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것들의 미학 - 포르노그래피에서 공포 영화까지, 예술 바깥에서의 도발적 사유 서가명강 시리즈 13
이해완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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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떠도는 비(非)예술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은 미에 관한 것일까.
 우리는 예술을 일상에서도 흔하게 접하지만 정작 예술이 무엇인지 예술이 인간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작동하는지 둔감하다. 일반적으로 예술은 느끼는 것이라는 식으로 무마되버리곤 한다. 특히 현대미술에 관한 대중의 시선은 따갑기 그지없다. 난해하다며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대중의 의중을 살펴보면 순전히 개인 취향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그 속내에는 자신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을 향한 본능적인 거부, 반발심이 내재되어있다. 이는 예술뿐만 아니라 문화 전 영역을 거쳐 인종이나 성별, 문화권, 종교까지 범위를 확장한다. 단지 예술이 가장 만만할 따름이다.
 이런 타자의 거부가 판을 치는 가운데 예술의 범주 밖에서 맴도는 유령들은 어떤 취급을 받고 있을까. 포르노그래피, 위작, 선넘은 농담, B급 공포. 다소 불온하고 왠지 조악하며 엉성해보이는 존재들 말이다. 이해완은 이를 분석미학이라는 이론적 방법론을 통해 유쾌하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논리의 자재를 하나씩 쌓아가 근사한 건축물을 지어냈다. 이 『불온한 것들의 미학』이 그 결실이다.
 이해완의 사유의 궤적을 따라가다보면 분석미학이 이토록 매력적인 학문이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어느 이론적 토대에도 정착하지 않고 스스로 사유를 개진해나가는 힘을. 네 가지 주제 중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 발췌독을 해도 괜찮을 만큼 쉽고 정교하게 글의 짜임새가 구성되어있다. 특정 소재에 꽂혀 해당되는 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독서 경험의 폭이 넓어지는 기분이지만, 한편으로는 분석미학의 입문서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한 것 같다. 대중들이 읽기에 제격인 책이므로 적극 권하고 싶은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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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성의 유혹 : 사진 들린 영화
유운성 지음 / 보스토크프레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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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사진의 유령으로서의 영화


사진과 영화의 관계는 많은 오해와 왜곡을 불러왔다. 이를 유운성은 야만적이라 표현하는데 사진이 영화의 존재론적 근원이라 믿었던 시대를 겨냥한 제스처다. 실제로 수많은 이들이 영화란 사진의 연장선으로 여러 사진을 이어붙여 움직임을 극대화한 매체로 보지 않았는가. 그러나 현대의 영화는 디지털로 픽셀 단위의 컴퓨터 그래픽에 대부분 의탁하고 있다. 또는 CG처럼 실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컴퓨터 내 그래픽으로만 존재하는 기술에 종속되어 영화를 제작한다. 물론 이와 같은 기술적 매체에 영화를 밀착시켜 영화의 정의를 논하는 것은 지극히 회의주의적인 태도다. 특정한 새로운 기술의 도래가 이뤄지지 않으면 영화의 발전은 정체되므로, 우리는 앞으로 닥칠 기술의 현현을 메시아처럼 마냥 기다리는 수동적인 종교인의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유운성의 다른 저서 『유령과 파수꾼들』에서 영화란 어떠한 고유한 본질을 결여한 상태를 고유성으로 지닌 활동-기능이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영화에 본질은 없으며, 본질을 결여한 상태를 고유함으로 간직한다는 정의는 영화를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향해 열어둔다. 영화가 아닌 것으로 치부된 대상마저 영화의 집합으로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흡수되기 마련이다. 여기서 이 정의에 이론적 토대를 보태주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성 개념이나 게오르그 칸토어의 무한집합을 논하기에는 내 역량이 후달리므로 이제 그만 침묵을 지키겠다.

