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새로운 백년의 문턱에 서서 - 이석기 옥중수상록
이석기 지음 / 민중의소리 / 2020년 12월
평점 :
<새로운 세기의 문턱에 서서> 감상 1편.
- 이석기 옥중수상록
1. 어렵지 않은 말로 쉽게!
SNS에 책을 읽었다는 사람들의 글이 올라온다. 대부분 공통적인 것은 '단숨에 읽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석기 의원의 목소리를 오랫동안 기다려왔기 때문에, 거기에 성탄절 전후나 되어야 나온다던 책이, 생각보다 더 일찍 나와서 반가운 마음에도 그랬을 터이지만. 사실, 술술 읽힐 수 있도록 어렵지 않은 말로 쉽게 쓰여지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리라.
딱 나도 그랬다. '오늘 중 배송'이란 문자를 보고 얼른 가서 보고 싶었으나, 저녁 약속도 있었고, 게다가 술도 가볍지 않게 했다. 그럼에도 '단숨에' 읽었다. 오히려 책을 읽는 동안 서서히 알콜기가 사라지는 느낌까지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오해를 갖고 있기도 하다. 이른바 '진보'는 어려운 말 하는 사람들 아니냐고. 이 책은 그런 편견을 여지없이 박살내준다.
그래서였다. 모두 13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한 장을 지나칠 때마다 핸드폰을 꺼내 주변 사람들에게 '한번 읽어보시라'고 문자를, 톡을 부지런히 남겼다. 이미 시간은 밤 11시를 넘기고 있었지만 상관없이. 읽으면 읽을수록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고, '진보의 고민'에 대해 함께 나누고 싶은 욕심이 마구 솟구쳤기 때문이다.
2. 결코 가볍지 않은 그 무게감과 성찰의 깊이!
참으로 쉬운 말로 씌여졌다고 했으나, 그렇다고 내용이 가볍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라고 할 수 있겠다.
햇수로 무려 8년째, 이제 곧 9년째 독방생활을 하고 있는 이석기 의원은 현재 자신의 처지로부터 시작하여('어디서나 주인이 되라') 담담히 본인은 어떤 사람인지를 풀어놓는다.('강을 건너면 배는 버려야 한다',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다')
이어서 바로 한국정치의 현실('거대 양당체제를 벗어나려면')과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흔들리는 동북아에서의 전후 체제')를 일별한 후, '우리는 지난날의 우리가 아니다'라고 자신있게 미래를 내다볼 주춧돌을 놓는다.
정확하게 책의 절반은 미래에 대한 고민과 구상에 집중하고 있다.('한미동맹이라는 미신', '탈동맹-남북협력의 길', '경제의 중심은 민중의 삶', '우리는 같은 출발선에 서 있나', '세습되는 불평등을 바꾸는 힘', '대담한 변화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는 지금 '새로운 백년의 문턱에 서서' 있다고 글을 맺는다.
장황하지 않되, 한국사회의 현실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까지 아우르면서, 간결하면서도 깊숙이 찌르는 문제의식은 감옥 안에서의 고민과 성찰의 깊이를 그대로 드러내준다.
3. 쉬운 말이 가능한 이유는, 사상의 뿌리내림이 깊고 분명하기 때문!
사실, '쉬운 말'은 노력한다고만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최근 '학교비정규직 노동조합'의 교육에 간간이 강사로 참여하고 있다. 노조 간부들의 한결같은 요구는 '쉽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말만큼, 생각만큼 참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용어를 쉽게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강사의 삶 자체가 조합원의 삶과 일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책의 전편에 걸쳐 이석기 의원은 본인의 고민과 삶이 어디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거듭하여 토로하고 강조한다.
가령, 왠지 단어만 들어도 어려울 것 같고 전문가가 아니면 쉽게 숟가락 얹기도 부담스러울 것 같은 '경제'를 이야기할 때도 이런 식이다. "나는 숫자로 된 경제지표보다는 내가 살아온, 그리고 나의 주변 사람들이 살아온 것을 토대로 우리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려고 한다. 통계수치는 나름의 진실을 담고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고, 무엇보다 민중의 입장에서, 그러니까 '살림살이'의 관점에서 경제를 보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p.134)
그렇기 때문에 이는, 이 땅을 살아가는 '민중'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자신감으로 표현된다. "세상에는 수많은 나라가 있지만 우리처럼 위대한 민중을 가진 나라는 많지 않다고 나는 생각합니다."(p.83) "다행한 것은 우리가 과거의 우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 한반도의 남측에서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민주주의가 꽃피고 있고, 한반도의 북측 역시 만만치 않은 저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남은 남의 길을 걸어왔고, 북은 북의 길을 걸어왔지만 우리는 분명 지난날의 우리가 아닙니다."(p.96)
4. 마지막 장을 덮고 난 뒤, 일말의 부끄러움!
이석기 의원은 지금 감옥에서 8년째, 무려 2,665일(12월20일자로!)을 독방에 갇혀 있다. 그동안 한국사회에는 얼마나 많은, 역동적인 변화들이 있었나? 한국사회 뿐 아니라 전세계의 커다란 변화들은 또 얼마만큼이었나? 그러나, 그런 변화에서 격리되어 살아온 그가 '새로운 백년의 문턱에 서' 있다고 이야기한다.
일제시대로부터 그대로 이어져 온 한국의 감옥 시스템이야 말해 무엇하랴. 어찌 보면 이 사회에서 가장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는 한 사람이, 거꾸로 교도소의 높은 장벽을 훌쩍 넘어 가장 자유로운 사색의 날개짓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는 훨씬 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일 인터넷으로 한국 뿐 아니라 한반도를 넘어 전세계 소식을 훑어보고, 또 매일 다양한 많은 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논쟁을 하고 또 다양한 삶의 활동을 만들어내는 우리들은, 아니 나는, 독방에 갇힌 이석기 의원보다 더 자유롭다고 과연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 또한 그와 함께 지금 '새로운 백년의 문턱'에 서 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나?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 밀려오는 한없는 '부끄러움'이다.
5. 이제 '감상 1편'일 뿐이다!
'감상 1편'이라고 고백한다.
'단숨에 읽어내린' 것만으로는 당연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일 감'일 뿐이다.
그가 옥중에서 쏟아놓은 '13편'의 수상록(그때그때 떠오르는 느낌이나 생각을 적은 글)을, 이제 다시 한편씩 꼼꼼히 정독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과는 또 다른 고민들이, 느낌들이, 생각들이 자유자재로 마구 뻗어나가겠지.
그리고 그렇게 그와 더 한발자욱, 우리는 가까워질 수 있을 게다.
- 2020년 12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