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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스님의 행복 - 행복해지고 싶지만 길을 몰라 헤매는 당신에게
법륜 지음, 최승미 그림 / 나무의마음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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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이유 없이 고단해지고 팍팍해지는 건 나뿐만은 아니겠지. 요즘은 나만 그런 건 아닐거야 라는 생각으로 하루를 대하는 시간이 늘어간다.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내 방식대로 동질감을 느낀 뒤 무색무취의 위로를 받는다.

 

시간이 흐르는 걸 잡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허무함과 무기력함으로 인생의 여백을 채운다. 내 인생이나 잘 살 것이지, 굳이 남의 인생에 이거 놔라, 저거 놔라 오지랖 넓게 간섭하다 상처를 받는다. 뒤돌아서면 내 자신에게 할 얘기를 남에게 대신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러한 내가 법륜 스님의 행복에서 이 구절을 읽고나서 민낯의 나를 마주한 부끄러운 마음이 든 것이다.

 

넘어지면 넘어지는 것이 나고, 성질내면 성질내는 것이 나입니다. 그런데 나는 쉽게 넘어지거나 성질내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질내는 자기를 보는 것이 괴로운 거예요. 내가 생각으로 그려놓은 자아상을 움켜쥐고 고집하니까 현실의 내가 못마땅한 겁니다.

-p29

 

먼저 화가 나는 이유를 살펴보면 내 마음 속에 '내가 옳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잘난 내가 보기에 다른 사람이 마음에 안 들어서 화가 나는 것이지요. 이런 감정은 내면에 깊이 깔려 있어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에서는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옵니다.

-p65

 

말로 이기는 걸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또 말로 지는 것을 패배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p81

 

'행복'이라는 단어가 표지 상단 가운데 떡 하니 쓰여 있길래 내면의 행복을 찾는 길이 무엇일까 하고 펼쳤건만, 나를 따끔하게 채찍질하는 구절들로 가득하다. '행복'이라는 어쩌면 추상적이고 어쩌면 구체적인 저 단어는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환경과 여건이 만들어내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거다. 내 손이, 내 마음이, 내 몸에 달려있는 모든 것들이 만들어내는 거네. 내가 지닌 마음가짐이 내 행복의 밭이 되는 셈인거다. 행복이라는 튼실한 열매를 맺기 위해선 밭에 자라고 있는 쓸데없는 잡초들을 뽑는 것, 그것이 중요한 작업인 거고.

 

이익을 좇는 삶이 적어도 남들보다 손해는 아닌 삶이라고 생각했고 어느 정도 내 잘난 맛에 살고 있는 게 자존감을 떨어트리지 않는 거라고 여겼는데 이게 내 삶이 이유 없이 고단하고 팍팍했던 원인 같다. 매일 잡히지 않는 존재와 경쟁하듯 긴장하며 살아야 했으니까. 근데 이 책을 읽으니 적어도 내 생각이 무조건 옳다는 기준부터 없애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날 선 내 어투도, 상대에게 꽂는 날 선 내 말도 온화해지지 않을까 싶다. 무튼, 난 행복하게 살아야 하니까. 그렇게 살고 싶으니까.

 

우리가 남을 도와줄 수 있다거나 내가 남을 가르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칫 자기과시나 욕심으로 하기가 쉽기 때문이에요. 내가 어떤 말을 해줘야 저 사람에게 위로가 될까 하는 마음도 잘 살펴보면 내 욕심입니다. 따라서 남을 돕고자 할 때는 먼저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경험이 있으면 그것을 들려주는 가벼운 마음이 좋습니다.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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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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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한 권으로 독서를 미친듯이 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히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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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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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형제가 한 집에 살고 있어.

그들은 정말 다르게 생겼어.

그런데도 구별해서 보려고 하면,

하나는 다른 둘과 똑같아 보이는 거야.

첫째는 없어. 이제 집으로 돌아오는 참이야.

둘째도 없어. 벌써 집을 나갔지.

셋 가운데 막내, 셋째만이 있어.

셋째가 없으면, 다른 두 형도 있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문제가 되는 셋째는 정작 첫째가 둘째로 변해야만 있을 수 있어.

셋째를 보려고 하면,

다른 두 형 중의 하나를 보게 되기 때문이지!

말해 보렴, 세 형제는 하나일까?

아니면 둘일까? 아니면 아무도 없는 것일까?

