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불빛의 서점 - 서점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배운 한 남자의 이야기
루이스 버즈비 지음, 정신아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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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에 보고 반하는 사랑을 믿지 않는 나는, 그 유명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러브스토리도 한낱 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들의 뭘 잘 알지도 못하는 감정놀음 이야기에 불과할 정도였건만... 나는 이 책표지를 본 그 순간,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세상에 !! 한 손에 딱 움켜잡는 손맛을 느낄 수 있는 앙증맞은 크기하며, 책장을 그대로 뽑은 듯한 책 표지는 마음에 드는 책을 몇권을 꺼내 든 것 같은 포만감을 선사한다. 세로로, 그것도 아래서부터 읽어야 하는 까만 글씨의 책제목 디자인 역시 아주 마음에 들었다. 책 표지를 넘기니 형광색의 노란 빛 가득한 속지 한장이 툭 튀어나오는 것이 얼마나 자극적으로 나를 유혹해대던지...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이 책의 제목, <노란 불빛의 서점>이란 어구만 듣고도 확 구미가 당기는 책일 것이다. 그리고 직접 이 책을 탐하여 사랑을 나눠본 나로서,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서점에서의 추억...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서부터 시작된다. 몸이 불편해 휠체어를 타야했던 나는 자연히 집에 있는 시간들이 많았고, 덕분에 일찍이 책읽는 즐거움에 눈을 떴다. 고작해야 특수학교를 다니며, 어른들이 사다주는 몇권의 책들이 전부였던 내가, 일반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고, 거기서 만난 비장애인 친구의 도움으로 함께 동네 도서관에 들어갔을 때의 희열은 정말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책장과 책장 사이에 들어서서 눈을 이리 돌려도 저리 돌려도 온통 책들이었던 그 순간은 정말이지 나에게 판타지와 같은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 즐거움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도서관의 자료실이 2층에 있었는데, 휠체어가 올라갈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 몇번은 나처럼 책을 좋아하는 친한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에 탄 채로 계단을 오르내렸지만, 초등학교 4학년생의 힘이 세봤자 얼마나 셌겠는가. 친구들이 지쳐가는 모습을 눈으로 본 나는, 더이상 도서관에 같이 가자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시 나의 책읽기 인생의 암흑기가 찾아왔다. 그러다 다시 신세계를 발견했다. 그 신세계가 바로 '서점'이었다. 엄마의 차를 타고 왔다갔다 하며 많이 지나쳐갔던 서점이란 건물. 그곳이 책을 파는 곳이라 책이 많다는 사실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어린 마음에 책을 파는 서점에 들어가면 반드시 원하는 책을 미리 정하고 난 뒤, 서점, 즉 가게 들어가서 주문하고 주인이 책을 건네주면 그것을 받아들고 금방 나와야 되는 시스템으로 생각을 했었다. 옷가게에서 하릴없이 구경만 하고 돌아다니면 눈치주는 주인처럼, 서점에서 책들을 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주인 아줌마가 내쫓는 곳인 줄 알았던 것이다. 서점은 그런 곳이 아니었고, 몇시간이고 죽을 치고 앉아 책을 읽다가도 그냥 나와도 되는, 양심에 찔릴 것 같으면 가장 마음에 드는 책 한 권 골라잡아 사서 나오면 그뿐인, 그런 곳이었다. 이 사실은 내게 도서관이란 존재를 알게 해주었던 그 친구가 역시 알려주었다. 나를 도서관에 더이상 데려갈 수 없게 되자 미안한 마음에 다시 서점으로 나를 인도했던 것이다. 그 후로 주말이면 주말마다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동네 시장 근처에 있었던 '새싹서점'에 들어가 한나절을 죽치고 앉아 책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에 겨워 허허실실 웃었던 기억이 있다. 요즘은 할일도 많아지고, 어릴때만큼 부지런하지가 못해 서점에 그렇게 눌러앉아 있어본게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오래된 일이지만 말이다. 

