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의 길 - 우리 함께 걸어요
안희정 지음 / 한길사 / 2017년 2월
평점 :
품절


안희정 도지사가 그간 SNS에 올렸던 글들을 중심으로
대선출마선언문, 각종 공식선상에서 했던 연설문 등을 엮은 책이다.

SNS에 올렸던 글들이다보니 운문처럼 짧막한 문장마다 줄을 바꾸고 문단을 나눠놓았다.
사실 글이라기보다는 말을 글로 옮겨적은 것들이다.
정치철학보다는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글이 많고 일상언어가 많다. 
기도하는 심경으로 그날그날 적은 저의 자성록”이라고 밝혔다.
비문들도 간혹 눈에 띄는데, 일상언어라서 비문이 충분히 발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하필 대선출마선언문에서 발견된다.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는 대통령이 헌법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사태는~때문입니다'로 주어-술어가 호응하지 않는다.
'사태는 ~때문에 발생했습니다.'라는 식으로 써야 했다.
대선출마선언문을 꼼꼼히 검토해주는 참모가 없는 듯하다. 

이 책은 안희정의 본질을 보여주기보다는 안희정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느낌이고
인터넷만 뒤지면 찾아볼 수 있는 글들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만약 나라면 돈받고 판매하기에 손이 부끄러울 것 같다.

감상을 적을까 말까 여러번 고민했다.
이 책은 정치인의 언어로 쓰여졌다.
직역보다는 의역이 필요하다.
정치인의 언어란 늘 애매한 구석이 있어서
말실수를 해도 빠져나갈 변명거리가 있으며
좋은 말을 해도 오해가 생기곤 한다.
내가 이 책에서 안희정의 언어를 100% 이해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다만, 나 역시 한 명의 유권자로서
그의 말을 내 선에서 이해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여 글을 남긴다.


목차를 보면 5개 장으로 분장되어 있다.
제목만 보면 1. 우리 함께 바꿉시다. 에서는 '교체'를 말하고
나머지 2장부터 5장까지는 모두 '통합'이 주제이다.
그가 말하는 큰 메시지는 교체와 통합이다.
교체는 모든 후보가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키워드이다.
결국 이 책에서 그의 메세지는 통합에 방점이 찍힌다.
통합을 중심으로 이 책을 분석해보겠다.
 
그의 논리구조는 이렇다.
민주주의를 바로 세워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통합이 필요하다.
통합을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하다.
올바른 대화를 위해서는 상대방의 말을 선의로 받아들여야 한다.
단순화하면, '선의 → 대화 → 통합 → 민주주의' 이다.
     

1. 선의
 
최근 논란이 된 선의.
그가 말하는 '선의'는 2015년 3월에 쓴 글에서도 찾을 수 있다.
"모든 것을 선한 의지로 받아들이자." 
적어도 그가 대선을 앞두고 보수층을 끌어들이기 위해 즉흥적으로 만든 말은 아니다.

그는 다른 글에서  경쟁의 원칙을 10개 나열하는데,
그 중 두 번째가 "모든 비판과 주장을 선의로 받아들인다."이다.
많은 분들이 비판하지만, 나는 그의 선의 발언이 전적으로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선의'는 토론의 기본 전제조건이다.
잘못된 토론자세 중 하나는 상대방의 발언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상대방을 정신분석하는 자세이다.
가령, 18세 선거연령조정을 할 때, 그것의 논리를 따지지 않고,
'니네한테 유리하니까 주장하는 거 아냐?'
이런 식으로 의도부터 불순하게 여기고 토론을 하는 태도이다.
모든 일에 이렇게 상대방의 의도부터 의심하고 시작하면
토론이나 대화가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겠다.
법정에서 말하는 '무죄추정의 원칙'과도 일면 상통한다.

