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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평점 :
[서평] 소설-편지는 가능한가?
소설에서 서간체로 서술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흔히 ‘서간체 소설’이라고 일컫는데 존 버거의 『A가 X에게』를 비롯해 많은 소설이 편지의 형식을 빌린다고 이야기될 터다. 추정컨대 작가들이 서간체를 선택한 까닭은 수신자와 발신자 사이의 내밀한 ‘무언가’를 독자가 몰래 읽을 수 있도록, 그래서 삶의 진실을 발견했다는 감각을 독자에게 부여하려는 속셈일 것이다. 물론 어떤 작가는 자기고백적인 서술인 서간체가 감성을 자극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낳는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서간체가 편지의 형식과 임의적으로 밀착되면서 창작자 사이에 ‘서간체 소설’이라는 것이 답습됐으며, 은밀한 내용을 이런 자기고백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편지의 형식을 빌리는 게 아니라 기만하는 것이며 비윤리적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편지는 모두에게 공개되기보다 모두를 따돌리는 ‘예외성’의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질릴 만큼 통용되는 이야기지만 소설은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되는 텍스트인데 여기서 불특정 다수란 임의적인 대상으로서 특정한 누군가를 가리키지 않는다. 확실히 편지와는 대비되는 지점이다. 편지는 수신자와 발신자가 명확히 구분되는 형식으로서 그 둘을 제외한 모두를 배제한다. 모두를 따돌리며 당사자인 그 둘이 서로에게 ‘무언가’를 건네는 셈이다. 소설이 ‘보편’적이라면 편지는 ‘예외’적인 것이다. 편지의 형식의 주춧돌인 ‘예외성’은 당사자가 아닌 모두를 바깥으로 밀어 넣을 때 성립한다. 따라서, 소설에서 둘만의 ‘무언가’, 즉 비밀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은 편지의 형식을 배반하는 거나 다름없다. ‘무언가’가 공개되는 시점부터 ‘서간체 소설’은 편지의 형식인 ‘예외성’을 잃고 자기모순에 직면한다. 문체로만 편지와 소설을 결합한다고 소설이 편지의 형식으로 쓰였다고 주장하기란 어렵다. 문제는 단지 둘만의 ‘무언가’를 드러내는 자기고백적인 내용과 서간체라는 문체를 차용하여 독자를 기만한다는 점이다. 그 두 가지는 편지의 특성일 수는 있어도 편지의 형식을 담지하지 않는다. 특히 비밀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알린다는 점에서, 텍스트에서 드러나는 내용과 실제의 내용이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독자가 믿도록 강요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포르노그래피가 될 위험성은 다분히 있다. 여기서 독자는 비밀을 염탐하는 관음증 환자로 둔갑한다. 아무런 윤리적인 태도도 없이 감정의 일치를 위해 누군가의 비밀을 캐내고 단정짓는 것은 공감과 이해라는 명목하에 벌어지는 도착적인 행위이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소설-편지는 가능한 형식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데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다만 편지가 수신자와 발신자 간의 비밀을 담보함으로써 발생하는 형식이라는 점을 유의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둘만의 ‘무언가’가 무엇인지 밝히는 게 아니라 둘만이 공유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독자에게 알리는 것이다. 결코, 독자는 그 비밀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단지 비밀이 ‘있다’는 사실, 그러니까 ‘예외성’만 인지할 뿐이다. 그런 인지가 그 둘을 제외한 모두를 배제한다. 비밀을 폭로하기보다 비밀을 침묵의 영역에 넣음으로써 편지의 형식은 소설에 깃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