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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의 온도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4
정다연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1월
평점 :
제목을 보고 궁금해졌습니다. 말에는 온기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책에도 과연 온도가 있을까 하고 말이죠. 마침 책의 제목도 『다정의 온도』이고 하니 책을 읽으며 이 책에서 전해지는 온도를 느껴보려 했어요. 차가운 계절의 차가워지기 쉬운 시대 속에서 책 속 '서유리 찾기'의 이야기처럼 '다정'의 행방도 찾아보며 책을 읽었습니다.
책의 저자인 정다연 시인은 201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을 했고 세 권의 시집과 『마지막 산책이라니』라는 에세이가 있는 작가입니다. 개인적으로 시인이 쓴 산문이나 에세이를 좋아하는데 글 속에서 가끔 시적인 문장이나 상황을 만날 수 있어 선호와 애정을 왔다갔다 하고 있어요. 이 책에서도 그런 문장과 이야기들을 기대하며 책을 읽어나갔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정다연 시인의 공개 일기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책을 덮을 때에는 정다연 시인과 괜히 친해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저자인 정다연 시인과 함께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엄마와 아빠, 친구 윤주, 반려견 밤이. 저는 엄마와의 이야기를 재밌게 읽었고 어릴 때 작은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여주던 엄마에게 어른이 된 후 봉숭아물을 들이는 이야기가 따뜻하고 좋았네요. 또 엄마의 예물을 물려받아 소중히 간직하고 그것을 책에서 알림으로써 그것을 더 아끼고자 하는 마음이 커지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 조용히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또 따뜻함이라면 반려견도 빠질 수 없겠죠. 밤이와의 산책 이야기, 카페로 알아서 가는 밤이 이야기, 밤과 함께 방에서 머물며 떠오르는 생각을 말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이 읽으며 길고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저도 강아지를 좋아하지만 그에 따르는 책임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기에 선뜻 함께 하지 못하는데 밤이와의 우정과 사랑을 보며 저자는 참 용감한 사람이구나 느끼기도 했습니다.
저자가 여행을 즐겨 하는 것도 저에게는 의외였습니다. 먼 아프리카까지 다녀왔다니 조금 놀랐고 한 달 동안 트럭을 타고 다닌 경험 또한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네요. 자기 삶을 개척하며 지내는 현지 가이드였던 루루와 콜린의 이야기를 보며 저의 지난날을 돌이켜 보기도 했네요. 어쩌면 여행은 풍경을 만나는 일보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더 크고 대단한 일이겠구나,라는 생각을 다시금 해봅니다. 뜨거운 햇살에 힘들어하는 동료를 위해 팔 토시를 줄 수 있겠냐고 부탁하고, 사람들이 선뜻 주는 장면은 김이 풀풀 나는 뜨거운 호빵을 한 입 베어 무는 것처럼 달큰하고 따뜻한 이야기였습니다. 저자의 경주 산책 이야기는 제 여행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 친근함이 느껴졌고 꽤 오랫동안 가보지 않았던 경주를 가볼까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시 수업을 하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시제를 구하는 일이 어려울 때, 이런 방법을 제시하는데 저도 참고를 해봐야겠습니다.
무엇을 쓸지 막막할 땐 엄마가 내뱉은 한마디, 언젠가 가보았던 공원과 주민센터, 나만 할 것 같은 공상을 떠올려 보면 좋아요.
(p. 84)
시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오브제들이 있죠. 예를 들면 새, 돌, 나무, 초 같은 것들이 있을 텐데 저는 그것들의 상징이 어렵다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초가 왜 시에서 많이 쓰이고 시인들이 좋아할까라는 의문에 조금의 대답을 들은 것 같아 앞으로 시에서 초를 만나면 이 문장들을 생각해 볼 것 같네요. 그러고 보니 겨울밤엔 초를 켜기 좋은 계절이군요. 먼지가 쌓였던 향초를 꺼내봐야겠습니다.
초는 외곽이 아니라 중심부터 녹아내렸다. 거기가 자신의 핵심이라는 듯이. 내부를 보호하기 위해 겉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안쪽부터 정직하게 불탔다. 몰랐던 사실도 아닌데 마음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그 모습이 무언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육체와 닮아 보였기 때문이다. 요령도 없이 자신의 안쪽을 허물어뜨리며 전혀 다른 형태로 변모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자 시시각각 변화하는 이 풍경을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부로부터 발생한 기름이 왈칵 쏟아질 때는 포옹하는 자세로 굳는 일에 대해 떠올렸다. 누군가를 껴안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텅 빈 공허까지 안아줄 각오가 되어 있는 자세.
(p. 132)
촛농이 타고 스스로 꺼진 자리. 매끄럽지만 울퉁불퉁한 표면을 만져보았다. 뜨겁지 않을까 싶었는데 따뜻한 온도가 느껴졌다. 이제 막 새로운 모양을 다 만든 참이라는 듯이. 하나의 사물이 만들어낸 끝. 그 끝이 따뜻했다는 게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면 허무맹랑해 보일까. 어떤 일의 끝이, 무언가가 떠나고 딱딱하게 굳은 자리가 매번 따뜻할 리 없지만, 이토록 따뜻하기도 하다는 것.
(p. 134)
이 책의 온도는 사람의 체온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을 했었죠. 왜냐하면 그냥 온도 혹은 사랑의 온도가 아니라 '다정'의 온도이기 때문입니다. '다정'에서 전해지는 정다움의 온도는 사람이 내미는 손 같지 않을까요? 이 책은 찾아온 밤을 환대하며 따뜻한 침대에서 누워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따뜻함에 따뜻함을 더해 겨울이면 장갑과 주머니에 숨어있는 손을 선뜻 내밀 수 있게 된다면 좋을 것 같아요. 서울에 가면 중림동을 찾아가 봐야겠습니다. 이 책을 들고 간다면 더 좋을 것 같네요.
밤은 신비로운 힘을 지녔다. 사물의 형체가 감추어지지 않은 낮에는 오히려 보이지 않았던 것을 어둠 속에서 드러낸다. 산책로에 버려진 검은 비닐봉지도 누군가 버리고 간 맥주캔도 가로등 불빛을 받이며 반짝인다. 생기 있고 낯설게. 밤 산책을 하면서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
(p. 141)
*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읽고 개인적 감상을 적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