 그렇다면 사진이 영화에 진정으로 전해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놀랍게도 ‘인종차별주의(p.39)’이다. 하나의 이미지(사진)에 어떤 대상의 모든 것을 환원하여 재단하는 행위를 일컬어서 말이다. 강상우의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이 그 예시로 책에서 소개된다. 얼굴의 종족성을 전제로 두고,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사진에 포착된 어떤 인물을 북괴뢰군이라 특정짓는 정치적 모략으로서의 사진. 물론 <김군>에서 밝혀지듯이, 그들의 역겨운 주장과 달리 그 어떤 인물은 당연히 북괴뢰군이 아니다. 사진이 영화에게 건네준 것은 비단 ‘인종차별주의’뿐일까. 당연히 그렇지는 않다. 비록 사진으로부터 투영된 영화 속에 정치적 모략이 있더라도, 사진은 어떤 대상을 프레임에 가두기만 하는 것은 아닐 터다. 사진은 거기 ‘있었음’과 여기에 ‘있음’과 같이 과거와 현재의 시제가 중첩된 형태로 나타나며, 때론 ‘나’라는 주체가 말소된 타자의 현현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영화가 고유성의 결여를 고유함으로 가진 활동-기능이라면 일반적인 사진에서도 영화의 도래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영화를 사랑하는 진정한 시네필이라면 사진에 깃든 영화를 바라볼 필요성이 있는 셈이다. 사진과 연관되어 자신의 세계를 발생시키는 영화의 조각, 프리즘을 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영화비평가 유운성과 동행하여 영화와 사진의 관계를 되짚어가며, 사진으로서 나타나는 영화의 모습을, 이미 존재했으나 은폐되어 비존재로 전락한 사진들린 영화의 현현을 이 책을 읽음으로써 발견하는 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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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 컴북스 이론총서
김환석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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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라투르 입문


문학(영화)을 공부하면서 자주 직면했던 문제는 문학(영화)은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이다. 학교나 다른 교육현장 혹은 예술계 모임에서도 특히 학생들, 지망생이라는 기만적인 용어로 폄하되는 젊은 예술가들은 소위 문학(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라는 암묵적인 압박을 느끼기 마련이다. 본질에 대한 욕망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으로부터 말미암은 투사된 욕망이기도 하지만 좀처럼 쉽사리 사라질 수 없는데 그것만이 내가 특정 예술을 하는 까닭을 밝혀주리라는 강박적인 믿음 때문이다. 개인의 예술적 동기를 해당 예술의 근원에서 찾다보면 결국 문학(영화)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문학(영화)은 무엇일까. 그것의 본질, 고유함은 무엇일까. 애초에 문학(영화)적이라는 것이 있긴 한 걸까. 내가 친애하고 동경과 질투를 번갈아가며 찬사를 보내는 유운성 평론가의 말에서 나를 괴롭혔던 이 질문의 답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미술에서의 영상작업과 영화의 차이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유운성은 “양자 사이의 근원적 차이는 없다. 영화와 영상작업, 그것 자체는 오히려 동일하다. 다만 제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특정 영화가 미술계에서 미술용어로, 미술작품으로 포섭되고 승인된다면 미술작품으로 볼 수 있다.”고 답했다. 제도권의 문제가 작품의 예술 분야를 가르는 시금석이 되는 꼴이다. 사실 본질은 없다는 말과 같은데 이를 과학기술학에 적용하여 학술계에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학자가 있다. 브뤼노 라투르이다. 특정 분야의 고유함을 가뿐히 넘나드는 라투르의 이론처럼 라투르 또한 하이브리드형 학자이다. 그는 ANT(Actor-Network Theory)의 창시자이며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이고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과학자이면서 스스로는 인류학자라고 주장하는 인물이다. 라투르에 따르면 우리가 과학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과학이 곧 하나의 사실이며 엄격한 실험과 과학적 방법론에 기초한 통계에 표시된 수치나 법칙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과학의 제도를 신뢰하기 때문에 우리는 과학을 믿어야 한다는 통상 비과학적으로 여기는 답변을 우리 얼굴에 들이민다. 