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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이다. 2015년이 딱 세 달 남았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쌀쌀해지며 마음이 쓸쓸해지면 후회가 밀려온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이렇게 또 일 년이 가 버리다니. 무언가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고, 무언가 했더라도 후회하는 게 삶일지라도 말이다. 다행인 건 진정 소설 읽기 좋은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은 90 정도의 후회로 만들어지니 더 좋다. (나머지 10은 뭘까?)

 

1. 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올해 이보다 더 중요한 소설은 출간되지 않을 것", "걸작", "이전작과 전혀 다르면서도 가장 이시구로다운 작품"과 같은 말들이 <파묻힌 거인>을 수식하고 있다. 아마도 책을 두르는 띠지에 큼직하게 적혀 있겠지. 이시구로의 작품을 한 권만 읽어 보았더라면 그 말에 반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호들갑이 아니니까. 이번엔 심지어 고대 잉글랜드 평원이 무대이며, <반지의 제왕>을 연상시키는 판타지 모험담의 틀을 빌려 이야기를 풀어낸다고 한다. 2차 대전 거대한 저택을 지키던 집사의 목소리가 이번엔 또 어떤 형태의 상실로 달라졌을지 어떻게 마음을 울릴지 궁금하다.

 

2. 어떤 날들 / 앤드류 포터

 

앤드류 포터의 단편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흥미롭게 읽었다. 표제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도 좋지만, 나는 <폭풍>의 이미지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옛 집에 오랜만에 모인 가족의 심리, 그러니까 서먹함과 절대 해결될 수 없는 갈등과 좋은 시절만 고집하는 답답함을 섬세하게 그려낸 점 때문인 것도 있지만 결말 때문이기도 했다.

 

잠시 나는, 어린 시절 그곳에 앉아 아버지가 일터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지난날의 늦여름 오후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언덕 아래로 아버지의 자동차 전조등 불빛이 보일 때 누나가 미소 짓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기쁨처럼 보였다. 그 불빛, 자동차,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안다는 그것은. -251p

 

어떤 날들에서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각자 독립해 다른 도시 혹은 다른 집에 살고 있는 성인이 된 아들과 딸, 이십 년 이상을 함께 살았지만 뒤늦게 이혼을 결심한 부부의 이야기. 단편에서 보았던 가족의 이야기가 장편에선 어떻게 그려질까. 평범한 이야기를 평범하지 않게 쓰는 게 이 작가의 장기 아닐까.

 

3. 별도 없는 한밤에 / 스티븐 킹

 

<별도 없는 한밤에>에는 세 편의 중편과 한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고백하자면 소설을 너무 많이 쓰시니까 그리고 또 너무 기니까 스티븐 킹의 소설을 제대로 읽은 게 없다. (지금도 내 책장엔 한 번도 펴 보지 않은 스티븐 킹의 <언더 더 돔> 3권이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다 아, 독자에게 죄책감을 유발하는 작가여.) 중편과 단편이라면 도전해 볼 만 하다.

 

4. 사십사 / 백가흠

 

아, 사십대라니. 생각도 하기 싫지만 가는 세월 잡는 힘이 내게 있으랴. <사십사>의 단편집에는 '어쩌다 어른'이 된 우울한 사십대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고 한다. 어떤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지 미리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백가흠 작가가 빚어낸 이야기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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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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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삶을 비틀거리게 만드는 순간은 문득, 우연한 사건에 의해 발생한다. 그 순간을 마주할 당시에는 앞으로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상처는 명확해지고 깊어지며, 그래서 앞으로 향하려는 삶의 다리를 잡아 채고, 비틀거리게 만들며 뒤를 돌아보게 한다. 앤드루 포터의 단편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는 열 가지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절반이 넘는 이야기가 십년 쯤 전의 과거를 회고하고 있는 건 삶의 이런 속성에 관심을 두고 있는 작가에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느리고 잔잔하며, 이야기를 서술하는 '나'는 한결같이 사건의 직접적 당사자가 아니라 사건 안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관찰자일 경우가 많다. 갈등은 에둘러 표현되고, 가장 중요한 장면은 끝내 보여지지 않는다. 하, 답답하네 거 참 이라는 말이 나올만큼 등장인물들에겐 비밀이 많고, 생각이나 말은 발화되지 못한다. 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관계에 대한 정확한 기록법일지도 몰라, 한 줄 한 줄 읽으며 한숨을 쉬고 눈물이 핑 도는 것과 같은, 감정의 동요를 겪는다. 실제로 '슬펐다', '울었다' 라는 말로 표현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열 편의 이야기 중 가장 좋았던 건 단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었다. 부부에겐 상대에게 결코 말하지 못할, 아니 말해서는 안 될 비밀이 있는데, 그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공공연하게 눈치채고 있지만 발화되지 못하는 사랑은 두 사람 모두를 위태롭게 만들고, 뒤를 돌아보게 한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채워줄 수 있다거나 당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 - 이 두가지가 사실상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추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나는 콜린과의 관계에서 그런 식의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나는 다만 그가 나의 일부, 나의 중요한 일부를 채워주고 있고, 로버트 역시 똑같이 중요한 나의 또 다른 일부를 채워주었다고 믿을 뿐이다. 로버트가 채워준 나의 일부는, 내가 생각하기론, 지금도 콜린은 그 존재를 모르는 부분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만큼 쉽게 파괴도 할 수 있는 나의 일부다. 그것은 닫힌 문 뒤에 있을 때, 어두운 침실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제일 편한하게 느끼는, 유일한 진실은 우리가 서로 숨기는 비밀에 있다고 믿는 나의 일부다.

