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노 게이치로와의 만남 행사 후기

24세, 대학 재학시절 아쿠타카와 상을 수상하며 일약 천재작가 소리를 들으며 데뷔한 한 일본의 소설가가 있다.  바로, 히라노 게이치로다. 수상작 '일식'은 무라카미 류 이후로 최초의 대학생 수상작가의 탄생이었다.  그의 이름은 무척이나 많이 들어왔다. 꽃미남 작가, 천재작가, 진지한 예술가 등이 그의 키워드 였다.
 
 이상하게 요즘엔 책을 집어들면 가장 먼저 살펴보는게 작가의 생년월일이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가는 지라, 이들은 도대체 몇살인데 이렇게 성공한거야 하고 훔쳐보게 되는 것이다.  누구는 자신보다 어린 작가의 작품은 읽지 않는다고도 한다. 일견 이해는 간다. 아마 질투 때문이리라.  어린게 얼마나 알겠어, 혹은 그래봤자 비린내 나는 치기어린 낙서정도겠지 하는 시기심 때문이기도 할테구.
 
헌데, 요즘 한국 젊은 작가들에게 참 많은 도전을 받았었더랬다. '달려아 아비'의 김애란이 그랬고, '즐거운 인생'의 전아리가 그랬었다. 20대 초반이지만 이들의 글엔 힘이 있었고, 삶의 진실이 또박하게 박혀 있었다. 그래서 소설가의 나이에 대한 편견은 애시당초 집어 던지기로 했었다.
 
그런데, 히라노 게이치로는 34이다. 동갑내기. 이상하게 동갑내기라 하니 질투나 시기보다는 그냥 동시대를 함께 살아온 정서때문인지 친근함이 더한다.
 
'일식'이라는 책은 참 오랫동안 서가에 먼지만 얹혀 있은 채 잠겨져 있었다.  슬쩍 들춰봤더니 의고체의 무거운 문장에 '장미의 이름'류의 중세시대 수도사의 철학적 고뇌를 다룬 거다.  그래도 역시 일본문학 번역의 대부 '양윤옥'씨가 손을 봐서 그런지 번역이 깔끔해서 속도감이 나긴 했다.  헌데, 끝까지 보진 못했다...
 
요즘엔 통 무거운 책은 읽히지 않는다. 히라노의 제안대로 '슬로리딩'을 통해서 봐야할 책들은 점점 멀리하게 되는데, 늘 고민이다. '도스토옙스키'전집과 '니체' '푸코' '융' 뭐 이런 책들을 쌓아놓고 언제나 보려 하지만, 늘 미뤄놓게 된다. 책을 읽는 시간보다는, 읽을 책을 고르고 모으는 시간이 배는 되니 말이다. ㅠㅠ.
 
이게 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오는 것이리라. 어쩌면 글쓰기에 대한 회피로써의 그럴싸한 변명일수도 있고 말이다.
 
하여간, 히라노와의 만남은 작가와의 만남이 언제나 그렇듯 약간의 설레임과 조금의 질투심으로 시작되었다. 기분좋은 가을바람이 파고 드는 홍대의 지하 까페에서 그를 만났다. 
  

" 웹 2.0 시대엔 개인이 다양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타자와 차이에 대한 존중이 사라진 시대가 온 것이죠.   하지만 아이러닉하게도 세상은 자본으로 단일화 되어 있습니다.   자본이야 말로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할 유일한 이데아죠.   그런데, 포스트 911 이후로 반미를 위한 반대파는 모두 처단해야 마땅할 테러집단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적이 탄생했습니다.
  다양성과 단일화,   즉 저는 웹 2.0 시대의 다양성을 지닌 개인의 동일화에 대한 이러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동안 전근대-근대-현대를 관통하는 이야기를 차례로 그려보았습니다.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말이후 에고이즘으로부터 탄생한 개인화와 분리에 대해서 말입니다."
 
- 개인은 다양한데, 세상은 단일화 되어있다는 역설!
   블로그나 까페를 보면 참 다양한 생각을 가진 군상들이 자신만의 '외침'을 하며 살아간다.
   헌데, 그들은 세상속으로 들어가면 권력과 자본이라는 이데아 앞에 '침묵'하며 버텨간다.
   외침과 침묵사이, 진짜 우리의 모습은 무엇일까?
 

