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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리고 꽃들의 자살 - 동심으로의 초대 어른을 위한 동화
이세벽 지음, 홍원표 그림 / 굿북(GoodBook)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이십대 중반을 달리고, 서른이 거의 몇년 남지 않는 나이의 나는, 아직도 아이들의 전유물에 관심이 많다. 할인마트에 들를 때면 어김없이 장난감 코너를 어슬렁거리며 새로나온 인형이 없나 확인하고, 책나들이를 위해 서점에 들러서도 복작복작거리는 아이들 틈바구니에 끼여 동화책을 뒤적거리고 흐뭇한 미소를 짓곤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친구들에게 내 생일선물은 인형, 아니면 동화책을 사줘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고 다니는, 타칭 "늙은 소녀"인 내게, 이 동화책, [사랑, 그리고 꽃들의 자살]은 그야말로 나를 위한, 어른들을 위한 안성맞춤의 책이었다.
작가 이세벽은 카피라이터로도 일한 바 있어서인지 세상을 살아가며 지켜야할 많은 추상적인 내용들을 등나무의 생을 통해 아주 함축적이고도 아름다운 은유가 가득한 예쁜 동화로 그려내고 있었는데, 그 기술(?)이 아주 탁월하다. 삽화로 삽입된 그림들 역시 동양화의 여백의 미를 생각나게 하는 듯, 너무 인위적이지도 않고, 머릿속에서 산소가 재충전되는 듯한 느낌의 그림들로 조목조목 알차게 그려져 있다.
자신이 등나무인지도 모르는 철없는 새싹은 대지를 뚫고 나오자마자 시련에 처한다. 주위 풀들에 가려 햇빛을 볼수가 없고, 또 햇빛을 향해 고개를 들자니 처음 보는 태양의 빛은 너무나 따갑고 눈이 부셨기 때문이다. 다시 도로 땅속으로 들어가버리고 싶은 새싹에게 이른바 '진리의 목소리'가 지시를 한다. 처음만 참고 견디면 괜찮을 거라는 거다. 어린 새싹이 듣기엔 잔소리로만 들리는 '진리의 목소리'에 못이겨 새싹을 죽은 셈치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햇빛과 마주한다. 그리고 따가웠던 햇살이 점점 따사로워지는 걸 느낀다.
이 진리의 목소리는 우리 인간들에게도 존재하는 것일테다. 어릴 때일수록 더욱 잘 들을 수 있는 이 지침의 목소리는 자라면서 점점 욕심이 생겨나고 자신의 욕심으로 휩싸여 더이상 들을 수 없게 되기 마련이다. 지금의 나는 이 진리의 목소리를 얼마나 들을 수 있나 생각해보게 된다.
이 새싹은 점점 자라면서 자신의 몸이 다른 풀들처럼 초록빛이 아니라 갈색을 띄며, 자신의 몸에서 지렁이와 같이 생긴 이상한 모양이 자꾸 가지를 치고 나가는 것에 놀란다. 주위의 풀들도 괴물이라고 놀리는 통에, 어린 등나무는 좌절한다. 이에 또 진리의 목소리를 좌절하고 있지말고 여행을 떠나보라고 권고한다. 그리고 그 어딘가에 어린 등나무의 모습을 한 똑같은 나무가 있을 거라고 찾아보라는 말과 함께. 별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는 어린 등나무는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 여행 중에, 맞은 편에서 자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달려오고 있는 다른 등나무를 발견한다. 조금은 나이가 든 듯한 이 등나무는 어린 등나무에게 잠시 쉬어가라며, 자신이 이제껏 달려오며 겪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해준다. 그 이야기들 중 '꽃들의 자살'이야기를 들은 어린 등나무는 그처럼 슬픈 말을 들은 적이 없다며 가슴아파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들이 뭐가 그토록 힘이 들어 자살을 택했냐 싶은 마음에서이다.
대화 속에서 이 나이 든 등나무와 사랑에 빠진 어린 등나무는 서로를 꼭 끌어안는다. 뿌리 끝이 짓무르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함께 자라난다. 그리고 어린 등나무는 그토록 바라던 하늘을 마주볼 수 있을만큼 자라나게 된다. 그즈음 그들의 몸에서 등꽃들이 화려하게 피어난다. 등나무 둘이 사랑이 깊어질수록 등꽃들은 수도 점점 많아지고 모양도 점점 화려하고 예뻐졌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그만 불화가 생겨나고 껴안고 있던 몸을 서로 떼어놓고 싶은 마음이 들기에 이른다. 굳은 결심끝에 서로 갈라서기로 한 등나무들은 서로 떨어지기 위해 아래를 쳐다보는데, 깜짝 놀란다. 어느새 그들의 뿌리와 기둥은 하나로 붙어버린 것이다. 이젠 너와 나가 아니라 우리, 하나가 되어버린 몸에, 등나무 둘은 놀라면서도 감동을 한다. 그리고 그들의 서로를 향한 배려와 이해로 사랑이 다시 싹트기 시작하자, 모두 시들어 죽어있던 등꽃들이 다시 화려하게 피어나기 시작한다.
이 부분은 읽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나의 어린 시절, 엄마아빠의 부부싸움을 보며 얼마나 상처받았나.. 옛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어른들 나름의 이유로 끊임없이 다투고 싸웠지만 그 사이에 있던 우리, 어린아이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보금자리의 뿌리와 기둥이 통째로 흔들리는 불안감 속에서 점점 시들어가기 마련이다. 아이들이 훌륭하고 밝고 건강하게 자라길 바란다면 우선 어른들, 부부가 먼저 서로를 사랑하고 아껴서, 이미 한 몸이 되어버린 뿌리와 기둥을 튼튼히 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 등나무 둘은 서로를 영원히 사랑하리란 멩세를 하며, 등나무의 달콤한 연애담은 끝이 난다. 어떻게 보면 정말 단순하기 짝이없는 이야기지만, 이토록 많은 생각과 반성을 하게 만드는 것이 동화의 힘이 아닐까 싶다. 언제 서점에 들른다면 이 책을 몇권 더 사둬야되겠다.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물할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