 

이렇게 비밀을 품고 있음에도 관계가 깨지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 건 상처와 고통을 상대에게 전가하지 않는 태도 덕분이다. 하지만 '비밀과 죄의식을 발설하지 않는 게 상대에 대한 배려'라는 해더의 확신이 무척이나 슬프게 느껴지는 건, 혼자 끌어안고 삭혀야하는 상처가 앞으로도 얼마나 해더의 발을 잡아챌지 알 수 없어서이기도 하다.  

 

죄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연인들에게 이런 비밀을, 이런 진실들을 말하는 이유다. 이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떻게든 일말의 죄의식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는 추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죄의식은 자초하여 입는 모든 상처들이 그러하듯 언제까지나 영원하며, 행동 그 자체만큼 생생해진다.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그것은 다만 모든 이들의 상처가 될뿐이다. 하여 나는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따. 그 역시 내게 그러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상처를 다른 이에게 전가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또 다른 단편 <폭풍>에서도 이야기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한다. 이는 자기 상처를 결코 드러내지 않겠다는 자존심일 수도 있고, 자기 방어일 수도 있다. 누나는 결혼을 약속한 리처드와 여행 도중 헤어지고 집으로 오는데, 동생인 내게 자기가 리처드를 버려두고 왔다고 말한다. 어머니와 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누나를 나무라도, 누나는 끝끝내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가족의 상처는 서로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상태로 깊어지기만 해 왔다. 그 상처는 사실 아버지의 죽음에서 시작됐다.

 

남은 오후 시간, 나는 내 방에서 우리 가족의 느리고 꾸준한 종말의 과정을 반추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구름이, 정확히 우리 집만 한 크기와 모양의 구름이 우리에게 드리워진 것 같았고, 우리 미래를 엮어낼 복잡한 요소들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달라질 것 같았다. (중략) 삶은 계속됐지만 달라졌다. 더 물러졌고 지루해졌다. 즐거움은 덜해졌고 고통은 그 구렁텅이의 깊이가 한이 없어진 듯하다. 그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을까 늘 경계를 해야 했다.

 

나는 <폭풍>이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느껴졌는데, 폭풍의 상태와 가족들의 감정선을 일치시켜 감정의 상태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었다. 거센 폭풍으로 전기가 끊긴 밤, 촛불을 켜고 둘러 앉은 가족의 식탁에서는 서로 영원히 이해되지 못할 말들이 서로에게서 퉁겨져 나오며, 그저 폭풍처럼 거센 감정만이 떠돌아다닌다. 폭풍이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이 가족들의 자기만의 상처는 계속되지만, "더 나쁜 일이야 있겠어?"라는 누나의 말에, 언덕 아래로 아버지의 자동차 전조등 불빛이 보일 때처럼 누나가 미소 짓는 모습에서 희망을 본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기쁨처럼 보였다. 그 불빛, 자동차,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안다는 그것은.  

 

아무래도 나는, '영원히 비틀거려리며 살지라도 이 소박한 기쁨이 있으니 또다시 새로운 하루를 맞이한다.'는 식의 시각을 좋아하는 것 같다. 또 앤드루 포터의 단편들을 읽으며 소설에서 '내적 필연성'이 왜 중요한지 깨달았다. 한 인물의 과거와 기억은, 아무리 사소한 지나침이라도 앞으로의 인생에 큰 파동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며, 인물을 입체적이며 깊이 있게 만들어 인물의 감정에 쉽게 공감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같다. 머리로는 알았지만 그의 소설들 덕분에 마음으로 깨달았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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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짐승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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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은 읽고 나면 마음이 온통 흔들려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이 그랬다. 그때 내가 죽었다면 내가 놓쳤던 것이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에 떠오른 단 하나의 답.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고. 그 말과 그 말이 내포하고 있는 광기 어린 열정이 놀라워서였을까, 아니면 '사랑'밖에 남기지 않고 돌진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아슬아슬하면서도 부러워서였을까. 가을에 찾아온 사랑 이야기는 짙은 여운을 남겼다. <슬픈 짐승>의 첫문장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시작한다.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젊었을 때는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안에 너무나 많은 젊음, 너무나 많은 시작이 있었으므로 끝이란 것은 좀처럼 가늠이 안 되는 것이었고 또 아름답게만 생각되었다. 서서히 몰락해가는 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지금 나는 백 살이다.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하면서 툭 던지듯 하는 말, 지금 자기는 백 살이라고. '나'는 백 살, 아니 어쩌면 아흔 살이 될 때까지 단 하나의 사랑의 기억, 청춘의 사랑에 대한 기억을 복기하며 살아왔다. 그러니 백 살이어도 여전히 청춘을 살고 있고, 서서히 몰락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단 하나의 사랑을 붙잡고 있다가 놓아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을 때, 다시 한 번 그 사랑을 시작부터 끝까지 복기하고 단호하게 놓는다. 독자는 더듬더듬 이어지는 나의 기억을 통해 청춘의 사랑을 똑같이 체험한다.