 
 
" 중세 페스트 이후 기독교 시대는 몰락했습니다. 유럽은 흩어지게 되었죠.
  그래서 이들에겐 공통의 적으로서 마녀사냥이란게 필요했습니다.  이렇듯, 공동생활에서 몬스터에 대항하는 것, 즉 적과 싸울때는 하나가 될수 있으니까요. 세상은 이렇게 공통 가치관이 상실되면 적을 찾게 됩니다"   
  
- 20세기는 이데올로기가 적이었다. 매커시즘과 빨갱이 사냥으로 점철된 독재와 억압의 시대말이다.
     헌데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지금은 소비자본주의라는 유일한 가치관의 동일성 속에서,
     신자유주의와 무한경쟁의 정글속에서 자연도태자와 루저들의 양극화만 가열되어,
     부의 계급화 즉, 강남과 강북으로 대변되는 신계급사회가 도래하고 있다.
     공정택과 주경복의 대결에서 보듯, 보수와 진보의 이름을 달고 자본과 분배의 탈을 쓰고 말이다.
     뉴라이트와 아고라, 한기총과 기장, 조선일보와 한겨레, 조갑제와 진중권 ...
    이렇게 세상은 극명하게 나뉘어져만 간다.
     MB 에겐 촛불 좀비라는 적이 생겼고, 촛불들에겐 쥐박이라는 적이 생겼다.
    게다가, 우리에겐 아직 색깔론이라는 거대담론과 지역감정이라는 토착담론까지 있다.
     우리들이 뭉치는건, 올림픽과 월드컵 뿐이다...
 
 
 
 
"이렇듯 하나의 적과 마주본 개개인인 우리. 즉 테러와의 전쟁을 하며 하나되어 싸우는 미국이 탄생했죠.   인디언, 소련, 이라크, 에일리언, 화산...   단 하나의 강력하고 유일한 적에 맞써 싸우는것. 바로 헐리웃 영화의 대박 공식과도 일맥상통합니다."
 
- 요즘 헐리웃 영화의 적은 무얼까?
  300의 적은 이교도 집단. 트랜스포머의 적은 사악한 로봇군단. 다크 나이트의 적은 조커.
  냉전시대엔 헐리웃 영화도 만들어내기 쉬웠다.
  007의 적들, 람보와 록키, 프레데터의 적들 아주 쉽고 명쾌하지 않았나.
  한동안 아랍인과 테러집단에 대한 적을 쏟아 내더니 이제는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가상의 적을 만들어 낸다.
  딱히 적을 삼을 만한 이들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나 '데어윌비블러드'등을 보면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적으로 등장한다.
  미국 탄생신화의 폭력성, 허구성등을 씹어대는 자기 반영적영화가 아카데미 상을 휩쓰는 세상이 된 것이다.
  한국정부 건국의 폭력성, 친일 세력의 지배성, 레드 컴플렉스의 허구성 등을 내세운 한국영화도 곧
  각광 받는 세상이 올수 있을까?  
 
" 우리는 적이 없으면 적 같은 존재를 만들어 싸우려고 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 때문이죠. 악플러들이 '우린 하나다!'라며 뭉치는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
 
 - 요즘 정부는 아주 살 맛났다. 진보세력이 무너진 판국에 딱히 적이 없었는데, 촛불이 나왔기 때문이다.
    바로, 신공안정국이 가능한 것이다. 영원한 적일것 같았던 북한과는 대통령이 오가는 사이가 되었고, 미국과는 화해협력으로 가고 있으니 딱히 꼬집어 적으로 삼기가 껄쩍 지근했던 판이다.
    반한 정서가 가득한 중국이나, 패권주의가 부활하는 일본에게는 차마 날을 세울수 없으니 국민들에게 세우는 수 밖에 없었을 터.
     요즘 유행하는 '되고송'에 따라 불러보자.
 
