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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셀 테러 - 온라인 여성혐오는 어떻게 현실의 폭력이 되었나
로라 베이츠 지음, 성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10월
평점 :
[서평] 여성혐오적 국가장치
여성혐오에 시달리는 현 20・30대 여성들이 결혼하지 않는 것은 영리한 결정이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의 지위는 범죄에 취약하기 때문에 증오의 표적이 되기 쉽고, 여전히 만연한 가부장제의 잔재들이 흘러넘치는 까닭에 굳이 스스로 결혼이라는 불합리한 제도에 기입할 연유 따위 없기 때문이다. 나 같아도 결혼 안 한다. 당장 집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지긋지긋한 시댁살림은 말할 것도 없으며 평생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강요된 희생은 갖은 고생을 정당화한다. 물론 어머니께서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신다는 점은 의심하지 않지만 말이다. 불법촬영, 성적 대상화, 애를 낳는 기계로 선고하는 출산율 지표, 리벤지 포르노, 육아휴직 중 부당해고, 경력 단절. 사실 여성혐오라는 범주에 들어갈 요소들은 계속해서 나열할 수 있을 정도인데 로라 베이츠의 『인셀테러』에서 인셀(비자발적 독신주의자)들이 저지르는 심각한 범죄가 위의 사태들을 가로지르고 아우르고 있다.
인셀들의 행태는 이를 더욱 악화하는 데에 아주 그냥 박차를 가한다. 다만 그들이 단순히 소수의 악인이기에 여성혐오를 재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인셀의 ‘남성성’을 본성으로 치부하여 그들이 악을 저지른다고 말한다면 미심쩍은 이데올로기의 냄새를 은폐하는 것이다. “정신은 근거이기를 중단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라는 카프카의 유명한 경구는 인셀테러의 숨은 발원지를 밝혀준다. 정신이 근거가 아니라면 무근거라는 의미인데, 왜 정신을 무근거로 간주할 때 자유로워지는가. 예를 들어보자.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자는 ‘남자다움’을 강요받는다. 여기서 “남자는 평생 세 번 운다.”는 멍청한 말이 파생된다. 만약 정신이 근거라면, 근거는 결과의 원인이므로 ‘남자다움’은 태생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본성이다. “남자는 평생 세 번 운다.”는 말은 자연히 우리의 내부에서 발아된 타고난 철칙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남자다움’은 가부장제 사회가 부여한 규범이 아닌가. 이 규범은 상명하복이 절대적인 군대문화의 산물이고, 감정을 통제하여 남성을 현 사회체계에 복종하도록 가두는 노예의 덕목이다. 즉, “남자는 평생 세 번 운다.”는 한심한 말은 본성에 근거한 생득적 개념이 아닌 사회적 토대가 남성에게 부여한 이데올로기이다. 따라서 정신은 무근거일 때, 원인이 아닌 결과로 제시될 때 비로소 연막이 거둬지고 정신을 결과로 만든 원인의 발원지가 무엇인지 고찰할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셀테러의 ‘남성성’ 다른 말로 ‘남자다움’의 정신은 무엇으로부터 구성된 것인가. 여기서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개념을 끌고 오겠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AIE)’는 ‘억압적 국가장치(AE)’와 구별되는 것으로 흔히 말하는 관료기구에 해당되는 경찰・재판소・감옥・군대를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지칭한다. 종교・교육・가족・법률・정치・조합・라디오・텔레비전・잡지・문학・미술・스포츠 같은 사적 기구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속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사적인 기구로서 각자의 자율성을 보장받고 기능한다. 문제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억압적 국가장치’를 전복시켜 훨씬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가령 나치가 이 사례를 대표하는데, 실제로 히틀러는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정황 때문에 ‘억압적 국가장치’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악명높은 『나의 투쟁』이 옥중에 쓰인다. 그 이후 나치는 쿠데타가 아닌 선전기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민에게 엄청난 지지를 받고 제1정당으로 입성했다. 이는 통제를 관할하는 ‘억압적 국가장치’보다 선전기구에 불과했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강력하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인셀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마찬가지로 『인셀테러』에서 다뤄지는 ‘매노스피어(대부분 남성들도 구성된 여성혐오 집단)’는 전형적인 AIE이다. 왜냐하면 ‘매노스피어’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의존하고 있으며, 유투브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 플랫폼으로 여성혐오를 퍼트리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매노스피어’의 전략 때문에 의회에 남성우월주의 의원들이 득세하며 그들의 편의대로 법이 제정되고 제도를 개편한다. AIE가 AE의 권한을 쥐고 흔드는 셈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레드넥과 여성혐오자들을 등에 업고 세계최고 권력자인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일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매노스피어로 기능하는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 및 플랫폼들과 남성향 게임 혹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여 보여주는 각종 영화나 드라마, 포르노 영상 등을 ‘여성혐오적 국가장치’로 정의하겠다.
