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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백 리 퇴계길을 걷다 - 지리학자, 미술사학자와 함께
이기봉.이태호 지음 / 덕주 / 2022년 4월
평점 :
양반의 도시 안동에 가면 #도산서원 이 있다. 도산서원은 지식을 구축하고 이를 특정 경로를 통해 확산시키는 기초 단위였다. 말하자면 서원은 이 공동체들이 작업하는 미시 공간이었던 것이다.
도산서원의 서적 간행은 지식을 다른 곳으로 전달하고 퍼뜨리는 역할을 맡았고, 지식 사이의 교환이 일어나도록 도왔다.
또한 서로의 인적 연망관계도 다양하게 했다. 이처럼 도산서원은 지식을 발견하고 저장해서 정교하게 만드는 장소가 되었다.
서점이나 책을 유통시키는 시장이 극히 드물었던 조선사회에서 지방의 지배 엘리트들은 이렇게 자신들이 선호하고 널리 알리고 싶어했던 지식을 퍼뜨렸고, 그 과정에서 서로 정보와 생각을 공유하는 담론 공간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도산서원은 퇴계의 학문적 명망과 함께 시간이 흐를수록 영남지역뿐 아니라 전국적인 명성을 누렸다. 안동 중심 영남에서 이황은 학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영남, 특히 안동지역의 문집 간행을 저자의 학문적 업적의 결과라기보다는 문족을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더 컸다.
실제로 조선 후기 문집의 간행은 조상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후손을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후손들은 문집을 통해 문중의 결속을 다지는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문중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크게 드러내 보였다.
간행된 문집을 지역의 사족과 다른 문중에 배포함으로써 문중의 건재를 널리 알리기도 했으며, 문집의 공유를 통해 다른 문중과 학문 및 사상뿐만 아니라 사족 공동체 의식을 공유하기도 했다. 문집 간행은 문중의 생존 전략이었던 것이다.
서원이 강학과 장수를 위한 기구임을 그렇게 강조한 퇴계 역시 현실에서 서원을 세울 때는 계기를 사림계가 존봉하는 인물의 연고지에서 구했다.
성주에 고려 말의 학자 이조년李兆年을 위해 영봉迎鳳서원을 건립하려 할 때 김굉필의 처향妻鄕이어서 왕래했다는 연고를 들어 함께 제향할 것을 제안한 것이라든가, 특히 예안 출신의 인물인 역동易東 우탁禹倬에 대해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없다는 것은 예안 사림의 수치라고 하면서 제자들에게 역동서원의 건립을 독려했던 것이 좋은 예다.
이산서원이 퇴계 제향에서 기선을 잡았지만, 퇴계가 벼슬할 때를 제외하고는 평생을 머물렀고 특히 만년 10년 동안 많은 저술 문자를 남기면서 문인들과 더불어 강학하던 향리인 도산에 서원이 없을 수는 없었다.
도산에 서원을 세우자는 여론이 일어나기는 퇴계의 장례가 끝난 선조 4년 봄, 아마도 문집 편찬을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던 역동서원의 모임에서였을 것이다.
이후 서원을 세우기 위한 움직임이 공식화된 것은 이듬해인 선조 5년 4월에 열린 도산서당 문도들 모임에서였다.
이 기록은 서원 건립에 관여했던 몇몇 문인의 연보에 공통되게 나오고 있다. 이때의 모임에서 ‘선사를 제향하는 사묘尙德祠’를 도산서당 뒤에 세우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도산서원이 완성되자 그 위상은 먼저 이뤄진 여강서원을 능가했다. 역시 퇴계의 본거지로서 도산서당이, 명종이 그림을 그려오라고 했을 정도로 서울, 시골 할 것 없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모르나 미처 퇴계 판位版의 봉안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는데 조정으로부터 사액이 내려왔다.
일반적인 사액은 유생이 청액소請額疏를 올리면 예조가 이에 대한 의견을 내고 대신의 수의收議를 거쳐 임금이 결정하는 절차를 밟는다.
한편 백운동서원의 사액에서처럼 풍기군수였던 퇴계의 부탁을 받은 경상도 관찰사의 계문啓聞으로 조정에서 바로 결정하는 경우도 있다.
아마도 초창기였던 만큼 도산서원도 이러한 예에 속하지 않았을까 추정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는 찾기 어렵다.
18세기의 영조 이후 높아진 도산서원의 위상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정조 16년의 도산서원 치제였다. 이때 정조는 규장각 각신인 이만수李晩秀에게 경주에 가서 신라 시조 묘와 옥산서원에 치제하고 돌아오는 길에 도산서원에도 치제하게 했다.
그러나 이때는 단순한 치제로만 그치지 않았다. 영남의 선비들에게 도산에서 과거를 보게 한 것이다. 미리 열읍에 고지되었던 터라 도산서원 앞에 개설된 시험장에 등록한 유생 수는 7000명을 넘었고 수행 인원까지 합하면 1만 명이 운집했다고 한다.
임금이 미리 정한 제목을 전교당典敎堂 앞에 내걸고 응제應製하게 하여 여기서 거둔 시권만 3632장이었으며, 이를 서울로 가져와 임금이 친히 고열해서 두 명을 급제시켰다.
이 책은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았던 우리 국토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퇴계 선생 덕분에 역사의 길, 휴식의 길이 생긴 셈이다. 육백 리 퇴계길을 걸으며 휴식의 시간,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 책속으로:
동호대교 중간쯤에서 뒤로 돌아 북쪽을 한번 바라본다. 지금은 아파트숲으로 변했지만 그래도 북쪽의 매봉(鷹峯)을 중심으로 산줄기가 좌우로 둘러싼 아늑함이 조금은 남아 있다.
남산 오른편으로 북한산 능선들이 아스라이 겹쳐지며 아직도 봐줄 만한 한 폭의 그림이다. 해질녘 하늘 아래 보현봉과 삼각산 능선이 아름답다.
그 옛날 두뭇개나루 앞에는 거대한 모래섬 저자도(渚子島)가 있었고, 나루와 섬 사이의 한강은 호수같이 깊고 잔잔해서 뱃놀이를 하기에 딱 좋았다. 그래서 이곳을 서울 동쪽에 있는 호수란 뜻의 ‘동호(東湖)’라고 불렀다.
동호에 배 띄우고 저자도 모래섬에 내려 이별시를 주고받던 풍경, 지금으로부터 450여 년 전인 1569년 3월 5일 오전, 떠나가는 퇴계 선생과 떠나감을 아쉬워하던 고위 관료들 사이에 벌어졌던 풍경이다.
P.S: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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