이 책은 이렇게 각자 개인의 독서취향과 독서 인생의 이력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책이라는 존재가 언제부터 어떻게 탄생하고 오늘날까지 전해져왔는지도 아주 상세히, 비교적 지루하지 않게 설명하고 있다. 노란불빛의 서점에서 나오는 그 순간, 당신은 신발을 신고 있을 지도 모른다. 당장 가까운 서점으로 달려가 책장 아래 주저앉지 않고는 못 배길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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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는 비둘기 똥구멍을 그리라굽쇼? - 디자인, 디자이닝, 디자이너의 보이지 않는 세계
홍동원 지음 / 동녘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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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굴지의 광고회사에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실무교육을 시켜준다는 공고가 붙은 것을 보고, 평소 광고에 흥미가 있던터라 지원을 했고, 서류전형에 통과가 되어 면접,필기시험을 치르기 위해, 그 광고회사 건물을 찾은 적이 있다. 세련된 건물 안에서 세련된 옷차림과 표정으로 각자의 창작을 위해 골몰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며 즐겁게 일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무언가 동경하고 싶은 아우라를 느꼈던 것 같다. '디자인'은 내게 그런 존재다. 보이지 않는, 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너머로 뭔가 근사한 것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은... 다시 태어나면, 아니 이번 생에서도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면 꼭 배워보고 싶은 것이 바로 디자인이다. 그 일을 하고 있는 현직 디자이너가 쓴 책, [날아가는 비둘기 똥구멍을 그리라굽쇼?]란 책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었다.
이 책의 저자 홍동원은 61년생 남성으로 20대 중반인 내겐 거의 아버지뻘인 사람이였고, 그 세대 사람이라 한다면 꽉 막힌 사고방식에 갇혀 있을 것이 분명한데 디자인이라니... 뭔가 아이러니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책 제목에서부터 풍기는 포스 그대로, 홍동원이란 작자는 20대 중반의 나보다도 훨씬 젊은 생각의 소유자였다. 또한 디자인이라는 시각적인 일을 다루고 있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글 자체가 무척 다이나믹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같다. 이 럭비공같은 디자이너 홍동원이 쓴 글과 함께 그의 생각들, 경험들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나 자신이 디자이너가 된듯하다.

또한 이 책이 재미있는 것은, 작가가 디자인이란 직업에 지나친 자부심 따윈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우리와 생각이 같은, 세련되지 못한, 하지만 그럼에도 디자인이란 일 자체의 가치성만큼은 누구보다 인정하고 나서는 그의 중심이 느껴져 이 책은 더욱 재미있게 읽힌다. 한시가 급하다며 족치는 통에 밤샘작업으로 초죽음이 되는 디자이너, 그렇게 족쳐놓고도 완성해간 시안을 보고 결론을 통보할때는 도대체 뭘하고 앉았는지 문밖에 세워두고 기다리는 통에 혼자놀기의 진수를 보이곤 하는 디자이너, 정말로 그 유행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유행의 창시자 이름도 제대로 모르면서 너도나도 빈티지 패션에 열을 올리는 대중들의 모습에 헛헛해하는 디자이너... 등등 갖가지 생각과 고민, 갈등에 빠지는 디자이너들의 삶을 진솔하게 그려내고 있는 이 책은 그야말로 흥미롭다.

