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시 하나, 내 멋대로 산다
우치다테 마키코 지음, 이지수 옮김 / 서교책방 / 2025년 8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일흔여덟의 할머니를 떠올려 봤을 때, 오시 하나는 우리가 길거리에서 흔히 마주치는 보통의 할머니들과는 사뭇 다른 패션 감각과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하나는 집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동네 슈퍼에 갈 때조차 자신을 빈틈없이 치장하는, 이른바 세련되고 패셔너블한 할머니다. 그녀는 10년 만에 열린 동창회에 나가서 꾸미지 않고 그대로 나온, 세월에 꺾인 친구들을 보며 속으로는 게으르다고 욕을 하고, 본인은 나이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안심을 하면서 내면보다는 외면을 중시한다.
하나의 남편인 이와조는 하나보다 한 살이 많고 종이 접기를 평생 취미로 삼고 있다. 그는 언제나 다정하게 하나 옆에 있어주는 믿음직한 남편이다. 부부는 젊었을 때 같이 고생하며 일궈나갔던 일용품점을 장남인 유키오와 며느리인 유미에게 물려 주고 둘만의 유유자적한 황혼생활을 누린다. 하지만 하나는 며느리인 유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든이 다 되어가는 나이임에도 정성껏 치장을 하는 본인과 비교했을 때, 아직 마흔다섯 살인 유미는 점프슈트와 색바랜 셔츠 따위를 입고, 화장기 없는 민낯으로 화가도 아니면서 아틀리에에 처박혀 그림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유키오는 가게일을 도맡아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도와주지도 않고 말이다. 역시, 세상에 사이 좋은 시어머니와 며느리 따위는 없는 건가 보다.
p.144 _나이를 먹는다는 건 잃는 게 늘어난다는 뜻이다. 체력도 기억력도 기력도 그렇지만, 젊은 시절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어머니도 있었다. 남편도 있었다. 이제 아무도 없다. 다들 사라졌다.
오래도록 함께한 인생의 동반자였던 이와조가 죽고, 하나는 혼자가 된다. 그리고 무기력해졌달까. 당장 죽어도 아쉽지 않을 만큼 더 살고자 하는 목적도, 의지도 없다. 사이좋은 부부가 그렇듯, 갑작스러운 이와조의 죽음에 하나는 일시적인 기억상실증을 겪는 동시에 가족들에게는 입만 열면 나는 이제 곧 죽을 거다, 이와조가 빨리 나를 불러줬으면 좋겠다라고 하며 삶의 의지가 보이지 않는 행동과 말을 하며 가족들을 걱정시킨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는 이와조가 접은 종이접기 컬렉션을 둘러보다가 이와조를 추모하고자 전시회를 열기로 계획한다. 딸과 손녀와 함께 이와조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어느 사진과 진찰권.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하나는 하나씩 하나씩 진실에 다가선다. 남편 이와조가 40년 가까이 되는 세월 동안 두 개의 가정을 꾸리고 있었으며, 심지어 내연녀와의 사이에 자식도 있다는 걸 알게 되고 큰 충격과 혼란에 빠진다.
p.205_후려갈기고 불 싸지르고 싶은 건 유키오 네 아버지야. 무덤을 파헤쳐서 유골함을 열고, 펄펄 끓는 기름을 부어주고 싶어.
생전, 의연하게 살자는 말을 모토로 삼고 서로 의지하며 지내온 이와조와 하나. 그런데 이렇게 배신을 때릴 줄이야. 하나가 더욱 안쓰럽게 생각된 것은 남편이 죽었으니 분노를 표출할 곳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자존감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진 하나. 더구나 내연녀는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리다. 그 어느 때보다 의연하게 살 수 없는 하나는 내연녀와 자식이라는 실체를 보지 않으려 하고, 그 존재를 부정하고만 싶다. 하지만 의연하게 살자고 씌어진 족자(이와조와 하나의 추억이 담겨 있는 좌우명 같은 족자)는 내연녀에게 주겠다고 이와조의 유서에 명시되어 있다. 굳이 왜 그 족자를?? 하나와 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족자를 계기로 내연녀와 자식들을 만나게 된다.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오시 하나는 정말 멋진 할머니다. 내면만큼 외면도 중요하다는 이 말, 절실하게 동감한다. 가꾸고 치장하고 나이보다 젊어 보이게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비록 자기만족이라 할지라도 남한테 피해주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책에는 통쾌하고 유쾌한 주옥같은 말들이 많다. 깔깔대며 웃다가도, 애잔하고 씁쓸하고, 또 통쾌한 감정들이 반복되면서 하나의 인생을 응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노화와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하나와 같은 일이 나에게 닥친다면 나는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하나의 곁에 자식과 손주들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금방 무너졌으리라.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의 진실을 알고 삶에 대한 의지를 다시 확고히 할 수 있었던 하나. 하나와 가족들은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마지막 장까지 궁금해서 끝까지 책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