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레
류명찬 글, 임인스 원작 / 보리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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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신과 싸워 사람들을 구한다는 으시시한 소재를 코믹하게 그려넣어 웃음과 감동을 준 임인스 작가의 재치와 재능은 정말 뛰어나다. 이렇게 '싸우라, 귀신아'라는 웹툰으로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되었는데, 그의 데뷔작은 전혀 다른 분위기의 '걸레'라는 작품이다. 얼마전 소설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만화 이전에 글 먼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읽게 되었다.

 

너희가 엎질러 버려 다시는 주워 담기 힘들게 먼지와 뒤섞여 더럽혀진 것들을 왜 우리가 걸레가 되어서 닦아야 되지?

왜 처음부터 끝까지 더렵혀지고 왜 더러워진 것을 정화시키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해?(P8)

 

진짜 걸레는 그깟 호칭으로 사람의 가치를 차가운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너희들의 썩은 입이다.(P64)

 

제목처럼 내용도 자극적이다. 걸레하면 무슨 생각이 떠오를까? 걸레는 주로 흰천의 것을 사용하는데, 먼지나 오물이 닦은 후, 그것이 깨끗하게 지워졌는지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깨끗하게 빨아도 그것이 도로 수건으로 쓰이는 경우는 드물다. 깨끗해보여도 오점이 있는 더러운 존재, 그런 좋지 않은 이미지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보면 우리 주변에 '걸레'라는 말이 통용어가 된것은 아닌지, 씁쓸하기도 하다.  

 

 

고등학생이었던 소년이 10년만에 의식을 되찾게 된다. 그에게는 같은 반, 좋아하는 소녀가 있었고 두 사람 다 학교를 즐겁게 다니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어느날, 소녀에게 학교 이사장의 아들과 그 무리들이 접근하게 되고, 그들은 거부하고 고발했던 소녀를 반복적으로 겁탈하고 동영상까지 유포하게 하게 된다. 힘있는 자들에 의해 사건은 무마되지만 소년은 그 일의 충격과 죄책감을 안고 옥상에서 뛰어 내린다.

 

밝고 당찼던 소녀는 가족에게도 거부당했고 매춘을 하는 '걸레'로 성폭행의 주도자였던 남자는 사랑스런 딸을 낳아 가정을 이루고 사회적으로도 높은 지위의 '위선자'로 살고 있다.

 

10년전의 사건을 다시 맡게된 한 형사가 일을 파헤치게 되면서 덮어두었던 비밀이 드러나게 된다.

 

이런 일을 심심찮게 뉴스나 인터넷으로 보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남의 일같이 느껴지는 것은 정말 어쩔 수가 없다. 주도자였던 남자가 자기 딸에게도 그런 비극이 일어날까봐 두려워하는 장면은 정말 이 작품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다. 이런 일이 가까운 누군가에게 일어난다면? 소설이 더이상 소설이 아니라면? 이런 질문을 계속 해서 던져주는데 그 과정에서 소개되는 예상하지 못했던 가족 간의 성범죄도 충격이다. 

 

소설의 내용이 새롭다, 참신하다고 못느끼는 까닭은 기사 속 현실에서, 많이 듣던 익순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걸레는 빨아도 새로워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걸레를 걸레로 만드는 사람들은 누군가,라는 말에 또 한번 충격이 있었다.

 

아쉬운 점은 만화를 소설로 바꾸는 과정이어서 그런지 어색한 부분이 꽤나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 권력자들의 이중성, 성범죄 등 말하고자 하는바가 제대로 마무리 되지 않은 부분, 주인공들의 심리 묘사가 극히 적어서 캐릭터 몰입이 힘들었다는 점 등등. 또 소설의 '걸레'로 여겨지는 희생자가 죽는 장면은, 마음을 정화하고 상처를 치유할 기회조차 누리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주기에 너무 안타깝다.

 

작가가 언급한 '깨끗하게 만드는 방법'이 사실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 차라리 희생자를 살려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게끔 설정했다면,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그녀의 죽음이 마지막 장면을 빛나게 하기도 했다. 좀 서둘러 끝내버린것 같지만;;;) 

 

이런 사회를 변하시키고자 울부짖는 이들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희망의 마지막 장면은 여운을 남긴다.   

 

 

아무리 더러운 때가 스며들었다 해도 반드시 깨끗하게 만드는 방법이 존재해.

그런데 너희들은 단지 더럽다는 이유로 단지 불결하다는 이유로 닦아 줄 의지도 없으면서 그것을 차가운 바닥에 내던진 채 이렇게 불러 걸레라고!(P180)



 

 

다음은 사랑하는 소녀를 잃게된 소년의 절규.

이 소설은 현실이다, 라는 사실을 일깨워 먹먹하다. 

 

"이렇게 찢어지는 아픔인 줄 몰랐습니다. 다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화가 나기는 했지만 인터넷에서 욕 몇 마디 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고 나니 제 가슴이 이렇게 아플 줄 몰랐습니다. 이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이 년 동안 들어온 신음 소리 그리고 사회에 드러나지 않고 부정의 그림자 속에 감춰진 사건들. 그 수백 수천 건의 성폭행 사건 속의 제삼자들. 부모, 애인, 친구, 그리고 그들을 사랑했던 수백 수천 명의 아픔이 느껴집니다. 가슴이 찢어집니다. 이런 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자기 손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그들을, 나를 이런 제삼자들을 알고 계십니까?(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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