그리고 이 책을 읽다보면 '디자인'이란 것이 그리 멀리있는 근사한 무엇가가 아니라 바로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우리의 일상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알게 된다. 친절하게 보이는 명함을 만들어달라는 검찰 관계자의 이야기에서부터,  'I♥NY'에 얽힌 에피소드, 지하철 노선도 다이어그램의 창시자 이야기(교보문고에서 헤매는 사람도 많던데 왜 교보문고에는 이런 지도가 없나..하는 작가의 입담에 깔깔 웃었다. 교보문고에서 헤매본 적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인지라...ㅋㅋㅋ), 예술적으로 인정은 받지만 한국인의 체형엔 맞지않아 붕뜬 자세로 앉게 만드는 의자 디자인 이야기, 한글, 자동차, 광고, 캐릭터 등등에 걸쳐 다방면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디자인의 세계 에피소드들은 책을 손에서 떼지 못하게 만든다. 날아가는 비둘기 똥구멍, 즉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고 있는 이 시대의 디자이너들. 그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디자인에 대한 동경은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디자이너들의 피폐한 생활을 알고 난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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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불패 - 이외수의 소생법
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 해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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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한참 문학에 빠져 감상에 젖어 있을 무렵, 문학잡지를 한권 구독하여 읽은 적이 있다. 지금은 폐간이 되어 없는 듯 하지만 "BESTSELLER"라고 하는 이름의, 여타 문학서처럼 비교적 딱딱하지 않은, 사진과 삽화들이 많이 곁들여진 문학잡지로 당시 조금 개방적이다 하는 작가들이 글을 연재하고 자신의 생각들을 잡지에 실을 것을 허락해주었었는데, 거기 작가 이외수도 속해있었다. 그리고 이외수가 담당한 챕터가 무엇이었는고 하니, 독자들의 고민거리를 받아 고민상담을 해주는 식으로 에세이를 써주고 거기 이외수가 나무젓가락을 이용해 직접 그린 그림을 엽서로 만들어 그 고민이  당첨된 독자에게 우편으로 보내주는 형식이었다. 거기 내 고민상담이 선택되어 실린 적이 있었는데 (물론 이외수님이 직접 그려주신 그림엽서도 받아 고이 간직하고 있는 중이다.)그 글이 이 책에 실린 '장애로 고통받는 그대에게'란 글이다. 책을 읽다가 그 글을 발견하고 너무 반가워 BESTSELLER 잡지책을 뒤적거려봤는데 워낙 오래된 일이라 그 글이 실린 잡지책이 어디에 있는지, 그 글이 실린 부분을 따로 떼어서 다른 곳에 보관을 해둔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 글을 쓰고 이외수님 홈피에 들러 글을 한번 남겨봐야겠다.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니...)

암튼 그 장애로 고통받는 그대가 바로 '나'이고,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딱, 그! "청춘"을 살고 있는 중이다. 그 누가 청춘을 아름답다고 한 건지, 정말 힘들어 죽을 맛인 요즘이다. 어렸을 적 한참 공부하던 나이에, 어른들이 날 보며 그렇게 공부 할때가 가장 편할 때다.. 하곤 말씀하시곤 했는데, 그땐 정말 무슨 저런 섭섭한 말씀을 하시나 했었다. 오르지 않는 성적에 무척이나 속상해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나고보니.. 대학교 4학년, 4학점을 남겨두고.. 뭔가 정확히 일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생기면 졸업을 하려고 휴학을 한 상태인 이제와 생각해보니 비로소 그 말이 얼마나 정확했던 말인지를 알 것 같다. 정말 공부만 하면 되는 그때가 가장 편했다. 이건 뭐... 내가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건지도 막막하고, 꿈이라고 여기며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하고 있는 이것은 정말 나한테 맞는 일인지도 모르겠고,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은 다른 곳을 보고 나를 좋아하는 그 사람은 내가 싫다. 엄마, 아빠는 점점 연로해 가시고 이외수님의 말처럼 '장애로 고통받는 나'는 부모님없이 누구에게 빌붙어 살아야 하는건지, 제대로 혼자 살수는 있을지.... 공부만하면 성적이 오른다는 공식이 성립하는 것처럼, 세상도 열심히만 살면 성공한다는 공식이 당최 통하긴 통하는 것인지. 사회에 나가면 만나는 저 사람들은 나를 정말로 같은 편이라 여기는 건지, 언제 어디서 배신을 때릴 것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쉬운 일이라고는 없는 청춘이다. 도대체 몇가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나이인가 말이다.