다만 합리적 의심일 때는 문제가 다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를 치겠다고 조선에게 길을 내어달라고 하는데
이걸 선의로 받아들여서 "OK!" 할 수 있을까.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이미 삼국지연의를 읽었을 것이고,
주유가 제갈량한테 했던 그 계책과 주유의 죽음까지 다 알고 있었을 텐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눈에 보이는 뻔한 계책임을 알고 있을 것이며,
이것은 거부하라고 던진 침략빌미일 뿐이었다.
이런 경우까지 선의의 원칙을 고수하기 힘들다.
선의는 원론적인 태도이지 모든 상황에 적절한 것은 아니다.
박대통령에 대한 여러 가지 혐의들, 구체적 정황, 증인, 증거가 속출하는데
선의로 했을 거라는 추정은 실수다.
'통, 협치, 연정 등 통합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그저 이것에만 몰두한 나머지 '합리적 의심'까지 배제해버린 것이다.     
     

2. 대화
 
장인어른과의 일화를 소개한다.
안지사 장인어른은 오래전부터 여당을 지지하시는 분이다.
사위가 참여정부에서 중책을 맡고 있을 때도 그와 상반된 정치색을 유지하셨다.
그런데 안지사의 논리가 참 해괴하다. 
장인어른은 625전쟁을 겪은 사람이라면서,
그를 위로하고 공감해야 한다고 말한다.

, 그는 정치색이 다른 사람을 이성과 논리를 갖춘 인격체로 놓고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이런 아픔을 겪어서 감정적으로 엉킨 사람들이니 우리가 위로해주자는 발상이다.
 이게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식 대화이다.

결국 그의 민주주의는 이런 식으로
융합이 아니라 통합, 통합이 아니라 봉합으로 격하된다.
JTBC 뉴스룸에서 "제 말이 어렵습니까?”라고 반문하는 안지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장안어른을 대하듯 국민들의 이해력을 낮춰보는 시각.
대화? 이게 대화인가.
 
다른 글에서,
"대화는 선과 악이 아니라, 서로 다른 위치에서 서로 다른 진실을 보고 인정할 때 시작"한다고 말했다.
,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라 선과 선의 경쟁이라는 지극히 건전한 민주주의적 시각을 보였다.
그런데 곧이어 나오는 문장은 모순덩어리다.
"정의의 승리는 실력으로 제압하는 일이 아니다."
앞 문장에서는 '선과 선의 경쟁'을 말해놓고
바로 다음 문장에서 '정의와 불의의 대결'로 풀이해버렸다.
무엇이 본심인가.

     
3. 통합
        
그는 비교에 대한 생각을 밝힌다.
"비교는 사람을 죽인다"며 "우리의 인식은 차별과 비교 속에서 대부분 형성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격에 대한 비교와 정책에 대한 비교는 다른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비교자체를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람을 비교대상으로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는 '통합' 외에 모든 가치를 이렇게 반쪽짜리로 만든다.

다른 글에서,
"다름보다는 같음을 이야기"해야 한다며, "배척하기보다는 서로를 가슴에 품어 안읍시다."라고 말한다.
그는 '다름을 이야기 하는 것'을 '배척하는 것'으로 비약한다.
다름을 말하는 게 왜 배척인가? 
민주주의는 같음의 철학이 아니라 다름의 철학이다.
그는 이렇게 또 통합의 이미지를 구축하려 든다.
하지만 그는 통합을 '동질성'으로 오해하고 있다.
통합을 동질성으로 이해하면 사회의 균질화로 나아간다.
그의 관점에서 작은 개울 하나만 넘으면 전체주의의 영역이다.
 
그가 말했던 '대연정' 역시 통합의 이미지와 겹친다.  
그는 대연정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자 '협치의 차원'에서 말한 것이라 해명했다.
그런데 협치와 대연정은 다른 문제이다.
상대방과 대화하겠다는 의지의 영역과 연합하겠다는 실천의 영역을 혼동한다.
협치가 왜 대연정이라는 정치적 기술로 나타나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단순히 정당정치의 협치를 강조한 말이었다면,
그가 말한 저 대연정은 '협치하겠다는 비유'이지 실제로 대연정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연정이라는 말을 쓰면 안되었다.
    
