, 삼손 등등 수많은 신들의 사랑과 불륜, 근친상간을 넘나드는 연애스토리가 펼쳐지는데, 그 모두가 우리 인간들의 군상을 닮아있다. 꽃남들에 열광하고 막장드라마에 빠져 허우적대는 우리들의 뒤통수를 화끈하게 때려주는 신들의 욕망 일대기가 바로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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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전 - 제3회 이화글빛문학상 수상작
정시은 지음 / 글빛(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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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3학년 때 꽃피는 오월, 이화여대를 한번 찾은 적이 있다. 백일장 참가를 위해서였다. 여대 캠퍼스답게 아기자기하고 웅장하면서도 여성미가 느껴지는 학교 건물을 구경하고 다니면서 저절로 시상이 떠오르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땐 백일장에서 상 하나 타지 못하고 씁쓸하게 돌아왔고, 그 돌아오는 길에 이화여대 백일장 주최측에서 한 권씩 나눠주었던 작년 백일장 수상작품집을 받아,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읽었었다. 수상작 하나하나마다 재기발랄하고 참신하여서 이화여대 측이 권장(?)하는 작품세계가 어느 정도 무엇인지 감이 잡혔다. 한 학년만 더 낮았어도 내년에 한번 더 도전하는건데...하고 서운해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5년만에, 백일장의 로망! 이화여대의 자체 소설 공모 당선작, 그 참신하고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작품을 다시 만났다.

82년생 여대생이 쓴 <연화전>이란 작품은 첫 시작부터 이 이야기가 픽션인지 팩션인지조차 헛갈리게 만들며 시작한다. ‘청운계’란 모임 소속의 여성들이 지은 것으로 추측되는 이 소설 ‘연화전’을 모두 소각하노라- 하는 임금의 명령과 함께, 마치 금서를 몰래 읽는 듯한 아찔한 긴장감을 선사하면서 이야기는 펼쳐진다. ‘청운계’는 과부들의 모임이다. 때문에 이 소설에서는 많은 과부들이 등장하고, 그 과부들의 억눌린 욕망과 그 욕망을 무시한 채, 가문의 위신을 위해 몹쓸 짓도 불사하지 않는 양반들의 태도를 조롱하고 풍자하기까지 하고 있다. 이런 소설은 작가가 여대생이어서 가능한 소설이 아니었나 싶다. 한 가정에서 아이낳는 기계로 밖에 존재가치가 없었던 여성들은 남편이 죽으면 따라서 죽어야 마땅할 무의미의 존재였다. 이 무기력한 감정은 아무리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여대생이라도 지금 현재 느끼는 여성으로서의 차별이 있기에, 그 옛날 여성들이 느낀 그것이라 해도 그 감정을 현대 여대생 또한 고스란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드는 소설이다.

결혼하기도 전에 죽어버린 남편으로 과부가 된 연화. 그 남편없는 시댁에서 십년이 넘는 세월을 독수공방하며 산다. 그리고 그 집엔 바람둥이자 꽃미남인 시동생 연균이 있는데 이 연균은 연화와 결혼할뻔도 했던 사이다. 하지만 이미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던 남자 선균은 부모님께 그 여자와 결혼하겠다하지만 천출 출신인 그 여자와 떨어뜨려놓기 위해, 부모는 선균을 억지로 연화와 혼인을 시킨 것이다. 그렇게 결혼하기 전날 밤, 선균은 성기가 잘린 채로 무참히 죽어있다. 한 여자만 바라보며 순정을 바친 선균과는 달리 동생 연균은 처와 첩들로 둘러싸여 있고 그럼에도 쉴새없이 다른 여자들을 탐한다.

