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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계급의 출현 - 스스로를 의식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브뤼노 라투르.니콜라이 슐츠 지음, 이규현 옮김, 김지윤 외 해설 / 이음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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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실천을 위한 메모 4- 새로운 보편성을 위하여

 

 폭주하는 역사의 경로에서 우리는 길을 잃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이후 좌파 담론은 무기력증에 빠져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기란 어려워졌고,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이를 의식했는지 역사의 종말를 통해 이념적 투쟁의 시대가 끝나 자유민주주의라는 궁극적인 정치 체제로 돌입했다고 선언했다. 물론 후쿠야마의 주장은 우리가 냉소주의의 거대한 쓰레기 매립지에 파묻혀 있다는 사실만을 일러줄 뿐이다. 각종 음모론과 우울증, 만성적인 무기력이 정신을 흔들고, 쏟아지는 상품이 폐기물로 버려지는 곳에서 우리는 역사의 미아가 됐다.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라는 말처럼 확실히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를 그려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여전히 투표권을 행사한 것이 곧 민주주의의 달성으로 치환되고, 내가 산 집값은 필연히 오를 것이며,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여 경제공황을 막아줄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이 사방 곳곳에 떠다니고 있다. 자본주의가 더 나은 미래로 데려다줄 것이기 때문에 경제발전이야말로 믿어 의심치 않는 진실이라는 것이다.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에 자연파괴를 일삼는 바람에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온도가 1.5도나 올랐고, 근대화를 빌미로 식민지배를 옹호하는 제국주의가 만연하여 파시즘과 나치즘이 창궐하고, 모든 것이 폐허로 전락한 세계대전이 발발했는데도 말이다. 역사라는 기차가 우리를 쓰레기 더미로 내던져 버렸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성장이라는 신화를 믿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발터 벤야민이 역사가 휩쓸고 간 폐허를 응시하여 섬광처럼 돌연히 출현하는 혁명적인 순간을 포착하듯, 쓰레기 더미에서 새로운 해석과 실천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 터다.

 쓰레기 더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중심에서 밀려난 잔여, 과잉생산된 누적물, 성장이라는 역사의 모순이다. 발에 치이는 잔해들이 알려주는바, 성장이란 파국인데 여기서 더 발전하려는 자본주의적 욕망 때문에 우리는 이종구속의 덫에 포획된다. 성장이 자기파괴로 귀결되는 가운데 번영을 위해 성장을 추구하는 역설적인 사태. 이때 브뤼노 라투르는 생성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제안한다. “번영은 언제나 생성에 달려 있었는데도, 우리는 성장이 초래하는 파괴를 잊고서 으레 성장을 궁지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수단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생성에 주안점을 두는 것은 우리는 늘 하이브리드로 존재했는데 자연과 인간이라는 허구적 틀 안에서 세계를 해석했던 모순을 넘어서기 위해서다. 자연과 인간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분법을 가로지르는 관계로서의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결합한 형태로서의 우리, 그것이 하이브리드이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라투르가 말하는 해방하는 속박이란 그동안 자연과 인간으로 양분해서 배제했던 다른 존재들을 묘사함으로써 전적으로 의존함이라 하겠다. “단순화하자면, 사람들이 사는 장소로서의 세계와 사람들이 살아가는 수단으로서의 세계를 동일한 법, 정서, 도덕, 제도, 물질의 총체 안에서 서로 겹치게 해주는 모든 것은 진보적이거나 더 낫게는 해방적이라고 일컬어질 것이고, 이 중첩 관계를 악화시키거나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모든 것은 반동적이라고 말해질 것이다.” 여기서 라투르가 밝히는 사실이란, ‘사람들이 사는 장소로서의 세계가 실질적 세계라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수단으로서의 세계는 도구화된 세계일 텐데, 근대에서는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던 이 둘이 사실은 하나였고 생성의 실제가 작동하는 장이었다는 점이다. 쓰레기 더미에서 생성의 실제를 체감한 라투르. 자연과 인간의 종적인 도식을 관계라는 횡적인 도식으로 돌려놓은 탁월함은 언제나 실천을 강조했던 마르크스주의 유산을 이어받는 데까지 이어진다. 역사의 방향을 정초하기 위해서 말이다. 쓰레기에 억눌린 우리가 쓰레기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영위하기에 앞서 지금의 위치를 조정하는 일은 필수불가결하다. 그 어쩔 수 없음에서 파편화된 억압의 과거가 현재에 돌발하여 급진적인 인식의 순간이 도래한다.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녹색 계급이라는 보편성이 그것이다. 여전히 과거로 회귀한다는 보수주의 성향의 혐의를 벗어나는 데 급급한 정치생태학을 갱신하기 위해 그가 정치적 투사로 변신했음을 선언한 책이 바로 녹색 계급의 출현이다.