그는 통합을 이야기하면서 개항기 때의 분열을 말한다.
조선 몰락의 원인을 지배층의 분열로 규정한다. 이른비 식민사관에서 보이는 당파성론이다.
식민사관과 비슷하다고 해서 매도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을 몰락으로 규정한 시각이 문제이다. 
분열은 결코 문제가 아니다.
어느 국가, 어느 사회든 분열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나.
지금 오로지 한 마음 한 뜻인 나라가 있나.
분열되지 않은 나라가 있으며 사회가 있나.
일당독재가 아니면 분열은 무조건 가시적으로 확인되며,
지어 중국이나 북한같은 일당독재 국가에서도 분열이 존재한다.
분열이 망국의 계기라면 1년에도 두 세번씩 지구상 모든 나라들은 붕괴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다름을 인정하는 체제'라서 갈등과 분열은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또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서로 겹칠 수 밖에 없다. 
분열과 갈등은 무조건 발생한다.
결국 문제는 분열과 갈등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효과적으로 조율하고 융합하는 민주주의적 시스템이 있는가 없는가이다.
안지사는 기본적으로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 대화를 끌어들는데,
그에게 갈등은 치유의 대상일 뿐이다.
갈등과 분열은 자연발생적인 물줄기처럼 억지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그것이 자유로이 움트게 하여 다스리는 게 효과적이다.
이미 우왕의 치수에서 알 수 있지 않는가.

우리는 분열과 갈등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만큼 발전을 이룬 것이 아니라.
그 분열과 갈등 덕분에 이만큼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이 책에서 보이는 안지사의 통합은 앞뒤를 보지 않는 근본주의이다.    
     

    

4. 민주주의
 
그가 헌법 개정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지방자치와 직접민주주의'를 지향한다.
또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여당을 지배하지 않을 것이며
의회의 입법 권한을 확대하겠다는 생각에도 동의한다.
"개헌에서는 국가에서 시민주도로
중앙주도에서 지방분권으로
기업주도에서 민주주의 시장경제로"
라는 기본 구도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이 길지 않는 책에 왜 이리 앞뒤에 모순이 많은지.
그는,
"민주주의는 법치입니다.
민주주의는 대화입니다.
민주주의는 협치입니다."
라고 규정한다.
민주주의를 줄기차게, 수없이 말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어느정도인지 모르겠다. 
민주주의는 법치가 아니다.
법치가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자유주의가 법치를 통해 민주주의에 족쇄를 채운 것 역시 사실이다.

또, 그는 '직접민주주의'를 말하지만
이에 대치되는 주장을 아무런 장치도 없이 서슴없이 쏟아낸다.
그는 주권자의 권한을 위임받는다는 점을 들어 선거를 "신탁"이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선거는 위대한 신탁"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나라가 발전할 것이다고 말한다.
아예 잘못된 생각이다.
직접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면,
선거는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위임이 아니라 대리이다.
국민들은 정치인에게 권한을 일체 양도하는 것이 아니라,
권한을 대리하게끔 임명하는 것이다.
국민의 주권을 위임한다는 생각은,
곧바로 그가 앞서 말한 '직접민주주의'와 상충한다. 
그가 말하는 직접민주주의는 이렇게 이미지, 허상일 뿐이다.  
    
그는 세월호를 슬쩍 들여와
"가만히 있으라"를 인용하며 중앙집권시대의 지침이라고 규탄한다.
그런데 그는 다른 글들에서,
자신은 "직업 정치인으로 일관되게 살았고 훈련받았다"고 말하며
"당이 감옥에 가라면 갔다."라고 말한다.
이 말을 뜯어보자.
당이 감옥에 가라고 해서 갔다는 말은,
자신은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될만한 입장이었고
따라서 감옥 갈 이유가 없었지만
당이 (부당하게) 가라고 했고, 나는 그에 따랐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당을 사랑하고 정당정치를 신봉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중앙집권시대의 지침을 따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나는 사드에 반대하지만 이미 결정된 것은 무를 수 없다.'는 입장도
'당이 가라면 감옥에 간다'는 생각과 일치한다.
아들을 군대에 보내며 쓴 글을 보면,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 심정을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소출물을 국가에 바치며" 라고 표현한다.
이 부분은 솔직히 소름이 끼쳤다.
자기 자식을 '소출물'로 표현한 것도 충격적이었고,
'국가에 바친다'는 표현에서는 일제 군국주의가 떠올랐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는 기독교적 경건함까지 보인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국가가 시키면 우리는 뭐든 해야한다.
하기 싫어도, 하지 않을 상황임에도 우리는 국가가 하라면 해야 한다.