     수배자들은 조계사 앞에서 잠복했다가 잡으면 되고, ~
     유모차 부대는 아동 보호법 위반으로 넣으면 되고, ~
     중고등학생 부대는 학교와 부모에게 압력넣어 해산 시키면 되고, ~
     자동차 부대는 면허 정지 처분 내리면 되고, ~
     진압거부 의경은 복무 불이행으로 영창 보내면 되고, ~ 
      말 안듣는 언론은 낙하산 사장 내리 꽂으면 되고, ~
      걸리적 대는 시민단체는 공금횡령으로 털어 넣으면 되고, ~
      진보단체들은 국보법으로 깔끔하게 넣으면 되고, ~
      네티즌들은 최진실법으로 추적해서 처벌해 버리면 되고, ~
      좌편향 교과서는 수정해서 주입시키면 되고, ~
      감시는 감청법과 유전자 은행법으로 지켜보면 되고, ~
      뿔난 국민들에겐 물가상승과 경제환란으로 정신없이 하게 하면 되고,~
      뭐든지, 생각해로 하면 되고...~~ 
 
 
" 일식에서 장송까지. 근대이전부터 근대를 다뤄왔습니다.   그 동안에 책에서 tv로 정보채널이 이동해 왔습니다.    저는 커뮤니케이션의 재료를 찾고 있었습니다.    종교논란이나 연예인의 자살등에 관한 논란에서 볼수 있듯.    일방적 정보를 tv로 부터 전달받던 우리는 인터넷이라는 다양한 각자의 정보채널로 분리되었습니다.     아주 많은 작은 세계로, 자신의 작은 자기분열을 하게 된 것이죠.    음악을 록만 들었다면, 이젠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들을수 있게 된 겁니다.    부모, 친구, 회사, 학교 등 여려개의 자신은 그때그때 달라집니다.  이런 분열로 인해서 사회는 까다로워져만 갑니다. "
 
- 앞으론 정신분열과 강박증, 우울증이 현대인의 제1 질병이 될거라 한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웹의 하이퍼 텍스트적 링크에 의한 멀티 태스킹은 이미 우리 문화가 되었다.
   아이팟으로 음악을 들으며, 노트북으로 서핑을 하면서, 잡지를 뒤적이며, 커피와 베이글을 마시며, 대화까지 하는 건 아주 평범한 일이 되었다.
 늘상 케이블의 채널은 끝없이 돌아가며, 뮤직비디오와 미드의 엄청난 커트감과 속도감, 광랜의 초고속 인터넷, 이동하며 서핑하는 와이브로, 핸드폰으로 화상통화와 서핑까지 하는 그야말로 호모 스피디쿠스라 할만하다.
   회사에선 성공을 위해 권력앞에 비굴해지고, 가정에선 가족들앞에 강해지려 애써 소통을 피하고,
   친구들과는 스트레스를 풀기위해 한없이 풀어지고, 교회에 가면 삶을 반성하며 침잠해 졌다가,
   웹에 들어와선 온갖 정보와 소통의 장에서 지킬과 하이드가 되어 선플러와 악플러를 오간다.
   그야 말로 끝없는 세포분열로 살아가는 분열적 자기 복제생산품이 되어 가는 것이다.
 
"센티멘털이라는 소설에서 현대사회를 그렸는데, 하나의 틀로 그려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작은 틀로 하나하나 그려 내보았습니다.  우연한 원나잇, 불륜 남녀, 히키코모리, 일본의 단편 하나 하나를 그려보았던 것이죠.   약간은 실험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창작을 해봤던 거였습니다"
 
- 하나의 완결된 에피소드로 구성된 미드가 영상계를 주름잡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를 받아들이기엔 관객들은 이미 너무나 세분화 되어 버렸다.
  공동의 적이 사라진 시대에 유일한 적은 나보다 자본을 더 가진자와 내 자본을 뺏으려는 자 밖엔 없을테니 말이다. 범죄 장르. 즉 사기나 강탈극이 히트할수 밖에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전 세계적인 스릴러 장르의 열풍은 바로 이것에 기인한게 아닐까 싶다.
  사기 쳐 빼앗는 쾌감을 맛 보거나, 빼앗은 범죄자를 잡아서 처벌하는 스릴을 맛보거나 말이다.
  역시, 시대를 보는 통찰력이 있는 히라노도 스릴러 로 돌아서지 않을까?
 