이처럼 그가 과학 그것 자체에 거부감을 표하고 제도를 운운하며 본질론에 철저히 저항하는 이유는 모든 존재를 “동일한 실체가 아니라 항상 특정한 관계의 효과"로 보는 탓일 것이다. 즉, 대상 그 자체보다 대상과 맺는 ‘관계'가 대상을 정의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흔히 말하는 실험실은 저절로 생겨나는 게 아닌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인종적 문화적 요소들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실험실의 연구비는 누가 대주는가. 그것이 없다면 실험은 가능한가. 특정 과학기술의 발전은 정치적 요인에서 파생되지 않는가. 연구소의 탕비실에 설치된 싱크대에서 수돗물이 나오려면 대통령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뿐만이 아니다. ANT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벗어나서 ‘행위'로서 비인간과 인간을 가로지르는 ‘행위자'의 관점에서 특정 행위자-연결망을 추적하고 분석탐구하는 이론이다.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예시를 들겠다. 만약에 하수구에서 물이 흐른다면, 대개는 이 사실에서 하수구는 객체로 물이 흐르기 위한 통로에 불과하다는 점만을 포착할 것이다. 그러나 ANT의 관점으로 본다면 하수구는 시청의 수도공급 허용과 그것을 아우르는 정부의 승인(여기에도 대통령의 직인이 필요하다), 인부를 동원한 하수구 설치작업, 특정 하수구 배선도를 사용하는 지역민, 수도요금 납부를 관할하는 기관, 거기서 근무하는 직원의 승인 요청을 허락하는 키보드 엔터 등 여러 효과가 일어나도록 하는 행위자-연결망이다. 불변하고 고정적인 실체 대신 다양한 효과가 일어나는 하나의 장으로서의 대상의 ‘관계'에 주안점을 둔 셈이다. 거두절미하고 라투르를 읽으면서 의문점이 든 것이 하나 있다. 그가 생태주의를 정치철학의 모토로 세운 뒤 이론을 전개하는 과정은 흥미로웠지만 모든 중심주의, 특히 인간중심주의를 경계하던 그가 가이아 이론을 비판적으로 전유하는 가운데 지구를 다원적 집합체로 규정하면서 결론을 맺는 지점이 마음에 걸렸다. 이는 다시 말해 지구 중심주의가 아니냐는 말이다. 가이아 이론이 지구를 인간과 자연으로 본다는 점이 다시 이분법의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다원적 존재가 거주하는 지구를 내세우는데 우주의 존재를 외부로 돌리면서 우주와 지구라는 이분법에 빠진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밑에는 그 대목이다. “현대 과학이 출현한 시기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을 가리키면서 우리를 닫힌 세계에서 무한한 우주로 인도했다. 라투르는 우리의 시선을 행성적 한계를 지닌 지구로 되돌려 놓는다(105p)”. 지구가 태양의 존재 없이 존재할 수 있을까? 들뢰즈가 인간의 존재론을 논하려면 중력부터 이야기해야한다고 말했듯이 지구의 존재론은 태양을 무시할 수 없는 법 아닌가. 다소 유치해보이는 지적이지만 그의 중심주의를 거부하는 다원적 존재론과 지구 정치신학이라는 생태주의를 필두로 한 정치철학이 서로 모순되며 충돌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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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셀 테러 - 온라인 여성혐오는 어떻게 현실의 폭력이 되었나
로라 베이츠 지음, 성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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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여성혐오적 국가장치  


여성혐오에 시달리는 현 20・30대 여성들이 결혼하지 않는 것은 영리한 결정이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의 지위는 범죄에 취약하기 때문에 증오의 표적이 되기 쉽고, 여전히 만연한 가부장제의 잔재들이 흘러넘치는 까닭에 굳이 스스로 결혼이라는 불합리한 제도에 기입할 연유 따위 없기 때문이다. 나 같아도 결혼 안 한다. 당장 집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지긋지긋한 시댁살림은 말할 것도 없으며 평생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강요된 희생은 갖은 고생을 정당화한다. 물론 어머니께서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신다는 점은 의심하지 않지만 말이다. 불법촬영, 성적 대상화, 애를 낳는 기계로 선고하는 출산율 지표, 리벤지 포르노, 육아휴직 중 부당해고, 경력 단절. 사실 여성혐오라는 범주에 들어갈 요소들은 계속해서 나열할 수 있을 정도인데 로라 베이츠의 『인셀테러』에서 인셀(비자발적 독신주의자)들이 저지르는 심각한 범죄가 위의 사태들을 가로지르고 아우르고 있다. 

