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 포비아 - 러시아 혐오의 국제정치와 서구의 위선
기 메탕 지음, 김창진.강성희 옮김 / 가을의아침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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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상식적인 질문들은 어떻게 봉쇄되었나?


최근 뜨거운 국제 이슈가 ‘우크라이나 사태’다. 

평상시에는 큰 관심도 없었는데, 전쟁으로까지 치달은 최근의 사태를 보면서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해야 할지 우리 사회 안에서도 고민과 논의가 분분하다. 


좀 더 폭넓은 국제정치의 시야에서 ‘우크라이나 사태’를 조망하고 고민해볼 수 있는 책이 나왔다.  

『루소포비아: 러시아 혐오의 국제정치와 서구의 위선』이라는 책이다. 저자인 기 메탕은 스위스의 저널리스트이자 사회정치활동가로, 스위스 언론 ‘제네바 트리뷴’지의 편집장과 대표를 역임했다. 1996년부터는 스위스 프레스클럽 이사를, 2005년부터는 스위스-러시아 및 CIS(독립국가연합) 국가 상공회의소 대표를 맡고 있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으나, ‘루소포비아(Russophobia)’란 용어는 이미 유럽에서는 널리 사용되는 말이라고 한다. 

‘루소’가 러시아를 지칭하는 말이니, ‘러시아 혐오증 또는 공포증’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러시아라는 국가와 러시아인 일반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말한다. 러시아라는 국가 체제와 대외정책의 어떤 특성을 과장하거나 왜곡해서 마치 그것들이 원래부터 러시아인들의 열등한 민족성에서 기인하는 것처럼 규정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오래된 이 ‘루소포비아’는 그간 서구사회에서 러시아라는 강력한 상대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묶어 놓고 그 행동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드는 선전도구의 기본 틀로 사용되어 왔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에 대하여 ‘오랫동안의 직업적·개인적 경험과 2014년 우크라이나 위기에 대한 반응의 결과물’이라고 설명한다. 

오랜 기간 언론인으로 종사해오면서 특히 러시아에 대해서만 도무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웠던 서구사회의 편견과 판단에 대해 큰 의문과 문제의식을 가져왔다고 한다.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솔제니친’에 대한 태도였다고 회고한다. 

모두 잘 아시다시피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수용소 군도』로 유명한 작가인데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바 있다. 서구사회는 그의 책을 연이어 출판하고 칭송하고 반소비에트 운동의 지도자로까지 찬양했다. 솔제니친이 자신의 조국, 공산주의 러시아를 비판하는 딱 그 순간까지만 말이다. 그러나 솔제니친은 미국으로 망명한 후, 서구사회의 일반적인 기대처럼 ‘반공주의 전선’의 투사로 활동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 옐친 시절 대혼란의 격변기 속에서, 러시아의 이익을 배신한 ‘서구주의자들’과 ‘다원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을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서구사회는 솔제니친을 ‘정신 나간 노인네’ 취급을 했다. 저자가 보기에 입장이 돌변한 것은 솔제니친이 아니라 그를 대하는 서구사회였기에, 이런 모습에 ‘경악스러웠다’고 말한다. 


2013년 우크라이나의 마이단 광장에서는 폭동이 일어나 쿠데타로 발전하고 결국 내전으로 이어졌다.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 시기로부터 잉태되었던 셈인데, 저자가 이 책을 쓰기로 최종 결심한 것도 바로 이때다. 서구 언론이 집단적으로 보였던 ‘러시아 히스테리 증세’, 러시아의 모든 주장은 ‘선동’으로 치부하며 오직 그에 대한 서구사회의 비난만을 합리화하는 이른바 ‘기소 저널리즘’에 직면하여 저자는 이 역겨운 상황에 답변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멀리는 중세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리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루소포비아는 근대에 들어와 러시아제국이 나폴레옹의 침략을 물리치고 유럽의 강대국으로 떠오른 19세기에 특별히 강화되었다. 그리고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서구의 대중매체와 정치 언어에서 러시아를 대신한 소련은 ‘악의 제국’으로 표상되기에 이른다. 


‘루소포비아’는 우리 근대사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말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남하 저지라는 공통 목표를 가진 영국·중국·일본의 합동 선동을 통해 한반도에서도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1880년 일본에 갔던 김홍집이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으로부터 『조선책략』이라는 책자를 받아다 조선 궁중으로 가져갔는데, 그 책략의 핵심이 ‘친중결일연미거아(親中結日聯美去俄)’였다. 마지막 단어 '거아'는 러시아를 제거하자는 말이다. 당시 서구 열강 중에서도 러시아는 한반도와 동북아에 가장 관심이 약한 편에 속했는데도 말이다. 그로부터 현재 ‘루소포비아’가 한국 사회의 언론계와 학계, 정계, 그리고 외교·안보 부문의 정책결정자들에게까지 깊숙이 스며들어 있음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루소포비아’는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를 두고서도 다음의 상식적인 의문점들을 모두 봉쇄해버린다. 

- 러시아의 팽창주의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면 유럽의 팽창주의는 사실이 아니던가? 최근 몇 년 동안 누가 더 넓게 확장했는가, 유럽연합인가 아니면 러시아인가? 나토인가 러시아인가?

- 러시아는 이미 동유럽에서 서방에 위협을 가하고 있던 핵미사일이나 탱크를 제거하지 않았던가? 러시아는 베를린에서 2,000km 떨어진 곳으로 군대를 후퇴시켰는데 반해, 같은 시기 미국은 거꾸로 폴란드, 체코, 발트해 연안 국가들에 군대를 파견하고 터키의 로켓과 세계 곳곳의 해군기지를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 미국의 군사비는 냉전 이후 25년 동안 오히려 몇 배 더 증가하지 않았던가? 두 진영 중에 군비를 확장하면서 1년에 5천억 달러를 쓰고 있는 쪽은 어디인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의 유일한 목적은 러시아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 러시아를 꼭 증오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것이다. 이 책은 절대로 서구에 반대하는 감정을 부추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이 역사적으로 전해 내려온 편견의 무게를 보여줌과 동시에 서구를 안으로부터 갉아먹어 자신의 많은 부분을 잃게 만든 천년에 걸친 반목, 그 감추어진 전쟁을 멈추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목표는 달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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