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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법칙 - 그랑 셰프 피에르 가니에르가 말하는 요리와 인생
피에르 가니에르.카트린 플로이크 지음, 이종록 옮김, 서승호 감수 / 한길사 / 2017년 1월
평점 :
품절
프랑스 유명 셰프와의 대담집이다.
출판사에서 책을 내놓는 것에서도 징후와 시대적 맥락이 있다.
왜 지금, 요리사 책일까.
출판사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요리도 잘 모르고, 더구나 고급 레스토랑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은 책.
손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의도를 알려면 읽어야 되지 않겠나.
막연하게 요리 사진과 공감가지 않는 값비싼 식재료, 요리 이야기들이 잔뜩 들어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저장고에 묵혀놓은 와인처럼 서가 밑에 누워있던 책을 꺼내 첫 장을 넘겨보았다.
"저는 이 책이 유명 인사의 자서전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해요. 독자들에게 정말로 쓸모있는 책, 그저 닮고 싶은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에게 어떤 증거를 보여주는 책이 됐으면 좋겠어요. 제 나이쯤 되면 인생과 사상을 책을 담는 작업이란 마치 인생의 마지막 막을 내리는 느낌이에요. 이제 다음 세대에게 남겨줄 것들을 마무리해야죠."
나는 그가 레시피를 소개하거나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해 대담을 한 것이 아니라
인생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말을 걸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막연히 가졌던 선입견을 말끔히 지워버렸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준비를 하고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는 살면서 세 번의 결혼과 파산, 그리고 성공을 경험했다.
그는 유쾌한 사람도 아니고 삶에 활기를 주는 인물도 아니다.
무척 고독하고 어두운 사람이었다.
"제 인생에서 의미있는 단어를 꼽으라고 한다면 ‘우울’일거예요. 우울은 일상에서 느끼는 허무함과 불안정감 그리고 사물이나 존재 가치에 대한 일종의 자각적인 의식이었어요."
그는 우울이라는 감정을 이렇게 풀어놓는다.
감정의 마이너스는 구덩이에 빠져 한참을 기어올라와야 할 나락이 아니라
한번 튕겨 올라오기 위한, 스프링의 응축이었다.
그에게 우울은 질곡이기도 했고 상처이기도 했지만
삶의 주름이기도 했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삶의 과정이었다.
그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말한다. 그에게 과거는 공허하고 구멍이 뚫린 느낌이었다.
그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장인이며 무던히 나아가는 무소였다.
그는 무언가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사람이었으며 뭔가를 만들려는 욕구가 강했다.
때로는 사용하지도 않을 재료들을 충동적으로 구매하는 일도 있었으며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과의 충돌을 겪으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충동적 욕망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그 유별난 행동이 예술적인 방향으로 기울 때까지 허공에서 외줄을 타며 앞으로 가야 한다."
그는 요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도우며 일을 배웠을 뿐이었다.
그러다
열여섯살.
친구들과 놀다가 냉장고에서 아무거나 집어서 만들어준 요리에
친구들이 뜻밖의 칭찬을 하면서 그는 요리라는 행위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는, "여기서 감정의 흔적들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몇가지 원칙들이 있다.
생각이 많아지면 요리가 위태로워진다고 말한다.
그는 재료의 본질을 지키면서 기준점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 자체, 식재료의 개성을 존중한다.
그는 순수함과 단순함을 강조한다.
그의 메뉴는 현학적이거나 문학적이기보다는 적나라하다.
게르니카 고추를 넣고 끓인 대구 쿠부이용 수프
시금치로 감싼 게살
허브 버터에 서서히 익힌 두툼한 광어
그의 철학이 묻어나는 메뉴이름이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직관에 의한" 요리를 하는데,
그는 조리 중에 맛을 보지 않는다.
베토벤이 청각을 잃고도 교향곡을 썼듯이
그는 사고하면서 음식을 음미한다.
그의 요리는 유기적 구조물이다.
요리들이 논리적이고 감성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정해진 레시피가 없고 그때 그때의 영감으로 접시 위에 감정을 담는다.
모든 예술가가 그러하듯, 그의 창조성과 상상력은 다른 영역들과의 소통에서 탄생한다.
그는 영역을 가리지 않는 독서가이며, 미술에도 꾸준히 관심을 갖고 있다.
또, 콜레주 드 프랑스의 화학 교수 에르베 디스와도 관계를 가지며
그와 함께 요리와 화학을 교접하는 대화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하나같이 모르는 식재료들,
어떤 맛일지 감도 오지 않는 처음 보는 음식들,
몇 점 간신히 올려진 접시들을 보며 군침이 돌 일은 없었다.
감정이 차려진 식탁 앞에 앉아
마음으로 그 맛을 음미해볼 수 있는 레시피에 책 읽는 내내 즐거웠다.
거장의 식탁은 역시나 진수성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