꼬마야, 그들의 이름을 알아맞힐 수 있으면,

넌 세 명의 막강한 지배자 이름을 알아맞히는 셈이야.

그들은 함께 커다란 왕국을 다스린단다.

또 왕국 자체이기도 하지! 그 점에서 그들은 똑같아.




호라박사가 카시오페이아와 함께 찾아온 모모에게 내었던 수수께끼. 답은 과연 무엇일까?


살면서 나는 참 시간에 지배당하는 스타일이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되새김질하고 집착하고, 현재의 삶 속 가득한 고민들에 포위당하고 미래 내 자신의 삶에 대한 압박을 느끼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스스로가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게 허다하다.그리고 솔직히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여유'를 느끼며 살아가기 힘든 각박한 세상, 누구나 다 느끼며 살아가지 않을까?

매사 조급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꼬집어주기 위한 미하엘 엔데의 센스만점 이야기, 모모는 정말 빠른 변화 속에서 살아가는 직장인을 비롯한 현대인들이 꼭 읽어야 할 지침서다. 모든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모모의 등장은 작은 마을의 주민들이 사람 관계에서 해결해야 할 방법으로 '대화'와 '여유'를 일깨워주게 만든다.

회색신사들이 나타나 사람들의 시간을 관리해주겠다며 '여유'를 뺏어가는 세태는 현재를 절실하게 꼬집는다. 대화를 나누지 않고 패스트 푸드가 아니면 신경질을 부리고 탁아소 안에서만 친구들과 놀 수 있는 어린 아이들로 가득한 곳. 지극히 우리가 서 있는 이 곳의 이야기다. 서로의 생활만으로도 척박해지다보니 가족 간의 대화까지 메말라가는 현실. 미하엘 엔데의 세상 속에서는 모모가 해결사다.

여기, 내가 있는 이 곳에도 모모가 필요해. 모모가 와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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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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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쉼없이 움직이는 시계바늘 위에 앉아있는 것 같다고.
그래서 젊음과 늙음을 딱히 느끼지 못하고 시간의 물살에 휩쓸려 가는 것 같다고.
생각해보면 나한테만 국한된 생각은 아니다. 나에게도, 날 낳아주신 부모님에게도, 언젠가 나에게서 태어날 내 아이들에게도 해당되는 거겠지. 늘 시간에 쫓기고 시간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힘들어하는 내가 '두근두근 내 인생'의 아름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시간'이 그저 앞으로 흘러가는 강물일 뿐이라 여겼었다.

'두근두근 내 인생'의 한아름군은 1년을 10년처럼 살아가는 조로증 환자다. 열일곱 소년이지만 몸은 70대를 훌쩍 넘긴, 장기의 기능도 점점 약화되어가고 한 쪽 시력까지 잃어가는 처지다.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하는 신체를 갖고 있어 활발한 활동보다는 내면 속에서 생각을 되새김질하는 게 이 아이의 특기다. 그래서인지 아름이는 70대 노인의 몸을 갖고 있는 사람답게 생각도 연륜있게 한다. 존재하는 모든 생물, 무생물의 이름을 부르는 그 자체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깨닫고 부모님을 항상 웃게 할 수 있는 자식이 되는 것이 소원이라며 애늙은이같은 모습을 보인다. 겉모습이 그래서인지 몰라도 옆집 장씨 할아버지에게는 말동무를 겸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주기까지 한다. 둘의 대화를 살펴보면 대략 이렇다.



"할아버지?"

"왜?"

"늙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

"뭐야 이 자식아?"

"저번에 작가 누나가 저한테 그렇게 묻더라고요. 그래서 뭐라고 어물어물 대꾸했는데, 제대로 대답을 못한 것 같아요."

"별놈의 아가씨가 다 있구나."

"그죠?"

"한마디 쏴주지 그랬냐."

"뭐라고요"

"니들 눈엔 우리가 다 늙은 사람으로 보이지?"

".............."



"우리 눈엔 너희가 다 늙을 사람으로 보인다! 하고."

"하아, 괜찮다! 진짜 그럴걸!"