이렇게 세상에 찌든 청춘에게 이외수는 이 책을 통해 자그마한 위로, 처방전을 제시해준다. 나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에서부터, 부모를 증오하고, 떠나간 사랑에 힘겨워하고, 왕따, 백수, 나쁜놈, 나쁜놈에게 당한 착한 놈,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 희망이 없다고 좌절한 사람, 못생긴 사람, 열등감에 사로 잡힌 사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돈을 못버는 사람, 종교로 갈등하는 사람, 장애로 고통받는 사람, 자살하고 싶은 사람, 시험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각각에 맞는 처방전을 위트와 삶의 철학이 담긴 진지한 어투로 지어주고 있다. 위에 나열한 사람들은 모두 청춘이면 누구나 한번쯤 고민해봤을 문제들이다. 이를 세상을 먼저 산 이외수, 작가로서를 떠나 같은 인간으로서 충고와 조언을 해준다.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이 많은 고민거리들이 당장 해결되거나 하진 않으리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독한 감기에 조금이나마 기침을 멎게 해주고 퉁퉁부은 목구멍을 진정시켜주는 약처럼, 이 책은 우리를, 청춘을 토닥토닥 다독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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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년 전 악녀일기가 발견되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6
돌프 페르로엔 지음, 이옥용 옮김 / 내인생의책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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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선전 문구에 '유시민'의 추천사가 들어있어 내심 딱딱한 인권존중 논리를 앞세운 지루한 책이 아닐까 상상했었다. 그런데 왠걸, 비교적 얄팍한 책의 두께에 산문시를 연상케 할 정도로 짤막짤막한 에피소드형의 구성... 집중해서 속력을 내면 한 30분 정도면 금방 읽어내릴 수 있을 정도의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다 읽고 났을 때 그 묵직한 반성의 상념이 한동안 계속된다는 것이다.

작품은 동화라 해도 좋을만큼 단순한 스토리에, 이야기 속 주인공 역시 12살 먹은 백인 여자 꼬마아이다. 그야말로 부잣집 딸인 마리아는 생일선물로 흑인 노예 '꼬꼬'를 부모님으로부터 받게 된다. 이 선물 과정에서부터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조그마한 몸집의 '꼬꼬'의 첫등장이, 그야말로 무슨 맛난 음식이나 멋있는 물건을 선물하는 것처럼 커다란 그릇에 뚜껑이 덮힌 상태였던 것이다. 물론 그 뚜껑 속에 흑인 노예 꼬꼬가 들어(?)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고작해야 자신의 또래나, 자기보다 어린 나이로 보이는 꼬꼬의 그런 등장에도 마리아는 그 노예가 불쌍하다거나,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흑인노예는 어린 꼬마소녀 마리아의 눈에 그저 애완동물 정도로 밖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마리아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가 흑인노예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며 자랐기 때문에 하나도 어색하거나 거리낄 것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마리아의 부모인 백인 부부는 흑인 노예들을 말 그래도 막 부리는 모습을 보인다. 마리아의 엄마는 기분 내키는 대로 노예들에게 채찍을 휘둘러 때리고, 동네 부인들끼리 모여앉아 수다를 떨 때에도 각자 한마리 키우는 강아지 쯤으로 생각하지 않고 대화에 껌처럼 씹어댄다. 마음에 들지않는 노예는 서로 떠넘기는 모습까지 보이며 노예시장에 팔아버리고 새 것으로 사오면 그뿐이라는 식이다. 거기다 마리아의 아빠는 노예를 성적 노리개 쯤으로 생각하여 예쁘장한 여성노예를 건드려 집으로 데리고 들어오기도 한다. 마리아의 엄마는 이에 분을 못 삭혀 구둣발을 휘둘러 그 여성 노예의 얼굴에 아주 큰 상처를 내지만, 마리아의 아빠는 화를 내기는 커녕 상처나고 긁혀버린 물건쯤으로 여성노예를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이같은 부모 아래서 부족함없이 크는 마리아는 양심의 가책 따윈 느끼지 못한다. 그저 가슴이 나와 빨리 여자가 되길 바라는 꼬마아이, 사촌오빠 루카스와 결혼하고 싶은 철없는 꼬마아이일 뿐이다.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새로 들여온 여자 노예가 임신한 아이의 아빠가 바로 루카스란 사실에 경악하는 마리아이지만 이마저도 그냥 그 여자노예에게 있는대로 화풀이를 해대고, 새로 들어오는 가정교사에게 공부를 배울 미래에 다시 가슴 설레어 하는 단순한 여자애다.