연화는 시어머니의 명으로 산속 깊은 절로 들어가게 된다. 절에서 자살을 해라는 시어머니의 암묵적인 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연화는 우여곡절 끝에 죽지 못하고 심간지당이라는 능력있는 과부가 만든 ‘청운계’라는 모임에 소속이 되면서 서책에 눈을 뜨고, 스스로 글을 창작하며 억눌렸던 욕망을 풀어낸다. 이 ‘심간지당’이라는 이름 속에도 신사임당을 풍자하는 웃지못할 해학이 담겨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 소설은 한번 손에 들었다하면 멈출 수 없게 하는 힘이 있다. 이 반전들은 읽는 재미를 위해 밝혀두지 않겠다. ‘연화전’이란 소설 자체가 쓰여지게 된 계기부터 소설이 쓰여지기까지, 이 과정이 바로 ‘연화전’이란 설정이 되면서 소설의 재치는 극에 달한다. 여대생의 깜찍한 발상이 반짝반짝 빛나는 소설, ‘연화전’. 앞으로도 그녀의 소설이 매우 기대가 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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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의 그물 Nobless Club 12
문형진 지음 / 로크미디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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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불교판타지소설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인드라의 그물'이 뭔고 하니 작품의 끝부분에도 약간 소개가 되고 있지만, 불교에 흡수된 힌두신 중의 하나로, 수미산에 있는 인드라의궁전 위에 거대한 그물이 걸려있는데 그 그물코 하나하나에 구슬이 하나씩 매달려 있다 한다. 그 구슬들은 거기 매달린 다른 모든 구슬들의 모습을 서로 비추어 한 구슬의 빛이 바뀌면 다른 구슬의 모습도 바뀐다. 때문에 인드라의 그물은 불가에서 세상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의 비유로 흔히 쓰인다고 한다. 이 작품은 제목이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형제 자매로 얽혀져 환생하고 또 환생하면서도 서로의 행복을 빌면서 다같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는 이야기가, 아주 스펙터클하고도 장황한 영웅담의 이야기처럼 펼쳐진다.
  우선 '교'라는 이름의 수백년을 살았지만 20대의 아름다운 몸과 얼굴을 가지고 있는 여신(?)과, 그 여신이 만들어낸 화신, 시녀와 같은 개념의 '여의'라는 여자가 등장한다. 이들이 산책을 갔다가 오는 길에 버려진 아이를 하나 발견하게 된다. 그냥 버려두고 올수가 없기에 아이를 데리고 오는데, 데리고 오는 와중에 건장한 성인 남자로 성장을 해버린다. 여인들의 기가 아이에게 통하여 성장호르몬을 촉진시킨 것이다.(그야말로 판타지가 아닐 수 없다.) 처치곤란의 이 아이, 아니 청년을 교는 자신이 만들어낸 화신으로 속여 데리고 있기로 한다. 그렇게 청년은 '하얀 말'이란 뜻의 칼키라는 이름으로 교와 여의에 손에서 길러지게 된다.

  칼키가 각종 무술과 불경 등을 배우고 수련해 가는 가운데, 경전을 지키는 교는 경전들이 어디로 갔는지 도통 알수가 없다. 이 사실을 위의 신들이 알게 되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 전전긍긍 하고 있는 교와 여의다. 그리고 일정한 주기로 교의 몸이 아프곤 했는데 그 주기가 하루가 다르게 짧아진다. 어느 날 밤, 교는 여의 모르게 칼키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가 칼키에게 자신 역시 칼키처럼 본래 인간의 몸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즈음 교가 경전들을 잃어버린 사실을 눈치챈 아수라들이 교를 잡으러 온다. 여의가 필사적으로 교를 지키려 하지만 결국 교는 아수라들에 의해 잡혀가고 만다. 여인의 몸으로 아수라와 맞서 싸울 힘도 없고 어찌할 바 모르고 있는 여의에게 칼키는 자신이 교를 구해오겠다고 한다. 그동안 수련하면서 배운 무술로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칼키의 험난하고도 다채로운 모험담이 펼쳐진다.