열일곱인 아름이가 태어나기까지는 열일곱이었던 아름이의 부모님, 미라와 대수가 있었다. 공부만으로도 벅찰 그 시기에 미라와 대수는 학교생활보다 더 처절한 인생에 뛰어들게 되었다. 아름이의 어린 부모가 되었기 때문이다. 부모의 살갗을 대어가며 사랑과 관심을 받아야 할 판에 아름이의 엉덩이를 붙잡고 용변 봐주는 일부터 아이의 시시콜콜한 인생 속에까지 침투해야 했으니, 인생 자체가 남들보다 과부하였을 것은 확실할 터. 열일곱의 엄마, 아빠로서의 인생을 지우기에는 벅찼을 시간 일초일분이 아름이가 시간을 제트기처럼 빠르게 보내는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안 그 순간부터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힘들게 버텨왔을 거다. 17년이 낳은 또 다른 17년, 시간이 멈추지 않는 한 함께 동행할 17년의 인생들.

아름이의 병원비가 만만치 않게 쌓여가자 미라는 예전 친구였던 방송국 PD를 떠올린다. 프로그램에 출연만 해도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도움의 손길을 줄 것이라던 친구의 말. 아름이 출연과 돈을 바꾼다는 게 부모로서 마음 한 구석을 저버려야 하는 일이란 걸, 혹여나 방송 출연으로 인해 아름이가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 머뭇거리는 찰나, 17년 인생을 산 어른아이 아름이가 미라와 대수를 설득해 프로그램 출연을 통해 후원금을 비롯한 애정을 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현재 사회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나타난다. 방송 후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은 물론 아름이에게 응원을 던지는 것도 있지만 아름이의 사기를 꺾어버릴 듯한 말들이 던져진다. ' 방송 중 나온 음악 제목이 뭐예요? 너무 좋아서.....' 와 같은 말들이 그러하다. 아니면 '나 같으면 자살했을텐데...'라던지......익명으로 남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쉽게 올릴 수 있는 인터넷 악성 문화가 고스란히 반영된 부분이다. 가장 가슴 아팠던 내용은 이거다. 아름이에게 온 한 통의 메일. 이름과 문체를 봤을 땐 여자아이인데, 그 여자아이 또한 중환자실에 있을 만큼 중한 병을 앓고 있다고 했다. 서로 응원의 글을 주고 받으며 병원생활을 이어 나가곤 했는데 -아름이는 처음으로 편지를 받고 설레이기까지 했다- 이를 흥미롭게 관찰한 방송국 PD가 아름이를 통해서 그 여자아이를 만나보고 싶다 제안했고 결국 정체를 알게 된다. 다름 아닌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었던 성인 남자. 아름이에게 수십차례 흉기로 찌른 그 아픔보다 더 한 아픔을 건네준 거나 별반 다를 바 없던 몹쓸 짓의 주인공. 비단 아름이만 겪는 문제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더해졌기에 내 가슴마저 무너져 내릴 듯했다. 더 마음 시리게도 아름이는 그 일을 겪은 후 우연이겠지만 시력을 거의 잃어갔고 소통을 멀리하며 자기 자신 속으로 깊게 빠져 들어갔다. 흔히 요즘 청소년들이 빠지는 닌텐도 게임 같은 수단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점점 사그라지는 모래 바람처럼, 아름이는 시들어간다.


어디로 가는지 펄럭이는 깃발의 움직임을 빌려 보여주는 바람이 된 아름이는 나에게 참 깊은 생각을 하게끔 만들어줬다. 인생무상, 다 허무하다지만 숨을 쉬는 생명의 존재 가치는 반드시 있다는 것, 하고자 하는 일에 실패하고 좌절할 때 요즘 사람들이 쉽게 여기는 '죽음'은 헛된 생각이며 내가 내뱉는 공기에겐 너무도 무례한 짓이라는 것, 내 얼굴이 과거 우리 엄마의 얼굴이었고 우리 엄마의 얼굴이 미래 내 얼굴일 것이라는 것, 그리하여 엄마도 나도, 모두도 시계바늘 위에 앉아있다는 것. '두근두근 내 인생'은 내 인생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이야기라는 것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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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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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가족의 숨겨진 막내딸 ‘나’