    
5. 기타
 
(1) 그는 작은 정부를 주장한다.
안희정의 정부는 규제와 감독만을 담당할 예정이다. 
    
(2) 우리는 행복이라는 희망을 갖고 산다고 말하는데,
그 희망을 놓치지 않게 하는 것은 "첫째가 사랑, 둘째가 감사"라는
선문답을 적어 놓았다.
정치인의 글인가 목회자의 설교인가?
 
(3) 인공지능의 시대를 언급하며 점점 일자리가 줄어든다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결코 그런 미래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근거로, 노동없이 인간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가 생각하는 인공지능의 시대는 단지 산업구조와 일자리 방식의 변화가 발생할 뿐이다.
이 말도 근거가 취약하다.
노동없이 인간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은,
인공지능의 시대가 '오면 안된다'는 당위를 주장할 수는 있어도,
그런 세계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담아내기에 부족하다.
그가 어떤 예측을 하든 자유이나,
정치인이 커다란 시대적 패러다임을 그저 덮어놓고 안이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4) 인권에 대한 논리도 사상누각이다.
그는 아주 잠깐 인권을, 그것도 '천부인권'을 언급한다.
천부인권은 하늘이 인간에게 인권을 부여했다는 사상인데
그 하늘이란 것이 무엇인가.
만약 하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겐 인권의 근거가 사라지는 것이다.
요즘 하늘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다.
정치인이라면 인권의 논리가 명확해야 한다.
큰 고민없이 생각하는 것 같다.
 
(5) 그가 새로운 정치를 말하는 부분이 있다.
국민은 새로운 정치를 원하는데 그 새로운 정치란 "불신받지 않는 정치"라고 말한다.
불신받는 이유는 "국민이 처한 힘든 현실과 무관해 보이는 싸움판 정치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여기서 또 한번 그가 앞서 말한 '직접민주주의'와 대치된다.
보라, 그가 말하는 새로운 정치는 결국 국민에게 '보여지는 정치'이다.
낡은 정치는 싸우는 정치, 새정치는 안싸우는 정치일 뿐이다.
낡았든 새것이든, 결국 정치에서 국민은 여전히 구경꾼에 불과하다.
국민은 국정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이다.
고작 그게 새정치인가?
그가 직접민주주의를 언급했으면
그의 새정치는 구경꾼 정치가 아니라 참여 정치를 말해야 하는 것이다.
앞 뒤 말들이 논리적으로 모두 엉킨다.
       
(6) 민주주의 선거와 다수결 제도가 대한민국의 작동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선거와 다수결 제도가 폭력질서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하고 한다.
"민주주의 제도가 효율적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 수 있음을 보여주자"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인식과 "~하자"는 주장은 아무나 한다.
    
(7)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견해의 평화적 경쟁체제라고 규정하는 부분이 있다.
이 생각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그가 앞서 말했던 것들과 대치된다.
이쯤되면, 그는 민주주의를 온갖 그럴듯한 말로 상황에 따라 갖다 붙이는 것처럼 보인다.


6. 결론

이 책은 (통합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책이지
 대통령에 출마한 사람이 국민에게 정치철학을 검증받으려 만든 책이 아니다.
길지도 않는 글, 글보다 여백이 더 많은 책에서 논리의 일관성을 갖추지 못했다. 
이렇게 독자들에게 오해를 줄 거라면 이런 식으로 책을 엮지 말아야 했고,
제대로 본인의 정치철학을 밝히려거든 꼼꼼하게 책을 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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