  인터넷 모뎀을 살아있는 생물체로 설정하여 먹이를 줘야하는 애완동물로 여긴다던지, 남자주인공 칼키가 여신 중의 여신 관세음보살의 눈에 들어 첫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 부모이자 스승으로 소중하게 생각하던 교가 알고보니 칼키 전생에 아내였다든지 하는 설정이  인터넷소설을 읽는 느낌이 들었다. 작가 나이 또한 젊지 않을까.. 하며 책장을 다시 앞으로 넘겨 작가소개를 봤더니, 역시나 1985년생으로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생이었다. 재기발랄한 상상력과 이상적인 여성상에 대한 환상이 가득한, 그리고 불교적인 문화와 정신을 작품 속에 십분 녹여낸, 환상적인 모험담이 이 책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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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 풍경 1 - 보나르 풍의 그림에 담긴 서정적 풍경 1
복거일 지음, 조이스 진 그림 / 북마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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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이란 단어, 낱말을 주제로 대학 졸업 학사 논문을 쓴적이 있다. 시도 아닌 소설을 주재료로 오탁번, 김용익 등의 소설을 예시로 인용하며 한국적 서정성을 이야기하는 논문이었는데, 논문은 어찌됐건 주제가 선명하고 정확하며 구체적이어야 하는데, 서정성이란 주제 자체가 그러지 못하다고, 아무리 다시 써봤자 추상적일 뿐이라며 다른 주제로 다시 쓰라는 학과 조교님의 충고를 받은 기억이 있다. 그 때 이 책을 봤다면 좀 나아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보나르 풍의 그림에 담긴 서정성이라... 보나르 풍의 그림이 무엇인지 일단 기본부터 모르니 궁금한 점 투성이인 책을 처음 받아보고, 글을 읽기 전 삽화부터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강렬한 듯 하면서도  파스텔톤이 묻어나는 은은한 유화... 아하.. 대충 어떤 식의 그림을 말하는 것인지 느낌이 왔다. 그리고 이 그림이라면 그래, 서정성을 말할 수 있겠다 싶었고, 논문에 그림 첨부도 되는 규칙이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내가 말한 서정성이 바로 이런거란 말이야!! 하고 조교님께 들이대고 싶은 욱하는 마음도 가지게 되는 삽화였다. 이 예쁜 삽화는 작가의 따님이 직접 그린 작품들이라는 작가의 머릿말에 내심 흥! 질투어린 마음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책장을 펼쳐 서정적인 풍경에 뛰어들어보고자 작정했다.

이 책을 전체적으로 정의하자면 수필형식을 띤 국내외 시 평론집이다. 시의 선택은 서정성을 기본 주제로 하고 있겠지만 객관적인 느낌으로는 작가의 개인 취향같다고나 할까. 국내외 시를 굳이 가리지도 않고,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서부터 오랜 과거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까지... 그 스펙트럼 역시 방대했다. 이 덕분에 처음 보는 어려운 시도, 많이 들어보고 귀에 익숙한 쉬운 시도 거리감없이 모두 뭉뚱그려질 수 있는 듯 했다.

수필 형식의 글이라 한토막 한토막 따로 읽어도 가능할 정도로 책이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중 내 개인적인 취향에 맞았던 글들을 가지고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먼저 가장 첫 글이 할 수 있는 '열린글의 노래'라는 글. 딱 지금 이 맘때, 이 계절의 한자락쯤 되는 때 쓰여진 글 같았다. 날씨는 봄날, 햇살은 포근하고 먼산에 내가 끼었다는 표현이 그야말로 서정적인 풍경이다. 이 풍경을 보고 있자면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이 거세게 일지만, 글빚에 눌려 주말여행은 엄두도 못 낸다는 글귀. 지금의 딱 내 처지라서 피식 웃음도 나고 울컥 하는 섧음도 치밀었다. 글로서 먹고 사는 나는 여기저기 글을 써줄때가 많다. 그 글들은 모두 마감일이라는게 있기 마련인데, 작가는 이 마감일에 맞춰 글 써주는 일을 일컬어 '글 빚'이라 하는 것이다. 참 귀여운 낱말이고나 할까. 앞으로 지인들에게 자주 써먹을 말이 될 것 같다.

'눈에 마법을 띠고'라는 글에서는 사랑을 다룬 시들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느 날 신문기사에, 요즘 젊은 작가들의 문학에서는 사랑이 사라졌다는 글이 실렸다 한다. 언제는 맨날 사랑 타령만하는 문학이라며 질떨어진다고들 흉을 보더니만 이젠 사랑이 없다고 난리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사랑이란 감정은 외면하기엔 너무나 강렬한 감정이라 문학에서 늘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이 말에 나도 적극 동감한다. 이 팍팍한 세상, 그 유치한 사랑마저 없으면 써서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말이다.