 ‘녹색 계급을 논하기 전에 이야기를 조금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확실히 보편성은 무너졌다. 보편성을 부인하는 정체성 정치가 대두되면서 그런 양상은 가속화됐다. 전체주의라는 용어가 우리 일상에 알리바이로 작용함으로써 개인의 차이를 존중하는 정체성 정치가 대중까지 퍼졌다. ‘차이의 윤리학으로 요약되는 정체성 정치는 타자를 무한히 환대한다는 점에서 타자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것 같지만, 알랭 바디우는 차이들에 대한 존중은, 그 차이들이 그러한 정체성(결국은 부유한, 그러나 명확히 기울어져 가는 서양의 정체성에 불과한)에 제법 동질적인 경우에 한해서만 적용된다는 것이다라고 비판한다. , 특정 정체성을 기반으로 모인 집단이 원하는 타자란 자신과 닮은 동일자이기 때문에 정체성 정치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결국, 배타적으로 타자를 수용하는 정체성 정치는 역설적으로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에 귀결되기 쉽고, 서로 정체성에 따라 분리되며 고립된다는 점에서 탈정치적이다. ‘K-문화를 내세우는 유사 제국주의 열망에 휩싸인 대한민국을 보라. 자신의 특성과 취향만을 내세우는 정체성 정치는 우리가 결국 잘게 쪼개져 더 이상 그 무엇도 공유하고 소통할 수 없음을 암시하기 마련이다. 이런 탈정치화는 공적 영역을 담지한다고 간주되는 언론도 예외가 아니다. 신문에서 흔히 이야기되는 정치인들의 사적 스캔들을 봐도 알 수 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사적 영역의 침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스캔들의 공적 사용이다. 사적 영역이 공적 영역으로 침투하여 공적 영역의 축소를 불러오는 것이다. 공적 영역이 탈정치화 되면서 우리는 각자의 세계에 매몰되어 공통으로 이야기할 것들을 보지 못한다. 자기계발이나 스펙, 개인의 취향에 몰두하는 현대인의 양상은 모든 것이 자기와 연관될 뿐이지 바깥으로 나갈 여지가 없다. 자크 라깡의 용어로 말하자면, 여전히 상상계에 갇혀 자기 욕망만을 반복적으로 향유하는 유아기의 상태에 불과한 셈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악의 원인이나 마찬가지인 부패하고 이기심에 눈먼 정치인이란 그들의 편집증적 세계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정체성 정치의 역풍과 공적 영역의 축소가 탈정치화로 이어지면서 우리가 얼마나 차이 나느냐는 식의 이야기가 얼마나 무료한지 알려줬다. 차이는 당연하며 우리가 어떻게 하나로 묶일 수 있는지 보편성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다. 서로가 차이 나는 그 경계를 횡단하는 보편성에 대한 요구. 거기에 응답한 것이 라투르의 녹색 계급의 출현이다. ‘녹색 계급은 누구나 참여 가능한, 심지어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이분법을 가르고, 지구의 거주 가능성 문제지구생활자에게 적용한 테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생태주의는 어디에나 있으면서 어디에도 없다. 여기서 말하는 계급 또한, 분리를 내재한 개념이라기보다 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개념에 가깝다. 자본주의라는 욕망의 분쇄기 안에 우리가 포섭된 이상 자본주의 이외의 다른 세계를 구축하기란 마치 불가능한 영역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한 무력증에서 탈피하려는 목적으로 계급을 설정하는 것이다. 물론, ‘녹색 계급은 역사의 경로에서 전진이 아니라 전속력으로 후퇴라는 명령에 충실하다. 사회를 희생하여 경제를 자율화하는 것에 대한 전반적인 거부의식, 경제화에 저항하는 사회적 투쟁들을 역사적으로 이어받는 계급으로서 말이다. “그러므로 계급에 관해 말하는 것은 언제나 전투대형을 갖추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녹색계급에 관해 말하기는 불가피하게 행동을 새롭게 기술하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가 녹색이라고 부르는, 형성 중인 이 계급을 위한 분류작업은 필연적으로 수행적이다.”

