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도가 작품이 될 때
박보나 지음 / 바다출판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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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언젠가 세상은 시(詩)가 될 것이다

 “좋은 영화란 대체 어떻게 만들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故유현목 감독은 다음과 같이 답한 적이 있다. “영화는 재주나 기술로 찍는 게 아니라 태도로 찍는 거예요.”어렸을 때는 저 대답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는데 예술을 사랑할수록 혹은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삶이나 예술에서 진정으로 긴요한 것은 태도라는 사실을 몸소 알 수 있었다. 태도는 마음가짐처럼 어떤 다짐이나 결심을 의미하지 않는다. 태도란 내가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마찬가지로 특정한 소설을 사랑하는 일은 그 소설이 세상을 다루는 방식을 사랑하는 것이다. 태도가 곧 주제가 되고 기술이 되며 모든 것을 가로지른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예술이 대중에게 차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흔히 현대예술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기 취향이 아니다”라거나 “그건 예술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조롱하고 무시해버린다. 사실 그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취향의 문제거나 혹은 예술사조적 맥락에서 거부하는 제스처가 아니다. 단지 자신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타자)에 대한 반발감인 경우가 많다. 이는 예술뿐만 아니라 문화 전 영역을 거쳐 인종이나 성별, 문화권, 종교까지 범위를 확장한다. 유독 예술이 가장 만만할 따름이다.
 낯선 타자의 거부가 판을 치는 가운데 현대미술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을까.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무제 (로스 모어)>와 마주쳤을 때 나는 무척이나 시적이라고 느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연인을 애도하는 작가의 다정함과 쓸쓸함이 드러나는 작품인데, 연인의 몸무게를 사탕으로 은유하여 표현하는 게 깜찍하면서도 누구나 로스의 죽음과 사랑을 미각으로 체험하게끔 유도한다. 이때 점점 줄어드는 사탕들은 로스의 부재를 상기하면서 우리가 거기에 가담하고 있음을, 다시 말해 우리에게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구석에 몰려있는 사탕을 주워가는 무심한 우리에게 부채감을 안겨주면서 말이다. 칸트가 말했듯이 원인이 인식의 영역이라면 책임은 윤리의 영역, 즉 실천의 문제이다. 누군가의 죽음은 결코 개인적이지 않은 셈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작품을 시적이라고 느낀 까닭은 비단 사탕이 로스를 환유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또한 수사적으로 포장하기 위해 시적이라 덧붙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은 부득이 시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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