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9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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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평전은 <전태일 평전>이 최고다. <체 게바라 평전>은 그것을 뛰어넘지 못했다.
그냥 위인전이다. 성인판 위인전이다. 나는 위인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혁명을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던졌던 게바라의 모습은 좋다. 문득 유시민씨가 썼던 글이 생각난다. 유시민씨가 그랬다. 자신이 대학에 다닐 때 게바라의 책은 금서였고 그의 이름조차 자유롭게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정말 개나 소나 모두 게바라를 이야기하고 그의 얼굴이 새겨진 셔츠를 입으며 그의 얼굴포스터가 곳곳에 부착되어 있다. 언뜻 보기엔 사회가 진보한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게바라가 더이상 자본주의에 위협적인 인물이 아니기에 자본은 게바라를 허용했다는 것이다. 그래... 혁명가 게바라는 더 이상 자본주의에 위협이 되지 못한다. 대신 그는 자본의 상품이 되어버렸다. 그런 현실이 슬프다. 아무 말 없이 박재되어 있는 게바라의 모습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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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숟가락 하나 - MBC 느낌표 선정도서
현기영 지음 / 실천문학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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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찾아가는 그 길,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 어릴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에 다정한 옛 친구 나를 반겨 달려오는데...' 동물원의 '혜화동'이라는 노래 가사 중의 하나이다. 나는 과거 언젠가 이 노래를 들으며 찔끔찔끔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있다. 일정한 나이를 지난 성인에게는 공통된 현상 중에 하나가 바로 유년시절을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살아온 삶이 결코 짧지 않음에도 모두들 하나같이 어린 날의 짧은 순간을 그리워한다. 그 순간이 극단적으로 표출되었던 것이 바로 2000년에 몰아쳤던 동문 찾기의 열풍이 아니었던가. 그 동문 찾기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초등학교 시절의 친구들과의 눈물어린 상봉이었다.

이 책은 장편소설이란 타이틀이 걸려있지만 소설이기 보다는 하나의 '성장 다큐멘타리'라 할 수 있다. 작가 현기영이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잃어버렸던 혹은 잊고 지냈던 자신의 어린 날들을 떠올리며 타임머신 타고 만나고 돌아온 '만남후기'처럼 다가온다. 세상 참 좋아졌다! 다른 이의 아름다운 과거를 이렇게 편하게 앉아 읽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열린 귀와 마음만 있으면 우린 현기영의 과거를 공짜로 들을 수 있다.

(죽음이 가르쳐 준 것)

작가 현기영은 10대의 전부를 자신의 고향인 제주도에서 보냈다. 41년도 생이니 질곡의 역사 현장에서 그는 성장했던 것이다. 20대부터 평생을 서울에서 보냈으며, 그동안 자신은 알게 모르게 고향을 잊고 지냈던 것이다. 그러던 중 평생을 언제나 원망만 했던 아버지의 죽음은 다시 그를 고향으로 불러들였으며, 아버지 시신을 그가 거두게 된다. 온기가 사라진 아버지 육신을 염하면서 그는 평생 처음으로 아버지의 성기를 보고 만지게 된다. 그 때 현기영은 오열을 토했다고 하며 그 순간이 바로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라고 한다. 아버지의 성기는 바로 자신의 생명이 우연에 의해 생겨난 최초의 지점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그는 잃어버린 자신의 삶과 자신을 만들었던 모든 것을 찾아 추억의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이 책은 이처럼 작가의 어린날의 경험과 고향 풍경, 그리고 그 과정에서 느낀 것들을 솔직담백하게 서술한 것이다. 하기에 성장소설이라 불리는 것 같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사람이 자신을 살피고 돌아보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작가 또한도 자신과 죽음 사이에 존재했었던 아버지의 죽음을 보면서 또한 자신도 벌써 노인네가 된 것을 느끼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죽음이 있었기에 그는 겸손해질 수 있었고, 주변을 애정의 시선으로 살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지상의 숟가락 하나>는 한 개인 성장에 대한 과거의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가 이 책을 읽는 것은 다른 이의 과거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바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물음 때문이다. 현기영의 어린 날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를 키워낸 것은 그의 의지와 부모님만이 아니었다. 그가 온전한 사람이 되기 까지는 그의 소꼽친구가 있었고, 가축이 있었고, 그가 심심하고 외로움 때면 찾았던 바다도 있었다. 이렇게 이 책은 사람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주변의 작은 것들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잊혀진 것, 그리고 재구성 되어야 할 것)

