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성의 유혹 : 사진 들린 영화
유운성 지음 / 보스토크프레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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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사진의 유령으로서의 영화


사진과 영화의 관계는 많은 오해와 왜곡을 불러왔다. 이를 유운성은 야만적이라 표현하는데 사진이 영화의 존재론적 근원이라 믿었던 시대를 겨냥한 제스처다. 실제로 수많은 이들이 영화란 사진의 연장선으로 여러 사진을 이어붙여 움직임을 극대화한 매체로 보지 않았는가. 그러나 현대의 영화는 디지털로 픽셀 단위의 컴퓨터 그래픽에 대부분 의탁하고 있다. 또는 CG처럼 실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컴퓨터 내 그래픽으로만 존재하는 기술에 종속되어 영화를 제작한다. 물론 이와 같은 기술적 매체에 영화를 밀착시켜 영화의 정의를 논하는 것은 지극히 회의주의적인 태도다. 특정한 새로운 기술의 도래가 이뤄지지 않으면 영화의 발전은 정체되므로, 우리는 앞으로 닥칠 기술의 현현을 메시아처럼 마냥 기다리는 수동적인 종교인의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유운성의 다른 저서 『유령과 파수꾼들』에서 영화란 어떠한 고유한 본질을 결여한 상태를 고유성으로 지닌 활동-기능이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영화에 본질은 없으며, 본질을 결여한 상태를 고유함으로 간직한다는 정의는 영화를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향해 열어둔다. 영화가 아닌 것으로 치부된 대상마저 영화의 집합으로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흡수되기 마련이다. 여기서 이 정의에 이론적 토대를 보태주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성 개념이나 게오르그 칸토어의 무한집합을 논하기에는 내 역량이 후달리므로 이제 그만 침묵을 지키겠다.

 그렇다면 사진이 영화에 진정으로 전해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놀랍게도 ‘인종차별주의(p.39)’이다. 하나의 이미지(사진)에 어떤 대상의 모든 것을 환원하여 재단하는 행위를 일컬어서 말이다. 강상우의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이 그 예시로 책에서 소개된다. 얼굴의 종족성을 전제로 두고,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사진에 포착된 어떤 인물을 북괴뢰군이라 특정짓는 정치적 모략으로서의 사진. 물론 <김군>에서 밝혀지듯이, 그들의 역겨운 주장과 달리 그 어떤 인물은 당연히 북괴뢰군이 아니다. 사진이 영화에게 건네준 것은 비단 ‘인종차별주의’뿐일까. 당연히 그렇지는 않다. 비록 사진으로부터 투영된 영화 속에 정치적 모략이 있더라도, 사진은 어떤 대상을 프레임에 가두기만 하는 것은 아닐 터다. 사진은 거기 ‘있었음’과 여기에 ‘있음’과 같이 과거와 현재의 시제가 중첩된 형태로 나타나며, 때론 ‘나’라는 주체가 말소된 타자의 현현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영화가 고유성의 결여를 고유함으로 가진 활동-기능이라면 일반적인 사진에서도 영화의 도래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영화를 사랑하는 진정한 시네필이라면 사진에 깃든 영화를 바라볼 필요성이 있는 셈이다. 사진과 연관되어 자신의 세계를 발생시키는 영화의 조각, 프리즘을 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영화비평가 유운성과 동행하여 영화와 사진의 관계를 되짚어가며, 사진으로서 나타나는 영화의 모습을, 이미 존재했으나 은폐되어 비존재로 전락한 사진들린 영화의 현현을 이 책을 읽음으로써 발견하는 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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