"문학이 인터넷 시대에 어떻게 해야 할까...  저는 최근에 글을 쓰면서 독자들의 반응을 보면서 씁니다.  아마 근작 '당신이 없었다, 당신'이 예전 방식의 창작물의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막 탈고한 '절의'라는 작품은 근작 '당신이...'에서 전단계로 실험해본 최종 나의 결과물입니다. 미스테리와 서스펜스. 즉 저도 독자들이 읽어내려갈수 있는 소설을 쓰게 된 것이죠"
 
- 아이러닉하지만, 문학과 인문학이 죽었다는 한국이 그나마 순수문학만큼은 근근히 살아남아 있다.
  장르문학의 전통이 약한 탓도 있겠지만 독자 자체도 장르문학과 함께 순수문학을 아껴주고 있다는 것이다.
  헐리웃 영화와 미드에 열광하면서도 한국영화만큼은 리얼한 정서에 기댄 한국형 영화를 원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땅에서도 로보트가 싸우고, 고대 전사가 칼질하는 한국영화가 나와 열광하려면 웹세대의 기성세대로의 등장 즈음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상 문학상이 출간되면 하나쯤 소장해 줘야 예의라는 정서가 있는 지금의 기성세대들에게는 아직도 순수문학이 효용가치가 있는 것이다.
   히라노가 장르물을 쓰다니. 과연 어떤 작품일까 사뭇 궁금해 진다.
 
 
 
" 밸런스가 가장 중요합니다.  작가로서 저는 세가지를 늘상 생각합니다.
   뭘 하고 싶은지. 뭘 할 수 있을지. 뭘 해야 하는지.  이제 겨우 이 셋간의 밸런스를 맞출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거와, 할수 있는 거는 혼자 알수 있지만, 해야 하는 지는 독자와의 관계속에서 몸소 체험해야만 알수 있는 것입니다"
 
-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와 어떤 이야기를 할수 있는가에 대한 나름의 정리는 되었다.
   하지만 역시 나도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은 아직 혼란스럽다.
   상업영화라는 지향점에서 보자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가 가장 중요할 터인데 말이다.
   일단 만들어 봐야 알수 있다는 거다. 아무리 혼자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구상만 해봤자 답이 없다는 것이다. 관객과의 소통속에서 내가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알수 있다는 것.
    가장 핵심을 찌른 멘트였다. '뭘 해야 하는지'는 독자와의 소통을 통해서만 알수 있다는 말.
   
" 예술지상주의요?   창작 태도에 있어서는 단호하게 예술지상주의라 할수도 있습니다.   최고의 완성도를 위해 그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고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죠.   허나 예술이 이 세상의 다른 무엇, 즉 사랑, 가정, 경제, 문화, 등등... 어떤 것보다 가치있다는 것엔 동의하지 않습니다. "
 
- 타협하지 않기 위해선 우선 자기 중심이 굳게 서 있어야 한다.
  이야기에 대한 중심, 가치관에 대한 중심이 서 있지 않으면 늘상 흔들리게 마련이다.
  작품을 대하는 데 있어서 예술가적 태도. 즉 최고의 작품을 뽑아내도록 전진한다라는 그의 명제가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나는 지금 타협하지 않고 있나?
 
" 슬로리딩에 반대한다구요?   그렇게 하시죠. 전 책을 읽는 부류가 세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남들에게 읽지 않았다고 하면 부끄러울듯 해서 읽는 사람.    작가와 이야기와 소통하고 싶어서 읽는 사람.    심심풀이 시간 때우기로 읽는 사람.  전 두번째와 세번째에 해당합니다. 절대로 첫번째엔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책을 아직 않읽었다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 하지도, 부채감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반복 읽기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또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말이죠. "
 