아마도 사람들이 유년기를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순수함 때문일 것이다. 그 순수함이 그립지만 알게 모르게 잃어버린 자신의 모습이 안타깝고 싫어서 그 때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 일게다. 그러함에도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단지 '어쩔 수 없음'의 상황 때문만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때의 마음이지 그 시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나 바삐 앞을 바라보면서 아니 앞만을 바라보도록 강요받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정말로 '정신없이' 살아왔다. 바삐 살아도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목적이 무엇이 모르는 것이 매한가지다. 그렇다면 천천히 살피는 것은 어떠한가. 잊혀진 것들을 다시 불러보면 어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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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예담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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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미술도 없고 예술도 없었던 미술 교육이었지만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인물이 화가였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조금 더 유식한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귀를 자르고 초상화를 그렸다는 것을 알 것이다. 나는 그저 빈센트 반 고흐라는 화가가 있었구나 하는 정도만 알고있을 뿐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화가, 태양의 화가라 불리우는 세계미술사의 지울 수 없는 화인. 현재 그의 작품은 엄청난 가격에 경매되고 있으나 정작 그는 37년의 짧은 삶 동안 지독한 가난에 시달림. 그의 동생 테오가 경제적 지원자였기에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음. 1890년 권총으로 자살.

10년 넘게 미술교육을 받았음에도 정작 그림을 감상할 줄 모르는 우리. 영혼의 화가 고흐를 몰랐던 나. 미술 감상은 고사하고 예술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을 사치, 혹은 고상함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 하긴 경제적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예술은 곧 사형선고일테니 그 상황이 이해되긴 한다. 그래도 잠깐 짬을 내서 호흡을 고르고 빈센트 반 고흐라는 예술가와 대화를 나누어보자.

예술의 길.

<반 고흐, 영혼의 편지>는 고흐가 동생 테오와 동료인 고갱 등에게 보낸 편지를 옮긴 것이다. 그렇다고 그 편지들은 단순한 안부를 묻는 편지가 아니다. 고흐가 어떻게 그림을 그리게 되는지, 예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등등이 편지의 내용이다. 하기에 우회적인 경로가 아닌 고흐의 입을 통해서 그의 인생관과 예술관을 들을 수 있다. 오늘날 마르크스가 존재할 수 있는 배경에는 엥겔스가 있었듯이 고흐에게도 동생 테오가 있었기에 영혼의 화가가 되었다는 것은 과언이 아니다. 이 책 대부분은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들이다. 고흐는 경제적인 모든 지원을 테오에게 의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사상적 변화 추이를 언제나 테오에게 상담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경제적 문제인 것 같다. 책 속의 고흐는 언제나 가난한 자신을 이야기하며, 화가들이 경제적 어려움 없이 그림에 전념할 수 있는 사회를 갈구한다. 그러나 아무리 배가 고파도 예술에 대한 열정은 멈추지 않는다.
고흐는 세상을 표현하고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즉 완벽한 예술적 그림을 그리기 위해 언제나 고뇌하고 그것에 알맞은 색을 찾으려 노력한다. 예술은 천부적 재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끊임없는 관찰과 노력이 중요하다고 고흐는 말하고 있다. 고흐가 생각하는 예술은 인간의 감정과 혼이 깃들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언제나 상황과 본질에 적합한 색을 조합하기 위해 고뇌했다. 그러면서 화가는 그리기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영혼을 표현하는 사람이라 이야기한다. 고흐가 점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을 때 평생 자신을 도와준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말을 한다. '나를 먹여 살리느라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마지막 '내 영혼을 주겠다'라는 고흐의 말은 그의 삶과 예술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생가한다.

예술은 무엇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두 가지에서 행복했다. 하나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감상이었다. 책 속에는 많은 고흐의 작품사진이 담겨있다. 특히 작품사진이 편지 내용과 일치하게 배치되어 있기에 그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의 화가 화보집을 본적이 없었는데 그것을 처음 경험했기에 그 풋풋한 생소함에 행복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과연 예술은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할 수 있었기에 행복했다. 아마도 그런 고민을 본격적으로 했던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아주 조금이라도 고민을 할 수 있었다. 정말... 정말... 예술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살아가면서 미술 감상도 하고 음악 감상도 하며 살아야겠다. 알게 모르게 이 책을 통해서 배우게 된 것은 이런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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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땅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9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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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하기에 앞서

언젠가부터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내 행동에 변화가 생겼다.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가끔씩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는 게 그것이다. 미처 내가 알지 못했던 바를 일깨워주는 책, 글의 구성이 새로운 책, 그리고 내용이 깊어 다시금 음미하게 하는 책 등 이른바 나에게 '감동적'으로 다가온 책을 읽고 난 후에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는 것이다. 오늘 임철우의 <아버지의 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내 손은 아주 자연스럽게 서로 맞부딪치고 있었다. 이 책은 충분히 박수 받을만하다. 그의 작품 <봄날>이 작가 자신이 그토록 소망했던 것을 표현한 것이라면 이 책은 작가 임철우가 어떤 인물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 아름다운 불협화음

작가의 초기 단편들을 수록한 <아버지의 땅>은 모두가 암울한 상처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밝은 빛 혹은 내일로 열려진 희망들은 존재하지 않는 오직 어둠뿐이다. 아주 잠깐 여명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금새 먹구름에 가리워진다. 그런데도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사실적이라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바탕으로 희망은 조직될 수 있다는 신뢰의 감정이다.