 스페이스 X를 발족하여 화성마저 경제적 식민화를 노리는 기업가 일론 머스크를 우주 사랑으로 포장하는 세태는 지극히 끔찍하지 않다고 할 수 없다.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지구를 내다 버리고 화성부터 시작해 우주를 파국으로 몰아가려는 먼지 같지만 거대한 자본주의적 욕망은 끝을 모른다. 경제적 식민화가 곧 천재 신화로 둔갑하는 가운데, 경제발전이 보편으로 읽히는 이 시점에서 보편이라는 기표를 빼앗아 와야 한다. 보편이라는 단어에 우리는 관습적으로 질끔 눈을 감아버리곤 한다. 보편이 언제나 특수를 배제하며 정작 보편이라는 의미에 부합하지 않는 특권층의 요구를 강요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기 존재의 물질적 조건을 규정하려고 할 때, 지구의 거주 가능성의 문제라는 보편을 고려한다면 보편은 파국의 확실성을 막는 정치적 결단이다. 이제는 역사의 방향에서 길을 잃어버린 미아로서 마비 상태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한 발자국씩 천천히 내딛는 주체로서의 미아가 되자는 것. “생태학은 지역적이지도 글로벌하지도 않다. 생태학은 모든 층위에 자리한다라는 라투르의 말처럼 우리가 필시 가슴에 새겨두어야 할 것이란, 정치인이나 국가 단위에서 결정하는 조치가 아닌 블라디미르 레닌의 정신을 이어받아 녹색 계급은 아래로부터 발생한, 지구의 열기를 내리는 뜨거운 혁명의 주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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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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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소설-편지는 가능한가?

 소설에서 서간체로 서술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흔히 ‘서간체 소설’이라고 일컫는데 존 버거의 『A가 X에게』를 비롯해 많은 소설이 편지의 형식을 빌린다고 이야기될 터다. 추정컨대 작가들이 서간체를 선택한 까닭은 수신자와 발신자 사이의 내밀한 ‘무언가’를 독자가 몰래 읽을 수 있도록, 그래서 삶의 진실을 발견했다는 감각을 독자에게 부여하려는 속셈일 것이다. 물론 어떤 작가는 자기고백적인 서술인 서간체가 감성을 자극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낳는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서간체가 편지의 형식과 임의적으로 밀착되면서 창작자 사이에 ‘서간체 소설’이라는 것이 답습됐으며, 은밀한 내용을 이런 자기고백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편지의 형식을 빌리는 게 아니라 기만하는 것이며 비윤리적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편지는 모두에게 공개되기보다 모두를 따돌리는 ‘예외성’의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질릴 만큼 통용되는 이야기지만 소설은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되는 텍스트인데 여기서 불특정 다수란 임의적인 대상으로서 특정한 누군가를 가리키지 않는다. 확실히 편지와는 대비되는 지점이다. 편지는 수신자와 발신자가 명확히 구분되는 형식으로서 그 둘을 제외한 모두를 배제한다. 모두를 따돌리며 당사자인 그 둘이 서로에게 ‘무언가’를 건네는 셈이다. 소설이 ‘보편’적이라면 편지는 ‘예외’적인 것이다. 편지의 형식의 주춧돌인 ‘예외성’은 당사자가 아닌 모두를 바깥으로 밀어 넣을 때 성립한다. 따라서, 소설에서 둘만의 ‘무언가’, 즉 비밀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은 편지의 형식을 배반하는 거나 다름없다. ‘무언가’가 공개되는 시점부터 ‘서간체 소설’은 편지의 형식인 ‘예외성’을 잃고 자기모순에 직면한다. 문체로만 편지와 소설을 결합한다고 소설이 편지의 형식으로 쓰였다고 주장하기란 어렵다. 문제는 단지 둘만의 ‘무언가’를 드러내는 자기고백적인 내용과 서간체라는 문체를 차용하여 독자를 기만한다는 점이다. 그 두 가지는 편지의 특성일 수는 있어도 편지의 형식을 담지하지 않는다. 특히 비밀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알린다는 점에서, 텍스트에서 드러나는 내용과 실제의 내용이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독자가 믿도록 강요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포르노그래피가 될 위험성은 다분히 있다. 여기서 독자는 비밀을 염탐하는 관음증 환자로 둔갑한다. 아무런 윤리적인 태도도 없이 감정의 일치를 위해 누군가의 비밀을 캐내고 단정짓는 것은 공감과 이해라는 명목하에 벌어지는 도착적인 행위이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소설-편지는 가능한 형식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데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다만 편지가 수신자와 발신자 간의 비밀을 담보함으로써 발생하는 형식이라는 점을 유의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둘만의 ‘무언가’가 무엇인지 밝히는 게 아니라 둘만이 공유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독자에게 알리는 것이다. 결코, 독자는 그 비밀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단지 비밀이 ‘있다’는 사실, 그러니까 ‘예외성’만 인지할 뿐이다. 그런 인지가 그 둘을 제외한 모두를 배제한다. 비밀을 폭로하기보다 비밀을 침묵의 영역에 넣음으로써 편지의 형식은 소설에 깃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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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가 작품이 될 때
박보나 지음 / 바다출판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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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언젠가 세상은 시(詩)가 될 것이다