- 어쩌면 난 첫번째 리더가 아닐까 싶다.
   책을 읽는 시간보단, 읽을 책을 고르고 쌓아두는 시간이 배가 되니 말이다.
   독서가 라기보다는 컬렉터에 가까운데 이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에서 비롯되었다.
   일년에 한권의 책을 사서 한권을 읽는 것보단, 백권의 책을 사서 두권을 읽는게 독서가이다!
   늘상 책을 사모을때면 먼지가 가득쌓인 서재를 보며 에휴 이거라도 어서 봐야 하는데 하면서도,
   다카시의 말에 따라 필이 꽂히면 그 책은 기어코 쟁겨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수입의 절반 이상은 항상 책 모으기에 쏟아 붓는데, 실상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있다.
   평생 두고두고 옆에 놓고 읽어야 할 위시 리스트들은 소장해 놓고, 아직 아리까리한 신간들은 도서관에 신청해서 받아 보는 것이다.
  이것도 탐욕일 텐데, 일주일에 두권씩 신청하는것도 밀리다 보니 대여했다가 고대로 반납하고 다음 신청서적을 빌려가고 하는게 사이클이 되어 버렸다. 집이 아니라 도서관에 컬렉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면 반납일이라는 시간의 족쇄가 있어 부채감으로 읽게 되는데, 장단이 있다.
  장점은 일단 많이 읽는 다는 것, 단점은 읽고 나서 맘에 들면 아 사서 볼껄하는 아쉬움이 남는 다는 것이다.
 어쨋든 내 손에 쥐어져 집에 마실왔다간 책들도 언젠간 곧 보기 않을까 싶다. 흔적은 남아 있을테니 말이다.
  실상 이 글을 쓰는 것도, 알라딘 모임참가 후기에 올려 당첨되면 마일리지 머니를 받게 되니 책을 살수 있다는 생각에 쓴다는 걸 고백해 두겠다. ㅠㅠ.
 
"어떻게 작가가 되었는가?  어릴적  <금각사>를 읽으며 책 읽기에 빠졌었습니다.  학교는 가지만 공감을 못했고, 늘상 무거운 테마 '삶은 뭔가, 죽음은 뭔가'에 대해 고민하던 학생이었죠.  그 갭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몰랐습니다.  부자학교도 다녀봤고, 자유로운 클럽학교도 다녀봤지만 다 제겐 맞지 않더군요.  그럴때 토마스 만을 읽었습니다.  나만 인간과 사회에 갭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왜 블로그 보면 세상에서 할수 없는 말들을 하는 네티즌들이 가득하잖아요.  그렇게 차마 할수 없는 이야기를 글로 적어보자 하는 생각에서 작가가 되기 시작한것 같습니다."
 
- 왜 블로깅에 빠져들까에 대해 그리 생각해 보지 못했다.
  헌데, 막상 내가 블로깅을 시작해보니 이게 강한 중독성을 가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뭔가 가슴속에서 뭉클하고 짜릿하고 빠글빠글한 게 생기면 이렇게 풀어내지 않고는 미칠것 같아 진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생각하거나 말로 풀어내는 것보다 이렇게 글로 풀어내다 보면 확실히 내 이야기가 되어간다. 글쓰기의 효용이 여러가지 있겠지만 소통에 대한 욕구와 표현하고 픈 욕망이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금각사와 토마스 만... 아 또 보관함에 책들이 쌓이는 소리가 들린다.
 
"제 소설이 난해하다구요?  아마 난해하다면 재미없다는 말이겠죠.  재미는 독자의 자유판단입니다.  인터페이스를 연구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가 말하더군요.  인간은 '인지'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거라구요. 그래서 그 '인지'를 쉽게 개선하면 된다구 말이죠.  예술세계에서는 조금 다릅니다.  독서 경험이 적으면 읽기가 어렵고,  독서 경험이 많으면 읽기가 쉽죠.    초딩때와 지금의 '도스토옙스키 읽기'의 차이와 같기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저도 이런 문제에 고민해 봤습니다.  어쩌면 제 책을 어려워 하는 건 인지의 무리, 즉 스트레스 때문이 아닌가 말이죠.  그래서 근작 '절괴'는 읽는데 전혀 무리 없도록 창작해 봤습니다.  계속 읽고 싶은 소설이 될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었는데, 어느정도 성공했다고 봅니다."
 