 인셀들의 행태는 이를 더욱 악화하는 데에 아주 그냥 박차를 가한다. 다만 그들이 단순히 소수의 악인이기에 여성혐오를 재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인셀의 ‘남성성’을 본성으로 치부하여 그들이 악을 저지른다고 말한다면 미심쩍은 이데올로기의 냄새를 은폐하는 것이다. “정신은 근거이기를 중단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라는 카프카의 유명한 경구는 인셀테러의 숨은 발원지를 밝혀준다. 정신이 근거가 아니라면 무근거라는 의미인데, 왜 정신을 무근거로 간주할 때 자유로워지는가. 예를 들어보자.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자는 ‘남자다움’을 강요받는다. 여기서 “남자는 평생 세 번 운다.”는 멍청한 말이 파생된다. 만약 정신이 근거라면, 근거는 결과의 원인이므로 ‘남자다움’은 태생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본성이다. “남자는 평생 세 번 운다.”는 말은 자연히 우리의 내부에서 발아된 타고난 철칙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남자다움’은 가부장제 사회가 부여한 규범이 아닌가. 이 규범은 상명하복이 절대적인 군대문화의 산물이고, 감정을 통제하여 남성을 현 사회체계에 복종하도록 가두는 노예의 덕목이다. 즉, “남자는 평생 세 번 운다.”는 한심한 말은 본성에 근거한 생득적 개념이 아닌 사회적 토대가 남성에게 부여한 이데올로기이다. 따라서 정신은 무근거일 때, 원인이 아닌 결과로 제시될 때 비로소 연막이 거둬지고 정신을 결과로 만든 원인의 발원지가 무엇인지 고찰할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셀테러의 ‘남성성’ 다른 말로 ‘남자다움’의 정신은 무엇으로부터 구성된 것인가. 여기서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개념을 끌고 오겠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AIE)’는 ‘억압적 국가장치(AE)’와 구별되는 것으로 흔히 말하는 관료기구에 해당되는 경찰・재판소・감옥・군대를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지칭한다. 종교・교육・가족・법률・정치・조합・라디오・텔레비전・잡지・문학・미술・스포츠 같은 사적 기구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속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사적인 기구로서 각자의 자율성을 보장받고 기능한다. 문제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억압적 국가장치’를 전복시켜 훨씬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가령 나치가 이 사례를 대표하는데, 실제로 히틀러는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정황 때문에 ‘억압적 국가장치’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악명높은 『나의 투쟁』이 옥중에 쓰인다. 그 이후 나치는 쿠데타가 아닌 선전기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민에게 엄청난 지지를 받고 제1정당으로 입성했다. 이는 통제를 관할하는 ‘억압적 국가장치’보다 선전기구에 불과했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강력하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인셀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마찬가지로 『인셀테러』에서 다뤄지는 ‘매노스피어(대부분 남성들도 구성된 여성혐오 집단)’는 전형적인 AIE이다. 왜냐하면 ‘매노스피어’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의존하고 있으며, 유투브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 플랫폼으로 여성혐오를 퍼트리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매노스피어’의 전략 때문에 의회에 남성우월주의 의원들이 득세하며 그들의 편의대로 법이 제정되고 제도를 개편한다. AIE가 AE의 권한을 쥐고 흔드는 셈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레드넥과 여성혐오자들을 등에 업고 세계최고 권력자인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일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매노스피어로 기능하는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 및 플랫폼들과 남성향 게임 혹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여 보여주는 각종 영화나 드라마, 포르노 영상 등을 ‘여성혐오적 국가장치’로 정의하겠다. 

 일반적인 남성도 여성혐오에서 자유롭고 여성혐오를 재생산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선량하고 친절하며 여성을 동등한 위치로 바라보는 괜찮은 남성도 말이다. 안타깝게도 여성혐오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사실 남성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에 별 관심없는 그저 친구나 가족 혹은 연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데에 하루를 할애하는 일반여성까지도 ‘여성혐오적 국가장치’의 재생산에 기여한다. 알튀세르의 AIE가 정치철학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까닭은 ‘의도’가 아닌 ‘효과’ 내지 ‘기능’에 주안점을 두기 때문이다. 아무리 당신이 여성혐오적 시선이 없을지라도(실은 완전한 여성혐오적 시각을 배제하기란 불가능하다) 여성혐오가 판을 치는 가운데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면 여성혐오의 창궐을 지지하는 셈이다. 