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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 ㅣ 컴북스 이론총서
김환석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24년 6월
평점 :
[서평] 라투르 입문
문학(영화)을 공부하면서 자주 직면했던 문제는 문학(영화)은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이다. 학교나 다른 교육현장 혹은 예술계 모임에서도 특히 학생들, 지망생이라는 기만적인 용어로 폄하되는 젊은 예술가들은 소위 문학(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라는 암묵적인 압박을 느끼기 마련이다. 본질에 대한 욕망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으로부터 말미암은 투사된 욕망이기도 하지만 좀처럼 쉽사리 사라질 수 없는데 그것만이 내가 특정 예술을 하는 까닭을 밝혀주리라는 강박적인 믿음 때문이다. 개인의 예술적 동기를 해당 예술의 근원에서 찾다보면 결국 문학(영화)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문학(영화)은 무엇일까. 그것의 본질, 고유함은 무엇일까. 애초에 문학(영화)적이라는 것이 있긴 한 걸까. 내가 친애하고 동경과 질투를 번갈아가며 찬사를 보내는 유운성 평론가의 말에서 나를 괴롭혔던 이 질문의 답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미술에서의 영상작업과 영화의 차이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유운성은 “양자 사이의 근원적 차이는 없다. 영화와 영상작업, 그것 자체는 오히려 동일하다. 다만 제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특정 영화가 미술계에서 미술용어로, 미술작품으로 포섭되고 승인된다면 미술작품으로 볼 수 있다.”고 답했다. 제도권의 문제가 작품의 예술 분야를 가르는 시금석이 되는 꼴이다. 사실 본질은 없다는 말과 같은데 이를 과학기술학에 적용하여 학술계에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학자가 있다. 브뤼노 라투르이다. 특정 분야의 고유함을 가뿐히 넘나드는 라투르의 이론처럼 라투르 또한 하이브리드형 학자이다. 그는 ANT(Actor-Network Theory)의 창시자이며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이고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과학자이면서 스스로는 인류학자라고 주장하는 인물이다. 라투르에 따르면 우리가 과학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과학이 곧 하나의 사실이며 엄격한 실험과 과학적 방법론에 기초한 통계에 표시된 수치나 법칙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과학의 제도를 신뢰하기 때문에 우리는 과학을 믿어야 한다는 통상 비과학적으로 여기는 답변을 우리 얼굴에 들이민다. 이처럼 그가 과학 그것 자체에 거부감을 표하고 제도를 운운하며 본질론에 철저히 저항하는 이유는 모든 존재를 “동일한 실체가 아니라 항상 특정한 관계의 효과"로 보는 탓일 것이다. 즉, 대상 그 자체보다 대상과 맺는 ‘관계'가 대상을 정의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흔히 말하는 실험실은 저절로 생겨나는 게 아닌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인종적 문화적 요소들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실험실의 연구비는 누가 대주는가. 그것이 없다면 실험은 가능한가. 특정 과학기술의 발전은 정치적 요인에서 파생되지 않는가. 연구소의 탕비실에 설치된 싱크대에서 수돗물이 나오려면 대통령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뿐만이 아니다. ANT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벗어나서 ‘행위'로서 비인간과 인간을 가로지르는 ‘행위자'의 관점에서 특정 행위자-연결망을 추적하고 분석탐구하는 이론이다.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예시를 들겠다. 만약에 하수구에서 물이 흐른다면, 대개는 이 사실에서 하수구는 객체로 물이 흐르기 위한 통로에 불과하다는 점만을 포착할 것이다. 그러나 ANT의 관점으로 본다면 하수구는 시청의 수도공급 허용과 그것을 아우르는 정부의 승인(여기에도 대통령의 직인이 필요하다), 인부를 동원한 하수구 설치작업, 특정 하수구 배선도를 사용하는 지역민, 수도요금 납부를 관할하는 기관, 거기서 근무하는 직원의 승인 요청을 허락하는 키보드 엔터 등 여러 효과가 일어나도록 하는 행위자-연결망이다. 불변하고 고정적인 실체 대신 다양한 효과가 일어나는 하나의 장으로서의 대상의 ‘관계'에 주안점을 둔 셈이다. 거두절미하고 라투르를 읽으면서 의문점이 든 것이 하나 있다. 그가 생태주의를 정치철학의 모토로 세운 뒤 이론을 전개하는 과정은 흥미로웠지만 모든 중심주의, 특히 인간중심주의를 경계하던 그가 가이아 이론을 비판적으로 전유하는 가운데 지구를 다원적 집합체로 규정하면서 결론을 맺는 지점이 마음에 걸렸다. 이는 다시 말해 지구 중심주의가 아니냐는 말이다. 가이아 이론이 지구를 인간과 자연으로 본다는 점이 다시 이분법의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다원적 존재가 거주하는 지구를 내세우는데 우주의 존재를 외부로 돌리면서 우주와 지구라는 이분법에 빠진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밑에는 그 대목이다. “현대 과학이 출현한 시기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을 가리키면서 우리를 닫힌 세계에서 무한한 우주로 인도했다. 라투르는 우리의 시선을 행성적 한계를 지닌 지구로 되돌려 놓는다(105p)”. 지구가 태양의 존재 없이 존재할 수 있을까? 들뢰즈가 인간의 존재론을 논하려면 중력부터 이야기해야한다고 말했듯이 지구의 존재론은 태양을 무시할 수 없는 법 아닌가. 다소 유치해보이는 지적이지만 그의 중심주의를 거부하는 다원적 존재론과 지구 정치신학이라는 생태주의를 필두로 한 정치철학이 서로 모순되며 충돌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