11개의 작품들 모두는 사회적 역사적 환경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곡두 운동회」, 「아버지의 땅」, 「뒤안에는 바람 소리」, 「그 밤 호롱불을 밝히고」는 1950년 한국전쟁이 만들어낸 사람들의 질서와 아픔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 밖의 작품들 또한 개인과 주변 상황과의 긴장관계를 그려내고 있다. 이 들 작품 모두는 섣부른 희망이나 모순극복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작가 혹은 우리들의 희망사항일 따름이지 객관에 존재하는 실재의 모습은 아니다. 전쟁을 겪고 80년 광주를 겪은 상황에서 어떻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희망을 노래는 가해자의 은폐기도 혹은 우리들의 용기 없음의 표현일 뿐이다.

작가는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 대신 아픔과 어둠을 말하고 있다. 결코 조화롭게 융화될 수 없는 개인과 사회를 이야기하고 있다. 상처와 아픔은 현재진행형이 될 수도 있으나 대부분 과거의 문제이다. 그것들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바로 기억의 형상화와 실재화이다. 작가는 근본적 문제해결을 위해 희망 대신 어둠과 아픔을 말했던 것이다. 그래서 임철우의 불협화음은 아름답다. 가슴이 쓰리고 아프지만 읽는 이들이 문제해결 가능성의 중심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기에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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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산, 흰 새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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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학에 오면서부터 분단에 대한 인식과 문제의식은 희미했다. 그도 그럴것이 조금은 경직된 수원대 운동풍토에서 좌파적 시각과 행동을 취하며 분단에 대해서 고민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일 수 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분단과 통일에 대한 생각은 알게 모르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혹은 생각할 필요가 없는 문제로 전락한 것 같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작년의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화해의 분위기는 그동안 소홀하게 생각했던 분단문제를 고민하게 했다. 아니 그런 고민 없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해야할 것 같다. 어찌보면 반강제적으로 고민해야만 했던 그 문제가 결국 50여년 동안 우리를 옭아맸던 커다란 철사줄의 하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분단은 지리적인 땅의 갈라짐, 국토의 갈라짐, 부모와 자식의 갈라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코 앞에서 막대기 부러지는 것을 목격하듯 가시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렇게 가시적인 것이 분단이었다면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다. 분단은 내 삶, 그리고 우리 삶을 동강내고 무참히 짓밟는 것이었다. 이것이 정말 무섭고 분단이 우리에게 전해준 가장 커다란 상처이자 아픔이다.

삶이 동강난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다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느낄 수 있을 땐 이미 시간이 지나 삶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외부적으로 아주 조금씩 삶을 갉아먹는 것을 인지하고 개선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긴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인 것이다. 이처럼 수십년 동안 우리네 사람들의 삶을 동강내고 비참하게 아작냈던 것은 바로 분단과 전쟁이었다.

이런 분단과 전쟁의 경험이 조용하고 순박하며 자연의 이치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파괴하고 평생을 괴롭혔는지 보여주는 사실아닌 사실이 바로 임철우의 소설 <붉은 山, 흰새>이다. 전쟁 속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좌와 우도 모르는 작은 섬 낙일도 주민들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세력이 국방군이냐 인민군이냐에 죽고 죽이고 증오하고 저주하는 모습과 수십년간 간직해야만 했던 아픔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황석영의 <손님>이 같은 전쟁을 경험한 개인과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면 임철우의 <붉은 山, 흰 새>는 고향이라는 공간적 상황이 추가되면서 그 속의 집단적인 많은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이는 전쟁과 분단이 몇몇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의 문제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자신의 의지와 경험과는 무관하게 상대방을 무수히 적으로 만들고, 살기 위해 자신을 속이고 상대방을 기만하는 낙일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지며 나무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시아버지를 죽인 '빨갱이'의 씨를 받은 귀단. 그렇게 자기 원수의 자식을 키워야만 했던 원구. 그래서 평생 아버지로부터 증오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던 무석.... 누구를 욕한단 말인가.... 누구를 원망한단 말인가... 그 상처와 아픔을 어찌 치유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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