'반구제기'란 글에서는 자신과의 다툼, 시인이 천주교 신자라 종교적 뜻이 있는 시라는 작가의 시 소개가 곁들여진 시지만 나는 이런거 저런거 다 떠나서 참 발상이 참신하고 공감이 가서 앞으로 좋아하고 애송하게 될 시를 한 편 만났다. 그 시는 김형영의 '가을하늘'이라는 시다.

 

몇 십년을 두고 가슴에 든 멍이

누구도 모르게 품안고 살았던 멍이

이제 더는 감출 수가 없어

멀건 대낮

하늘에다 대고

어디 한번 보기나 하시라고

답답한 가슴 열어 보였더니

하늘이 그만 놀라시어

내 멍든 가슴을 덥석 안았습니다.

온통 시퍼런 가을 하늘이

 

왠지 모르게 마음의 위안이 되는 시 아닌가. 개인적으로 처음 접하지만 아주 좋은 시라고 생각이 들어, 같이 나눠보고 싶은 마음에 이 글 속으로 옮겨 보았다.

이밖에도 김광규, 김광균, 김광섭, 김소월, 김춘수, 노천명, 마종기, 맹교, 모윤숙, 박목월, 박성룡, 박이문, 변영노, 서정주, 왕발, 왕지환, 육유, 랜도, 로버트 헤이든, 시마자키 토오손, 앙드레 쉬바르츠 바르트, 에드몽 아로쿠르, 윌리엄 위즈워스 등의 시인들의 작품들을 수필로 잔잔하게 소개하고 있는 복거일의 글과, 그의 딸의 그림은 한없이 서정적인 풍경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힘이 있다. 따뜻한 봄날, 달콤한 차한잔과 함께 읽으면 더없이 좋을, 편안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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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리고 꽃들의 자살 - 동심으로의 초대 어른을 위한 동화
이세벽 지음, 홍원표 그림 / 굿북(GoodBook)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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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중반을 달리고, 서른이 거의 몇년 남지 않는 나이의 나는, 아직도 아이들의 전유물에 관심이 많다. 할인마트에 들를 때면 어김없이 장난감 코너를 어슬렁거리며 새로나온 인형이 없나 확인하고, 책나들이를 위해 서점에 들러서도 복작복작거리는 아이들 틈바구니에 끼여 동화책을 뒤적거리고 흐뭇한 미소를 짓곤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친구들에게 내 생일선물은 인형, 아니면 동화책을 사줘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고 다니는, 타칭 "늙은 소녀"인 내게, 이 동화책, [사랑, 그리고 꽃들의 자살]은 그야말로 나를 위한, 어른들을 위한 안성맞춤의 책이었다.

작가 이세벽은 카피라이터로도 일한 바 있어서인지 세상을 살아가며 지켜야할 많은 추상적인 내용들을 등나무의 생을 통해 아주 함축적이고도 아름다운 은유가 가득한 예쁜 동화로 그려내고 있었는데, 그 기술(?)이 아주 탁월하다. 삽화로 삽입된 그림들 역시 동양화의 여백의 미를 생각나게 하는 듯, 너무 인위적이지도 않고, 머릿속에서 산소가 재충전되는 듯한 느낌의 그림들로 조목조목 알차게 그려져 있다.

자신이 등나무인지도 모르는 철없는 새싹은 대지를 뚫고 나오자마자 시련에 처한다. 주위 풀들에 가려 햇빛을 볼수가 없고, 또 햇빛을 향해 고개를 들자니 처음 보는 태양의 빛은 너무나 따갑고 눈이 부셨기 때문이다. 다시 도로 땅속으로 들어가버리고 싶은 새싹에게 이른바 '진리의 목소리'가 지시를 한다. 처음만 참고 견디면 괜찮을 거라는 거다. 어린 새싹이 듣기엔 잔소리로만 들리는 '진리의 목소리'에 못이겨 새싹을 죽은 셈치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햇빛과 마주한다. 그리고 따가웠던 햇살이 점점 따사로워지는 걸 느낀다.