 “좋은 영화란 대체 어떻게 만들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故유현목 감독은 다음과 같이 답한 적이 있다. “영화는 재주나 기술로 찍는 게 아니라 태도로 찍는 거예요.”어렸을 때는 저 대답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는데 예술을 사랑할수록 혹은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삶이나 예술에서 진정으로 긴요한 것은 태도라는 사실을 몸소 알 수 있었다. 태도는 마음가짐처럼 어떤 다짐이나 결심을 의미하지 않는다. 태도란 내가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마찬가지로 특정한 소설을 사랑하는 일은 그 소설이 세상을 다루는 방식을 사랑하는 것이다. 태도가 곧 주제가 되고 기술이 되며 모든 것을 가로지른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예술이 대중에게 차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흔히 현대예술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기 취향이 아니다”라거나 “그건 예술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조롱하고 무시해버린다. 사실 그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취향의 문제거나 혹은 예술사조적 맥락에서 거부하는 제스처가 아니다. 단지 자신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타자)에 대한 반발감인 경우가 많다. 이는 예술뿐만 아니라 문화 전 영역을 거쳐 인종이나 성별, 문화권, 종교까지 범위를 확장한다. 유독 예술이 가장 만만할 따름이다.
 낯선 타자의 거부가 판을 치는 가운데 현대미술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을까.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무제 (로스 모어)>와 마주쳤을 때 나는 무척이나 시적이라고 느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연인을 애도하는 작가의 다정함과 쓸쓸함이 드러나는 작품인데, 연인의 몸무게를 사탕으로 은유하여 표현하는 게 깜찍하면서도 누구나 로스의 죽음과 사랑을 미각으로 체험하게끔 유도한다. 이때 점점 줄어드는 사탕들은 로스의 부재를 상기하면서 우리가 거기에 가담하고 있음을, 다시 말해 우리에게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구석에 몰려있는 사탕을 주워가는 무심한 우리에게 부채감을 안겨주면서 말이다. 칸트가 말했듯이 원인이 인식의 영역이라면 책임은 윤리의 영역, 즉 실천의 문제이다. 누군가의 죽음은 결코 개인적이지 않은 셈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작품을 시적이라고 느낀 까닭은 비단 사탕이 로스를 환유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또한 수사적으로 포장하기 위해 시적이라 덧붙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은 부득이 시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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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오퍼스 7
수잔 손택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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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문학의 해부학

