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서의 중심 충청감영 공주 - 공주에 새겨진 조선 역사 이야기 공주가 좋다 2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엮음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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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 감영은 조선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충청도관찰사가 업무를 집행하던 관청이다.

충청북도 충주시에 두었던 충청감영에는 중앙의 6조를 그대로 옮긴 6방(이·호·예·병·형·공)을 설치하여 향리를 통해 감사가 도(道)의 사무를 집행하였다.

충청감영을 충주에 둔 이래 충주의 명칭은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충주감영은 207년 동안 계속 충주에 있다가 1602년(선조 35)에 공주로 옮기었다.

이와 같이 감영을 공주로 옮기게 된 이유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충주는 전 지역이 거의 초토화되었으나 공주는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공주는 정유재란 때에 일시 함락된 적은 있으나 충주보다는 피해가 적었다. 또 충주는 사실상 충청도의 동북부에 치우쳐 있었으므로 충청도 면적의 20%에도 못 미치는 남한강 유역의 중심지에 불과하였다.

반면 공주는 충청도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금강 유역의 중심지로서, 금강수로는 물론 충청도 각지의 교통로가 수렴되는 요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충주에서 공주로 감영을 옮기고 감사가 공주목사를 겸하였으며, 이때에 겸도순찰사인 유근이 감영의 설치를 위한 절차를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듬해에 겸목사로 승인을 받아 쌍수산성(雙樹山城)을 수축하고 처음으로 영사(營舍)와 공북(拱北)·진남(鎭南)이란 양문(兩門)을 세우고 가족을 대동하여 입주하였다.

충청감영을 충주에 두게 됨으로써 조선 전기에 충주는 충청도의 정치·경제·사회·문화·교통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충청감영이 공주에 들어서면서 조선 후기 역사의 격변이 공주를 거쳐 갔다. 바로 천주교-서학과 동학이 그것이다.

공주의 황새바위 성지는 조선 천주교 역사에서 가장 격렬한 탄압과 억압의 현장 중 하나였으며, 공주 우금티 고개는 동학혁명에 나선 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의 신식무기에 속절없이 패배한 아픈 역사의 장소였다.

그 자신 동학군으로 나서기도 했던 김구 선생은 공주 마곡사에서 몸을 숨기며 은거한 적이 있고, 해방이 되자 공주를 찾아 동학과 독립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을 기리며 마곡사에 나무 한 그루를 심기도 했다.

김구 선생이 공산성 안의 누각에 지어준 ‘광복루’라는 이름은 이전 왕조시대의 ‘갱위강국’과 같은 꿈일 것이다. ‘다시 나라다운 나라가 되겠다’라는 꿈. 공주는 그런 원대한 꿈을 간직한 곳이다.

이 책은 공주의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소개하기 위해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이 기획하고 엮어낸 역사문화 교양 시리즈이다.

1,500년의 잠에서 깨어난 고대 웅진백제의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소개하는 한편, 호서의 중심지이자 감영도시 공주에 새겨진 300여 년 조선의 역사,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역사와 더불어 근대 공주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가는 유익한 책이다.

📚 책속으로: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부터 공주는 ‘호서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이며, 남쪽으로 가는 첫 번째 관문湖西最要之關防 南下第一關防’이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충청도관찰사로 다시 부임한 유근은 먼저 공산성을 복구하고 산성 안에 자리를 마련한 뒤 충청감영을 공주로 옮겼다.

P.S :출판사로부터 해당도서를 지원받아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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