당신의 ‘의도’가 단지 일상을 즐겁게 보내는 것일지언정, 그것이 여성혐오의 피해자들을 은폐하는 ‘효과’로 나타나므로 책임이 있다. 요컨대 자정이 넘도록 돌아다닐 자유가 주어지는 남성을 보고 있자면 대한민국의 치안은 안전하다는 인상을 준다.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많은 외국인들이 미디어를 통해 한국의 치안에 감탄한다. 물론 그들의 주장이 정말 단순히 치안을 칭찬하려는 순수한 ‘의도’라는 점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이 밤늦게 길거리를 활보하는 것은 여전히 범죄의 대상으로 특정되므로 위험하지 않은가. 뉴스를 보더라도 여성이 성폭행이나 살인을 당하는 범죄는 끊이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남성의 안전이 여성의 불안전을 감추는 ‘효과’로 작동하는 것이다. 개인을 떠나서, 영화나 드라마 혹은 문학도 마찬가지이다. 향토적이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서정시를 써서 미를 추구하려는 ‘의도’가 있을지라도 여성혐오로 고통받는 여성・남성의 사태를 도외시하는 ‘효과’를 발생시킨다면 그런 서정시는 여성혐오를 재생산할 따름이다. 게다가 매노스피어의 전략이 교묘하게 일상에 침투하여 우리의 무의식이 여성혐오와 뒤섞여 있다. 실제로 많은 남성・여성들이 자신의 생각과 행위가 여성혐오적이라고 인식하고 살아가지 않기 마련이다. 이미 우리의 무의식에 남성우월주의와 인종주의를 포함한 배타적인 시각이 반영되어 자기도 모르게 여성혐오를 내면화하며 이를 눈치채기란 쉽지 않다. 우리 모두가 인셀테러의 공모자임을 인정해야 한다. 특정한 악인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시스템 내부에 들어온 이상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인셀테러를 방지하거나 그에 맞서 저항하기 위해서는 ‘여성혐오적 국가장치’를 붕괴시켜 다른 ‘대항장치’로 바꿀 필요가 있다. 로라 베이츠가 제시하는 ‘상황별 보호장치(젊은 남성들이 시간을 보내는 환경에 직접 개입하여 매노스피어의 전략을 미리 방지하는 것)’나 ‘파견형 청소년 지도사 확대(실제 교육현장에 투입함으로써 학생의 여성혐오적 인식관을 바꾸는 것)’가 이 예시에 해당된다. 여성혐오는 여성만을 피해자로 만드는 게 아니라 남성까지도 여성혐오적 시선에 갇히게끔 만들어 여성을 성적인 도구로 인지하는 비인간적인 관계를 강제한다. 결국, ‘여성혐오적 국가장치’는 성별을 떠나 이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 적극적으로 투쟁할 대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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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비창작 - 디지털 환경에서 언어 다루기
케네스 골드스미스 지음, 길예경.정주영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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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문학의 미래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전유하라!” 케네스 골드스미스가 쓴 이 책의 내용를 한 문장으로 응축하면 이와 같다. 작가는 더 이상 글을 쓰는 자가 아니며 기존의 글을 ‘선별’하여 특정 제도권에 배치하는 관리자라고 표명하면서 말이다. 전위, 아방가르드, 실험. 이는 어떤 작가들에게 씌인 누명같은 것. 메인스트림의 울타리를 견고히 지키기위해 특정 예술가의 작품을 전위나 실험의 범주에 가둬놓고 여러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과 다름없는 짓이다.
예술과 문학에서 전위는 이제 거짓말처럼 들린다. 나는 고다르의 “나는 후위다.”라는 테제에 충실하고 싶다. 나는 전위, 그러니까 ‘새로움’만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태도는 유운성의 주장처럼 예술에서 신기함 이외의 다른 어떤 가치도 찾을 수 없을 때 보이는 무기력한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새로움’의 개념을 다시 정초해야 한다. 그것은 기존의 없었던 무언가가 아니라 기존에 있었으나 주류에 편입하지 못하고 은폐된 것, 혹은 기존의 것들을 재배치하여 새롭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창작이란 비창작이다. 창작은 기만이다. 개인의 내면성이나 문학의 진실성 따위 그저 밥벌이에 지나지 않았다. 치유와 연대, 그리고 저항과 전위, 이런 단어들의 의미는 퇴색됐다. 기표는 그대로인데 기의는 저만치 다른 곳으로 정제된 틀에 묶여버렸다.

이 책에 수록된 여러 편의 논문들은 전유의 예시와 디지털 환경에서 문학의 위치를 조정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 이미 많은 작가들이 펜을 대신해 키보드로, 종이를 모니터 화면으로 전환하여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근래 한국 문학에서 주목받는 (이미 등단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우다영 소설가가 스마트폰으로 소설을 집필한다는 사실은 그렇게까지 놀라운 일은 아닌 셈이다. 이미 우리부터 글을 디지털 환경에서 쓰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따라서 텍스트의 더미가 쏟아지는 현대 사회에서 문학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태는 심히 미심쩍다. 단언컨대 문학의 미래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만약 염려되는 게 있다면, 그것은 내 계좌에 찍힌 통장 잔액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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