 문학은 언제나 ‘대상’이 되어왔다. 우리는 왜 ‘대상’이 되기를 기피하며 대상이 되어줄 무엇을 찾게 되는 걸까? 진화론적 관점에서 ‘본다’는 행위는 능동적이다. 토끼를 노리는 맹수처럼. 그럼 대상, ‘보여진다’는 것은 수동적인 상태로 마치 포식자의 먹잇감에 불과한 것이다. 희생자의 포지션을 고수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우리는 늘 느끼고 있다. 따로 취업 면접이나 혹은 성과평가, 구태여 학교생활에서의 성적 등을 들먹이며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대상’은 일방적으로 평가를 받는 객체로서 기능하기 마련이다. 보는 이에 의해 판단과 가치가 발생하는 비자발적인 존재로서 말이다. 해석이 요구되는 셈인데, 공교육을 걸고 넘어지지 않더라도 문학은 해석이 필요한 무엇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수전 손택이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현대의 해석 방법은 파고 들어가는 것이다. 파고 들어가면서 파괴한다(p.24.)" 라고 지적했듯이 해석은 모든 것을 내용으로 환원한다.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무조건적인 강박. 요 근래 미디어나 비평계에서 대두되는 강단식 비평과 다르지 않다. 단지 교양과 지식을 쌓는 목적으로 문학작품을 재단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작품을 이해했다며 종속시키는 행위 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것을 ‘문학의 해부학’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가장 악랄하고 지독한 것은 정신분석학이다. 오이디푸스 삼각구조에 모든 것을 환원하여 대상을 해부하려는 시도. 수전 손택의 예술의 '성애학'은 이에 맞서 저항할 목적으로 내놓은 대안이다. 문학을 읽는 게 아니라 문학과 껴안기. 문학을 자신의 자아 성장을 위한 밑거름 내지 수단으로 활용하는 일종의 자기계발서와 궤를 같이하는 접근법을 완강히 거부하면서 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석이 아니라 사랑, 문학이라는 타자와 마주칠 수 있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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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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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나보코프와의 맞짱


 나는 『롤리타』를 풀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해법수학에서 배운 인수분해를 하듯이 말이다. 문장을 해체하면서 나름 쾌감을 얻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칸트가 주장한 미적판단이 불러일으킨 만족일까. 아니면 소설은 언어로 구성된 에술이라는 이유로, 12년동안 강박적으로 학습해온 주입식 교육에 의해 정답을 찾고 있었던 것일까. 사실 소설이 내게 해석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내가 소설에서 삶의 의미를 뒤지고 다녔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의미를 견디지 못하므로.
 확실히 『롤리타』는 짜증나는 소설이다. 나보코프는 글을 쓸 때 자신의 문장에 대한 자만심을 남김없이 드러내보인다. 물론 그는 탁월한 문장가이며 번역본임에도 필력이 끝내준다는 것은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말 거슬리는 것은 그가 나의 독법을 조롱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문부터 그렇다. 『롤리타』, 이 소설을 소아성애자의 변명으로 읽음으로써 윤리적 의식을 강화하기 위해 반면교사로 삼아 교훈을 얻는 것을 조롱하거나, 반대로 소아성애자의 욕구를 채워주는 소비재이기를 완강히 거부하고 능욕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로라와 험버트의 정사장면의 묘사가 고작 한 문장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수백 페이지를 넘기며 음흉한 짓을 고대했을 파렴치한 자들에게 엿을 날리는 셈이다. 더군다나 전기비평이나 정신분석학 비평을 자신의 다른 저서에서 혐오감을 보일 만큼 시덥잖은 행위로 간주하고 있다. 험버트와 퀄티의 총격전이 얼마나 유치하고 우스꽝스럽게 묘사되는지 상기해보라. 이쯤이면 내가 책을 읽는 건지 나보코프와 맞짱이라도 한판 뜨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아니, 싸우고 싶다. 그와. 진심으로.

 이것을 게임이라 둘러대면서 얼굴에 미소를 한가득 머금고 있을 나보코프가 내 눈앞에 훤하다. 나보코프는 현대의 소설이란 인물 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게 아닌 작가와 독자 사이에 갈등을 빚어내는 게임이라 말한 바 있다. 그의 주장을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친구로 두고 싶지 않은 부류의 인간이라는 점은 단언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에게 독서는, 소설은 놀이다. 규칙을 바꿔가며 상황을 조정하고 특정한 누군가를 놀림감으로 삼아 후두려 패는... 링 위에서 나보코프는 나비같은 스텝과 상대를 한 방에 끝낼 수 있는 라이트훅을 장점으로 지닌 선수였다. 나는 앞손 싸움에 자신이 있었기에 상황을 유리하게 흘러가도록 유도했다. 나보코프의 오른쪽 어깨가 크게 회전하고 허리가 돌아가며 체중이 실리는 순간, 이대로 카운터를 노릴 참이었으나.... 책이 얼굴을 덮쳤다. 다행히도 코피는 나지 않았다. 젠장, 내가 한 방 먹은 것이었다. 아니, 『롤리타』 2부가 지루했으니 내가 이긴 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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