일반적인 남성도 여성혐오에서 자유롭고 여성혐오를 재생산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선량하고 친절하며 여성을 동등한 위치로 바라보는 괜찮은 남성도 말이다. 안타깝게도 여성혐오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사실 남성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에 별 관심없는 그저 친구나 가족 혹은 연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데에 하루를 할애하는 일반여성까지도 ‘여성혐오적 국가장치’의 재생산에 기여한다. 알튀세르의 AIE가 정치철학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까닭은 ‘의도’가 아닌 ‘효과’ 내지 ‘기능’에 주안점을 두기 때문이다. 아무리 당신이 여성혐오적 시선이 없을지라도(실은 완전한 여성혐오적 시각을 배제하기란 불가능하다) 여성혐오가 판을 치는 가운데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면 여성혐오의 창궐을 지지하는 셈이다. 당신의 ‘의도’가 단지 일상을 즐겁게 보내는 것일지언정, 그것이 여성혐오의 피해자들을 은폐하는 ‘효과’로 나타나므로 책임이 있다. 요컨대 자정이 넘도록 돌아다닐 자유가 주어지는 남성을 보고 있자면 대한민국의 치안은 안전하다는 인상을 준다.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많은 외국인들이 미디어를 통해 한국의 치안에 감탄한다. 물론 그들의 주장이 정말 단순히 치안을 칭찬하려는 순수한 ‘의도’라는 점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이 밤늦게 길거리를 활보하는 것은 여전히 범죄의 대상으로 특정되므로 위험하지 않은가. 뉴스를 보더라도 여성이 성폭행이나 살인을 당하는 범죄는 끊이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남성의 안전이 여성의 불안전을 감추는 ‘효과’로 작동하는 것이다. 개인을 떠나서, 영화나 드라마 혹은 문학도 마찬가지이다. 향토적이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서정시를 써서 미를 추구하려는 ‘의도’가 있을지라도 여성혐오로 고통받는 여성・남성의 사태를 도외시하는 ‘효과’를 발생시킨다면 그런 서정시는 여성혐오를 재생산할 따름이다. 게다가 매노스피어의 전략이 교묘하게 일상에 침투하여 우리의 무의식이 여성혐오와 뒤섞여 있다. 실제로 많은 남성・여성들이 자신의 생각과 행위가 여성혐오적이라고 인식하고 살아가지 않기 마련이다. 이미 우리의 무의식에 남성우월주의와 인종주의를 포함한 배타적인 시각이 반영되어 자기도 모르게 여성혐오를 내면화하며 이를 눈치채기란 쉽지 않다. 우리 모두가 인셀테러의 공모자임을 인정해야 한다. 특정한 악인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시스템 내부에 들어온 이상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인셀테러를 방지하거나 그에 맞서 저항하기 위해서는 ‘여성혐오적 국가장치’를 붕괴시켜 다른 ‘대항장치’로 바꿀 필요가 있다. 로라 베이츠가 제시하는 ‘상황별 보호장치(젊은 남성들이 시간을 보내는 환경에 직접 개입하여 매노스피어의 전략을 미리 방지하는 것)’나 ‘파견형 청소년 지도사 확대(실제 교육현장에 투입함으로써 학생의 여성혐오적 인식관을 바꾸는 것)’가 이 예시에 해당된다. 여성혐오는 여성만을 피해자로 만드는 게 아니라 남성까지도 여성혐오적 시선에 갇히게끔 만들어 여성을 성적인 도구로 인지하는 비인간적인 관계를 강제한다. 결국, ‘여성혐오적 국가장치’는 성별을 떠나 이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 적극적으로 투쟁할 대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