이 진리의 목소리는 우리 인간들에게도 존재하는 것일테다. 어릴 때일수록 더욱 잘 들을 수 있는 이 지침의 목소리는 자라면서 점점 욕심이 생겨나고 자신의 욕심으로 휩싸여 더이상 들을 수 없게 되기 마련이다. 지금의 나는 이 진리의 목소리를 얼마나 들을 수 있나 생각해보게 된다.

이 새싹은 점점 자라면서 자신의 몸이 다른 풀들처럼 초록빛이 아니라 갈색을 띄며, 자신의 몸에서 지렁이와 같이 생긴 이상한 모양이 자꾸 가지를 치고 나가는 것에 놀란다. 주위의 풀들도 괴물이라고 놀리는 통에, 어린 등나무는 좌절한다. 이에 또 진리의 목소리를 좌절하고 있지말고 여행을 떠나보라고 권고한다. 그리고 그 어딘가에 어린 등나무의 모습을 한 똑같은 나무가 있을 거라고 찾아보라는 말과 함께. 별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는 어린 등나무는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 여행 중에, 맞은 편에서 자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달려오고 있는 다른 등나무를 발견한다. 조금은 나이가 든 듯한 이 등나무는 어린 등나무에게 잠시 쉬어가라며, 자신이 이제껏 달려오며 겪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해준다. 그 이야기들 중 '꽃들의 자살'이야기를 들은 어린 등나무는 그처럼 슬픈 말을 들은 적이 없다며 가슴아파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들이 뭐가 그토록 힘이 들어 자살을 택했냐 싶은 마음에서이다.

대화 속에서 이 나이 든 등나무와 사랑에 빠진 어린 등나무는 서로를 꼭 끌어안는다. 뿌리 끝이 짓무르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함께 자라난다. 그리고 어린 등나무는 그토록 바라던 하늘을 마주볼 수 있을만큼 자라나게 된다. 그즈음 그들의 몸에서 등꽃들이 화려하게 피어난다. 등나무 둘이 사랑이 깊어질수록 등꽃들은 수도 점점 많아지고 모양도 점점 화려하고 예뻐졌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그만 불화가 생겨나고 껴안고 있던 몸을 서로 떼어놓고 싶은 마음이 들기에 이른다. 굳은 결심끝에 서로 갈라서기로 한 등나무들은 서로 떨어지기 위해 아래를 쳐다보는데, 깜짝 놀란다. 어느새 그들의 뿌리와 기둥은 하나로 붙어버린 것이다. 이젠 너와 나가 아니라 우리, 하나가 되어버린 몸에, 등나무 둘은 놀라면서도 감동을 한다. 그리고 그들의 서로를 향한 배려와 이해로 사랑이 다시 싹트기 시작하자, 모두 시들어 죽어있던 등꽃들이 다시 화려하게 피어나기 시작한다.

이 부분은 읽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나의 어린 시절, 엄마아빠의 부부싸움을 보며 얼마나 상처받았나.. 옛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어른들 나름의 이유로 끊임없이 다투고 싸웠지만 그 사이에 있던 우리, 어린아이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보금자리의 뿌리와 기둥이 통째로 흔들리는 불안감 속에서 점점 시들어가기 마련이다. 아이들이 훌륭하고 밝고 건강하게 자라길 바란다면 우선 어른들, 부부가 먼저 서로를 사랑하고 아껴서, 이미 한 몸이 되어버린 뿌리와 기둥을 튼튼히 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 등나무 둘은 서로를 영원히 사랑하리란 멩세를 하며, 등나무의 달콤한 연애담은 끝이 난다. 어떻게 보면 정말 단순하기 짝이없는 이야기지만, 이토록 많은 생각과 반성을 하게 만드는 것이 동화의 힘이 아닐까 싶다. 언제 서점에 들른다면 이 책을 몇권 더 사둬야되겠다.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물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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