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양장)
파커 팔머 지음, 이종태 옮김 / IVP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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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누군가를 안다는 것과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필연적인 연속성을 가진다. 인식 주체는 인식 대상과의 얽힘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는 인식 주체가 자신도 인식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거나, 아니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 인식 주체의 자아에 대한  몰이해성, 균형감을 상실한 자아에 대한 오해가 발생한다. 따라서 나를 그리고 타자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또한 나와, 타자와 제대로 관계 맺지도 못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라 할 것이다. 이미 이 관계성의 한계를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여기저기서 깨어짐의 소리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깨어짐이 가득한 곳 중 하나가 바로 교육의 현장이다. 교회에서 특히나 이러한 깨어짐이 가득하다. 인간을 온전하게 하는 은혜를 말하는 교회에 깨어짐이 가득하다는 아이러니. 신앙의 강요가 만들어내는 인식 주체의 무제한적 확대, 증폭은 어느 순간 신앙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과 자신을 혼동하는 것에 이르도록 했다. 

저자가 말하는 "가르침이란 진리의 공동체가 실천되는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다."라는 정의는 따라서 충분히 음미하고 노력해야할 명제임에 분명하다. 저자가 말하는 진리는 '다른 사람과의 언약으로, 서로를 책임지며 서로를 변화시키는 관계를 맺겠다는 맹세로, 미지의 위험에 직면해서도 신뢰와 믿음을 굳게 하는 관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 관계 속에는 인식 주체, 자아가 무제한적으로 증폭될 수 없다. 오히려 잠시 멈추어 서서 타자를 대면하게 된다. 여기서 '순종'이 제시된다.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예속화가 아니라 '타자를 들음, 실재에 대한 귀 기울임'이다. 따라서 타자가 '사물', '대상'이 아니라 '인격'으로 다가올 수 있게 된다. 진리가 관계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이 되는 이유이다. 이는 자아에 갇혀 닫힌 논리로 조작하는 대신, 그 논리를 뛰어넘은 포괄성에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길이기도 하다. 여기서 자아는 진리를 찾는 것 뿐만 아니라 진리가 자아를 찾도록 내어 줄 수 있는 공간을 비로소 갖게 되기 때문이다. 타자가 자신에게 들어오는 것을 포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격적인 관계, 공동체적인 관계, 진리의 공동체가 실천되는 공간을 창조하는 것은 끈질힌 인내를 요구한다.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것을, 자신이 세계에 투사했던 것들을 거두어 그 원천을 자신 안에서 발견할 때 찾아오는 고통, 고독을 견뎌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변화에 직면하는 것은 불안, 고통을 가져다 줄 수 밖에 없다. 새로움, 그것도 알지 못하는 새로움과의 맞닥뜨림은 두려움의 표현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영성이 등장한다. 은혜로의 들어감이다.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할 때 찾아오는 선물, 자신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은혜가 비로소 다가오는 것이다. 자기 발견의 고통 너머에 정죄 없이 우리를 자신에게로 부르는 사랑, 비로소 거기서 자기 기만을 물리칠 수 있고, 진리에 의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공간이 열리는 것이다. "사랑"이다. 침묵과 고독, 그리고 기도 속에서, 영성으로 경험하는 사랑 속에 그 가능성이 실존 속에서 실현될 수 있다. 여기서는 깨어짐 대신 회복이 있고, 온전함의 마주함이 있다. 나와 하나님의 혼동도 자리 잡을 수가 없다.

교사 세미나를 위한 책들을 찾고 읽어보면서 좋은 내용을 읽었다. 꽤 괜찮은 내용이다. 다소 읽기에 지루하고 어려운 듯한 감이 없지않아 있지만 시도해 봄직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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