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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ㅣ 펭귄클래식 28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은정 옮김, 앤서니 브릭스 서문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사건 사고 기사에 묘사된 죽은 이들의 끝은 허탈하다. 저리 죽을 줄 알고 살아왔을까? 허무한 물음 끝에 남는 것은 평화로이 자연히 마지막을 맞이하는 게 행복하고 좋은 죽음이다는 평범한 생각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한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을 들여다보았다. 죽음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 걸 느꼈다. 삶의 마지막 한숨은 어떤 죽음이든 형태든 전부 공허하지 않을까, 허무함이 덮쳤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것에 고민하고 집착하는 나이에, 이반 일리치의 덧없는 인생을, 죽으면서 그가 겪었던 고통을 피부로 느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그보다 더 내가 관심 있었던 것은 열심히 살던 젊은 그를 보는 것이었다. 어디로 어떻게 달려가는지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의 노력이 그리도 무상할 수가 없었다.
이반 일리치는 평생의 꿈을 이룬 사람이다. 잘 먹고 잘 사는 판사로서 오용하지는 않았지만 오용할 권력이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야심 찬 사람이었다. 그가 그렇게 되기까지는 나름의 철칙과 노력이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위선과 고상함을 언제 떨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한 만큼의 신뢰와 인간관계를 쌓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훌륭히 자기 일을 소화하고 명망을 얻고 나니 곧 내리막길의 시기가 찾아왔다. 늘 그래 왔던 대로 필요한 만큼을 끊고 맺을 줄 알았던 능력을 가정에서는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위태로움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골치 아플 때 잘 쓰던 방법, 옳지 않다고 여기는 생각을 다른 생각으로 대체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외면하였다.
그렇게 살던 그에게 죽음이 형태로 다가왔던 것은 아주 단순한 시작에서였다. 그를 괴롭히던 문제를 여느 때처럼 쫓아버린 채 집안 가꾸기에 힘쓰던 중 그만 옆구리를 다치게 된 것이다. 작은 통증은 알 수 없는 병으로 악화되었고, 기다릴 게 죽음밖에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후 소설은 이반 일리치가 죽음을 맞는 결말까지, 좁아진 시야로 한정되어 흘러간다. 소파 한구석에 누워 주인공이 자신의 꿈을 가꾸었던 게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과정이, 독자로서도 마음 아픈 일이었다. 이반 일리치가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의 세계를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들, 거짓으로 일관하는 무관심한 가족들과 동료들 사이에서 시달리는 지독한 외로움이 왜 이렇게 무섭게 비참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이반 일리치가 말하는 멍청이가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죽음이 주는 엄숙함을 일부러 외면하는 사람들은 이반 일리치가 말한 대로 '멍청한 것들'이다. '참 태평스럽기도 하단 말이야. 내가 먼저 가고 자기들은 나중에 갈 뿐인데, 그것도 모르고 말이지. 결국 죽는 건 다 마찬가지라고.'(p94)
누구나 죽는다는 명백한 진리를 외면한 채로 지금의 젊은 육체가 다인 것인 양 구는 오만함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통해 느끼는 생기가, 역겹다. 경멸스럽다. 그런데 나 자신은 그런 적 없다고 단정할 수 있나?
그는 행복했던 지난 삶에서 최고로 좋았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마음속에 그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의 지난 삶에서 가장 좋았던 그 모든 순간들이 이제는 그 당시에 만족스럽게 여겼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중략) 그때는 기쁨으로 여겨졌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그의 눈앞에서 허망하게 녹아내리면서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으로, 더러는 구역질나도록 추한 것으로 변해버렸다.(p130)
이반 일리치가 죽어가며 애타게 찾았던 것은 자신의 고통을 위로해줄 한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이가 없다는 사실이 그를 더 빨리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게 참 씁쓸하다. 진실한 신뢰 속에서 순간순간을 사랑하고, 삶 뒤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삶 앞에 겸손해야 할 이유를 이반 일리치의 죽음으로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