-  미치너의 '작가는 왜 쓰는가'에서 보면, 소설가는 최대한 어렵게 글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그 어려운 글을 포기하지 않고 힘들여 읽어내는 독자들만이 그 소설을 읽어야 할 진짜배기 독자들이고 그들이야말고 소설을 향유할수 있는 가치가 있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어느정도는 공감하는 바이지만, 자칫하면 궤변으로 들릴수도 있는 주장이라 생각된다.
  프루스트와 타르코프스키는 분명 훌륭한 예술가 이지만 그들의 텍스트를 읽을수 있는 관객만이 진정한 관객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프랑스의 문학전통과 러시아의 영화전통이 있기에 나올수 있었던 작품일것이다.
   계속 읽고 싶은 소설. 즉 계속 듣고 싶은 이야기. 이야기꾼의 가장 기본적인 미덕인 것이다.
  아... 먼지만 쌓인 '도스토옙스키 전집'...
 
" 작가는 독자가 알고 싶다(수수께끼 풀이)라는 욕망을 가지게 만들어야 합니다.   드라마에서 중간 cm으로 긴장감을 끌어가는 것처럼 말이죠.
  또한 작가는 독가자 좆기도록 해야 합니다.   헐리웃 영화의 기본 공식이죠. 항상 좆기고, 수수께끼 풀어가는 것 말이죠.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에는 분명 뭔가가 있습니다.    전 이걸 '절괴'에 사용했죠. 성공 이었습니다.   특히 이러한 이야기의 기술은 어려운 것을 전달하고자 할때 필히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서스펜스와 미스테리. 바로 스릴러의 쌍두마차이자 이야기의 비기가 아니던가. 아 히치콕 교주님이여...
  당의정 이론. 바로 어렵고 무겁고 쓴 이야기일수록 달콤하고 쉬운 이야기에 포장해서 먹여야 한다.
   이른바 웰 메이드 스토리의 최고봉이 아닐까. 가장 단순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깊이있는 이야기를 하는것.
   고로 개인적으로 최고의 문학은 시라 생각한다.
   이야기꾼은 분명 시인의 언어를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 창작과정은 말이죠.   테마에 따라 문체나 스타일이 정해집니다.   뭔가 광택이 나는 윤기나는 원구 같은걸 떠올리며 말이죠.   새벽 6시에 일어나서 낮 12시에 일어납니다.   음악은 전혀 듣지 않습니다.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면서 스푼이 떨어지는 소리를 상상하고 싶으니까 말이죠.   소설속의 소리, 소설속의 냄새 등을 작가는 느끼면서 글을 써야 합니다"
 
- 자신만의 창작과정을 셋업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아직도 이런 저런 시간과장소방법을 해보고 있는 나로선 부러울 따름이다.
  분명 확실한건, 작가마다 글이 나오는 분위기가 있다는 것이다.
  침묵의 도서관이던, 시끄러운 까페던, 컴컴한 다락방이던 그만의 영감이 나오는 공간은 분명 있다.
  그 공간을 찾기 위해 수없이 부유하긴 하지만 그 노력은 끝없이 해야만 한다.
  대부분의 작가는 밤에 쓰지만, 새벽에 쓰는 작가도 상당수 있다. 오후에 쓰는 작가도 있고 말이다.
  역시 시간대 또만 그만의 시간대가 있는데, 개인적으론 머리가 맑게 돌아가는 아침이 잘 맞는다.
  그러나 분명한건, 언제어디서든 써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을 만드는 과정이요?  단편은 구체적으로 전체적인 구상을 정하고 씁니다.  장편은 큰 부분만 정하고 쓰면서 정해 나가죠.  '절죄'는 끝을 전혀 쓰기 않고 써 내려 갔습니다"
 
- 큰 부분을 정하는 것. 그게 이야기 만들기의 핵심인터.
   이바닥 용어로 '와꾸'를 얼마나 잘 짜느냐가 스토리 텔러의 내공일텐데, 항상 고민되는 부분이다.
   늘 와꾸만 짜다 살과 옷을 입히지 못해, 뼈대만 있는 철사아트처럼 되어 있는 내 이야기들때문이다.
   어느날 밤 꿈에 아스팔트 도로에서 널부러진 머리없고, 팔없고, 다리없고, 몸통없는 캐릭터들이 좀비처럼 부슬부슬 날 따라오며 살려달라는 꿈을 꾼적이 있다.
   아 불쌍한 내 좀비들... 지금도 몇몇의 좀비들이 모니터 밖으로 나오려 피 토하고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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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광대 2008-10-10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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