 

'내'가 청춘의 사랑을 시작했을 때 이미 '나'는 젊지 않았다. 중년에서 노년으로 접어드는 나이에 중단 없는 사랑 이야기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했고, 사랑의 대상은 기다렸다는 듯 '나'의 앞에 나타난다. 그건 신을 만나는 것과도 같은 체험이다. 첫눈에 사랑에 빠질 때에는 인간의 영역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운명적 힘이 작동하는 것 같다. 그 순간은 이렇게 묘사된다.

 

그 이후로 나는 이천 번, 아니 더 자주 이 순간을 체험했다. 그보다 훨씬 더 자주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는데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진 이 순간이 그것을 계속 체험하려는 제어할 수 없는 나의 욕망으로 인해 그 마력을 잃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러나 우리 박물관의 유리로 된 둥근 천장 아래 프란츠 곁에 서서 그에게 "그렇죠, 아름다운 동물이죠"라고 대답하도록 나 자신에게 허용할 때면 언제나 그때처럼 아름다운 음악이 크게 울려 퍼졌다. 빛처럼 유리 천장을 뚫고 떨어지는 것 같은 음악이 홀 전체의 구석구석에서 메아리치며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뼈대를 떨게 만든다. "하느님께 찬송과 영광을!" 천사들의 목소리가 그렇게 노래하고, 그리고 프란츠가 미소를 짓는다.

 

'나'는 동독에서, 프란츠는 서독에서 태어나고 자란 걸 생각하면 이 장면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자유 갱단'과 '스탈린 찬가'를 부르며 판자로 뒤덮어 버린 교회가 있는 마을에서 자란 '내'게 천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니 말이다. '나'는 공룡을 연구하고 싶었지만, 국제학회조차 참가할 수 없었고 공룡 뼈를 찾아다니는 일은 더더욱 허락되지 않았다. 독일이 통일이 되고 꿈에 그리던 시조새의 발자국을 보러 갈 수 있었지만, '나'는 하룻밤 사이에 꿈이 시시해져 버렸다는 걸 깨닫는다. 평생 간절하게 꿈꿔왔던 일이 실은 단체 관광객들이 아무 의미도 두지 않고 지나다니는 관광지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허망함은 어떤 종류의 것일까? 내가 북한에서 자란 친구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듯, 프란츠와 주인공 사이에는 심연의 거리가 존재한다. 프란츠나 서독 사람들이 너무나 손쉽게, 시간이 정체해 버린 장벽 뒤 야만인들의 삶으로 규정할 수 있을 만한 거리가. 기이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성격에 따라 그냥 체념에 빠지거나, 아니면 좌절을 대가로 치르더라도 두 번째 인생의 기회, 무용지물이 된 꿈을 버리고 새로운 꿈을 찾아 나섰다. '나'에게 있어서 새로운 꿈은 사랑이었다. 나에겐 청춘의 사랑이 없었다. 

 

카린과 클라우스는 학창시절부터 알던 사이였다. 그들은 내가 결코 갖지 못했던 것, 즉 청춘의 사랑이었다. 청춘의 사랑이 무엇이냐고 누군가가 물었다면 나는 카린과 클라우스라고 말했을 것이다. 청춘의 사랑은 단순히 젊은 시절에 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다. 청춘의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견주어 잴 수 있을 어떤 것도 아직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유일하게 그 사랑 자체를 위해서 존재한다.

 

'나'는 사랑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상대에 집착하고 사랑만을 위해 돌진한다. 두 사람의 미래는, 중간 중간 다양한 암시로 등장한다. 이를 테면,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로, 공룡을 연구하는 사람과 개미를 연구하는 사람의 차이로, '여기에 서 있는 것이 좋지 않다'와 같은 직감으로. '나'는 점점 더 다른 속박은 인정하지 않고, 강력한 내적 욕구만을 따르는 '짐승'이 된다. 그건 누군가는 정신이 나갔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자연적으로는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상태이다.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눈 후에는 '아주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굉음, 녹아내리는 우리의 살과 목마른 우리의 숨소리'만 남는다. 프란츠는 실제 프란츠의 이름이 아니고, '나'는 끝까지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다. 서로를 명명하지 않는 사랑은, 두 사람은 소멸되어도 사랑에 대한 각자의 규정이 개입되지 않으므로 '청춘의 사랑'만 온전히 남게 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슬픈 짐승>을 읽고 마르그리뜨 뒤라스의 <그게 다예요>가 떠올랐다. 여든 살의 뒤라스가 죽음을 앞두고 연인 얀에게 남긴 시 중 한편을 덧붙여 본다.

 

얼마 뒤 같은 날 오후

 

나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었지요.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요. 

그게 다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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