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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년 전 악녀일기가 발견되다 ㅣ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6
돌프 페르로엔 지음, 이옥용 옮김 / 내인생의책 / 2009년 5월
평점 :
책의 선전 문구에 '유시민'의 추천사가 들어있어 내심 딱딱한 인권존중 논리를 앞세운 지루한 책이 아닐까 상상했었다. 그런데 왠걸, 비교적 얄팍한 책의 두께에 산문시를 연상케 할 정도로 짤막짤막한 에피소드형의 구성... 집중해서 속력을 내면 한 30분 정도면 금방 읽어내릴 수 있을 정도의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다 읽고 났을 때 그 묵직한 반성의 상념이 한동안 계속된다는 것이다.
작품은 동화라 해도 좋을만큼 단순한 스토리에, 이야기 속 주인공 역시 12살 먹은 백인 여자 꼬마아이다. 그야말로 부잣집 딸인 마리아는 생일선물로 흑인 노예 '꼬꼬'를 부모님으로부터 받게 된다. 이 선물 과정에서부터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조그마한 몸집의 '꼬꼬'의 첫등장이, 그야말로 무슨 맛난 음식이나 멋있는 물건을 선물하는 것처럼 커다란 그릇에 뚜껑이 덮힌 상태였던 것이다. 물론 그 뚜껑 속에 흑인 노예 꼬꼬가 들어(?)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고작해야 자신의 또래나, 자기보다 어린 나이로 보이는 꼬꼬의 그런 등장에도 마리아는 그 노예가 불쌍하다거나,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흑인노예는 어린 꼬마소녀 마리아의 눈에 그저 애완동물 정도로 밖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마리아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가 흑인노예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며 자랐기 때문에 하나도 어색하거나 거리낄 것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마리아의 부모인 백인 부부는 흑인 노예들을 말 그래도 막 부리는 모습을 보인다. 마리아의 엄마는 기분 내키는 대로 노예들에게 채찍을 휘둘러 때리고, 동네 부인들끼리 모여앉아 수다를 떨 때에도 각자 한마리 키우는 강아지 쯤으로 생각하지 않고 대화에 껌처럼 씹어댄다. 마음에 들지않는 노예는 서로 떠넘기는 모습까지 보이며 노예시장에 팔아버리고 새 것으로 사오면 그뿐이라는 식이다. 거기다 마리아의 아빠는 노예를 성적 노리개 쯤으로 생각하여 예쁘장한 여성노예를 건드려 집으로 데리고 들어오기도 한다. 마리아의 엄마는 이에 분을 못 삭혀 구둣발을 휘둘러 그 여성 노예의 얼굴에 아주 큰 상처를 내지만, 마리아의 아빠는 화를 내기는 커녕 상처나고 긁혀버린 물건쯤으로 여성노예를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이같은 부모 아래서 부족함없이 크는 마리아는 양심의 가책 따윈 느끼지 못한다. 그저 가슴이 나와 빨리 여자가 되길 바라는 꼬마아이, 사촌오빠 루카스와 결혼하고 싶은 철없는 꼬마아이일 뿐이다.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새로 들여온 여자 노예가 임신한 아이의 아빠가 바로 루카스란 사실에 경악하는 마리아이지만 이마저도 그냥 그 여자노예에게 있는대로 화풀이를 해대고, 새로 들어오는 가정교사에게 공부를 배울 미래에 다시 가슴 설레어 하는 단순한 여자애다.
특이한 것은 이 작품에서 이러한 백인 부부의 행동에 태클을 걸거나, 이런 식으로 흑인들을 대하면 안 된다는 둥,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정도의 훈계조차 하는 캐릭터가 없다는 것이다. 마리아에게도 그런 식으로 흑인 노예들을 대하면 나쁘다고,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따끔하게 조언하는 인물은 없다. 이 작품은 그저 그러한 백인 부부와 그 자식의 행동을 보여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묵직하게 느낄 수 있다. 흑인들의 삶의 애환을 말이다. 가타부타 인권존중 논리를 역설하는 책들보다 이 책은 훨씬 더 강력하게 인권존중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정말로 잘 쓰여진 작품이다. 서점에 들러 쉽게 읽어내릴 수 있을지라도 이 책을 그냥 그 자리에 놓아두고 오긴 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