특이한 것은 이 작품에서 이러한 백인 부부의 행동에 태클을 걸거나, 이런 식으로 흑인들을 대하면 안 된다는 둥,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정도의 훈계조차 하는 캐릭터가 없다는 것이다. 마리아에게도 그런 식으로 흑인 노예들을 대하면 나쁘다고,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따끔하게 조언하는 인물은 없다. 이 작품은 그저 그러한 백인 부부와 그 자식의 행동을 보여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묵직하게 느낄 수 있다. 흑인들의 삶의 애환을 말이다. 가타부타 인권존중 논리를 역설하는 책들보다 이 책은 훨씬 더 강력하게 인권존중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정말로 잘 쓰여진 작품이다. 서점에 들러 쉽게 읽어내릴 수 있을지라도 이 책을 그냥 그 자리에 놓아두고 오긴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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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박찬욱 외 지음 / 그책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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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의 신작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개봉하자마자 무수한 관심을 받았고, 배우 송강호와 김옥빈의 노출 연기로 다소 자극적인 화면들로 편집이 된 영화의 예고영상들 역시 화제의 대상이 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이 외에 영화 박쥐에 대한 정보는 한국 최초의 뱀파이어 소재 영화라는 것, 그것도 신부가 뱀파이어가 되어 친구 부인과 치정을 벌이고, 살인을 저지른다는 파격적인 스토리로 대략적인 것들이었다. 이 정보들을 가지고서 영화에서는 분명 보여주지 못했을 것들이 책에는 포함되어 있을 거라는 확신으로 책, <박쥐>를 펼쳤다.

책을 다 읽고 난 느낌은 그야말로 축축하고 눅눅하고, 뭔가 더러운 것을 보고, 온몸에 흠뻑 묻힌 기분이었다. 언젠가 대학전공 과목 시간 때 한 교수님이 박찬욱의 작품은 관객들에게 의도적으로 불쾌감을 안겨주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거라는 평을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난다. 영화 ‘올드보이’도 그랬고, ‘복수는 나의 것’, ‘친절한 금자씨’ 역시 그랬다. <박쥐> 또한 이 작품들 못지 않게 피로 물든 잔혹극, 욕망에 충실한 치정극으로, 불쾌한 기분을 지울 수 없는 작품이다.

책으로 쓰여진 <박쥐>는 박찬욱, 정서경, 최인 3명의 작가가 에밀졸라의 ‘테레즈 라켕’을 읽고 얻은 영감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다. 하지만 이는 ‘영감’을 받았다는 것 뿐, 박찬욱이 작가 에밀졸라에게 송구스러운 마음을 가질만큼 그와 관련성은 미미하다.

작품 속 남자주인공 ‘상현’은 비밀리에 진행된 백신개발 실험에 마루타로 참여한다. 그 와중에 바이러스 감염으로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정체불명의 피를 수혈받아 살아나지만, 뱀파이어가 된다.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온 몸에 수포가 번지고 햇빛을 보면 타들어가는 상현은 피를 구하기 위해 원치않는 살인을 해야만 하게 된 것이다.

흡혈귀가 된 상현은 어린시절 친구 강우의 아내이자 누이이기도 한 아내 태주에게서 피의 냄새로부터 시작된 끌림과 동시에 억누를 수 없는 성적욕망이 일어나고, 늘 남편이자 오빠인 강우에게 불만족스럽던 태주는 상현에게서 성적 만족감을 느끼게 되어 상현과 태주는 끊임없이 섹스를 나눈다. 상현은 신부라는 굴레를 벗어던져버리고 끊임없이 태주의 몸을 탐하고 태주를 자신이 구원해주리라는 마음까지 먹게 된다. 태주는 상현의 초인적인 능력을 이용해 강우를 죽이자는 제안을 하고... 강우를 살해하게 된 상현과 태주는 피가 필요하다는 핑계로 말미암아 연쇄적인 살인을 저지른다. 작품의 끝부분에서는 상현과 태주 모두 삶을 포기하고 떠오르는 태양 앞에서 온 몸이 타들어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박찬욱의 이번 작품 역시 내가 이해하기엔 다소 난해하고,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모호하기 짝이 없을 뿐 아니라 불쾌함에 치를 떨어야 했다. 문화·예술이란 분명 인간의 기쁨, 슬픔, 분노 등은 물론 모든 인간의 감정을 다루어야 한다. 이에 박찬욱은 인간의 ‘불쾌감’조성에 있어서는 어떻게 이야기를 꾸리고 플롯을 짜고, 화면의 색을 채워야 하는지를 분명히 아는 천재적인 감독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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