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삶을 비틀거리게 만드는 순간은 문득, 우연한 사건에 의해 발생한다. 그 순간을 마주할 당시에는 앞으로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상처는 명확해지고 깊어지며, 그래서 앞으로 향하려는 삶의 다리를 잡아 채고, 비틀거리게 만들며 뒤를 돌아보게 한다. 앤드루 포터의 단편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는 열 가지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절반이 넘는 이야기가 십년 쯤 전의 과거를 회고하고 있는 건 삶의 이런 속성에 관심을 두고 있는 작가에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느리고 잔잔하며, 이야기를 서술하는 '나'는 한결같이 사건의 직접적 당사자가 아니라 사건 안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관찰자일 경우가 많다. 갈등은 에둘러 표현되고, 가장 중요한 장면은 끝내 보여지지 않는다. 하, 답답하네 거 참 이라는 말이 나올만큼 등장인물들에겐 비밀이 많고, 생각이나 말은 발화되지 못한다. 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관계에 대한 정확한 기록법일지도 몰라, 한 줄 한 줄 읽으며 한숨을 쉬고 눈물이 핑 도는 것과 같은, 감정의 동요를 겪는다. 실제로 '슬펐다', '울었다' 라는 말로 표현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열 편의 이야기 중 가장 좋았던 건 단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었다. 부부에겐 상대에게 결코 말하지 못할, 아니 말해서는 안 될 비밀이 있는데, 그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공공연하게 눈치채고 있지만 발화되지 못하는 사랑은 두 사람 모두를 위태롭게 만들고, 뒤를 돌아보게 한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채워줄 수 있다거나 당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 - 이 두가지가 사실상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추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나는 콜린과의 관계에서 그런 식의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나는 다만 그가 나의 일부, 나의 중요한 일부를 채워주고 있고, 로버트 역시 똑같이 중요한 나의 또 다른 일부를 채워주었다고 믿을 뿐이다. 로버트가 채워준 나의 일부는, 내가 생각하기론, 지금도 콜린은 그 존재를 모르는 부분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만큼 쉽게 파괴도 할 수 있는 나의 일부다. 그것은 닫힌 문 뒤에 있을 때, 어두운 침실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제일 편한하게 느끼는, 유일한 진실은 우리가 서로 숨기는 비밀에 있다고 믿는 나의 일부다.

 

이렇게 비밀을 품고 있음에도 관계가 깨지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 건 상처와 고통을 상대에게 전가하지 않는 태도 덕분이다. 하지만 '비밀과 죄의식을 발설하지 않는 게 상대에 대한 배려'라는 해더의 확신이 무척이나 슬프게 느껴지는 건, 혼자 끌어안고 삭혀야하는 상처가 앞으로도 얼마나 해더의 발을 잡아챌지 알 수 없어서이기도 하다.  

 

죄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연인들에게 이런 비밀을, 이런 진실들을 말하는 이유다. 이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떻게든 일말의 죄의식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는 추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죄의식은 자초하여 입는 모든 상처들이 그러하듯 언제까지나 영원하며, 행동 그 자체만큼 생생해진다.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그것은 다만 모든 이들의 상처가 될뿐이다. 하여 나는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따. 그 역시 내게 그러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상처를 다른 이에게 전가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또 다른 단편 <폭풍>에서도 이야기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한다. 이는 자기 상처를 결코 드러내지 않겠다는 자존심일 수도 있고, 자기 방어일 수도 있다. 누나는 결혼을 약속한 리처드와 여행 도중 헤어지고 집으로 오는데, 동생인 내게 자기가 리처드를 버려두고 왔다고 말한다. 어머니와 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누나를 나무라도, 누나는 끝끝내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가족의 상처는 서로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상태로 깊어지기만 해 왔다. 그 상처는 사실 아버지의 죽음에서 시작됐다.

 

남은 오후 시간, 나는 내 방에서 우리 가족의 느리고 꾸준한 종말의 과정을 반추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구름이, 정확히 우리 집만 한 크기와 모양의 구름이 우리에게 드리워진 것 같았고, 우리 미래를 엮어낼 복잡한 요소들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달라질 것 같았다. (중략) 삶은 계속됐지만 달라졌다. 더 물러졌고 지루해졌다. 즐거움은 덜해졌고 고통은 그 구렁텅이의 깊이가 한이 없어진 듯하다. 그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을까 늘 경계를 해야 했다.

 

나는 <폭풍>이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느껴졌는데, 폭풍의 상태와 가족들의 감정선을 일치시켜 감정의 상태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었다. 거센 폭풍으로 전기가 끊긴 밤, 촛불을 켜고 둘러 앉은 가족의 식탁에서는 서로 영원히 이해되지 못할 말들이 서로에게서 퉁겨져 나오며, 그저 폭풍처럼 거센 감정만이 떠돌아다닌다. 폭풍이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이 가족들의 자기만의 상처는 계속되지만, "더 나쁜 일이야 있겠어?"라는 누나의 말에, 언덕 아래로 아버지의 자동차 전조등 불빛이 보일 때처럼 누나가 미소 짓는 모습에서 희망을 본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기쁨처럼 보였다. 그 불빛, 자동차,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안다는 그것은.  

 

아무래도 나는, '영원히 비틀거려리며 살지라도 이 소박한 기쁨이 있으니 또다시 새로운 하루를 맞이한다.'는 식의 시각을 좋아하는 것 같다. 또 앤드루 포터의 단편들을 읽으며 소설에서 '내적 필연성'이 왜 중요한지 깨달았다. 한 인물의 과거와 기억은, 아무리 사소한 지나침이라도 앞으로의 인생에 큰 파동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며, 인물을 입체적이며 깊이 있게 만들어 인물의 감정에 쉽게 공감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같다. 머리로는 알았지만 그의 소설들 덕분에 마음으로 깨달았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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