-천명관의 ‘고령화가족’을 읽고-


나, 고령화가족을 읽어내려간 ‘독자’는 삼남매 중 큰딸로 태어났다. 오로지 안정된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직장, 흔히 나랏돈 받으며 일할 수 있는 공무원을 내 의지가 아닌 부모님 의지로 인해 준비하며 대학생활을 보냈다. ‘고졸’이라는 타이틀을 벗어나기 직전, 문득 2개월간 미친 듯이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떠난 일본 여행길에서 왜 내가 이런 식으로 삶을 살고 있는지, 어째서 젊은 청춘이 나를 위해 소비되지 않고 있는지에 대해 개탄한 후 나는 공무원 준비를 때려치우고 어렸을 적부터 원하던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내 몸 하나 잡아먹혀도 좋다는 식의 열정으로 하고자 했던 일에 뛰어들었던 나였건만 결국 실패의 쓴맛을 맛보게 되었다. 쥐꼬리만한 월급과 열여섯시간 이상의 고된 노동, 신종플루 바이러스에도 맞서 싸우지 못하는 저질 같은 체력. 결국 남들은 부모님한테 월급 10퍼센트만큼의 용돈을 손에 쥐어드릴 때 나는 허리 꺾일 정도로 일하시는 부모님으로부터 곰팡이 피어대는 반지하방 월세를 받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천명관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부모님 옆에 빌붙는 빈대’라고 얼굴에 쓰인 사람이 됐다고나 할까.


이런 인생의 통로를 걸어가고 있을 때 내 손에 ‘고령화가족’이 쥐어졌다.

앞으로 내 인생을 어떻게 설계해야 하나, 밀려있는 세금과 핸드폰 비용은 어떻게 내야 하나와 같은 무수한 고민으로 인해 머리가 터져버릴 즈음, 그저 우스꽝스러운 표지 하나 믿고 가벼운 소설책으로 머리나 식혀보자 해서 없는 돈 털어가며 택했던 책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읽으면 읽을수록 내 이야기가, 그것도 한 10년 후까지 내 모습은 이럴 거야라고 상상했던 이야기가 펼쳐져 있는 게 아닌가. 오함마와 오인모 그리고 미연의 인생까지. 이 책은 그저 나에게 단순히 재미로 여겨질 책이 될 수는 없었다.

나이 먹도록 노모의 옆에 딱 붙어살며 부엌에 있는 먹거리들은 있는대로 흡입하는 오함마와 스태프들을 진두지휘하며 폼나는 영화 하나 만들어보려 했으나 모조리 흥행에 실패하고 낙오자 및 알콜중독자가 되어버린 오인모, 술집을 운영하며 이혼이라는 도장을 찍고 사춘기를 훌쩍 지나친 듯한 딸을 데리고 노모의 집으로 다시 기어들어온 미연까지. 겉으로 보았을 때 분명 이들은 내 인생과 똑같은 퍼즐 조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째서 부모님 앞에 자랑스러운 자식으로 서고 싶지 않겠는가. 손에 쥐고 있는 물질과 권력, 하다못해 집안 배경이라도 있지 않고서는 이 나라 안에서는 무슨 일을 해도 제대로 된 모습으로 서기엔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다. 오함마, 오인모, 미연도 분명 그네들 인생이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겠지. (서로의 미래가 이리 될 줄 생각을 했으려나?)

노모의 좁은 집이 꽉 차 보이게끔 서로 각자의 평수를 챙긴 세 남매는 그 속에서 어린시절의 추억으로 변해가고 있던 옛 가족의 모습을 다시 그려냈다. 티격태격, 하루가 멀다 하고 가벼운(?) 욕설이 난무하고 밴댕이처럼 조카의 피자를 탐내고 용돈을 합리적인(?) 이유로 약탈하고 조카의 속옷으로 못된 행각을 일삼기까지 하는 가족이지만-그리 평범한 가족의 모습은 아니다- 그들은 ‘가족’이라는 타의로 엮인 공동체의 힘이 어쩔 수 없이 서로를 걱정하고 위하게 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할 만큼 크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형제의 자랑거리를 내뱉고 대신 교도소 징역을 복역하고 뼈가 으스러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을 수 있는 어떤 계기. 그건 ‘가족’의 힘이 아닐까.


그런데 이런 삼남매가 각기 다른 핏줄에서 태어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나를 더 경악케 했다. 화장품 가방을 들고 동네를 사방팔방 다니는 노모가 진정한 사랑을 갈구하다 만들어 낸 결과물인 것이다. 오함마도 아이에 대한 노모의 진실된 사랑으로 품에 안은 아이 아닌가. 정말 열렬히 사랑해서 결혼하는 요즘의 세대가 아닌 이상 옛날옛적 혼례를 치렀던 부모님들 중 사랑의 양과 질을 고려해서 혼인신고에 도장을 찍는 분들이 얼마나 계셨을까.

고령화가족의 최고령, 삼남매의 노모도 아이들을 거두어 키우다가 내면의 진실된 자신의 감정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얼마나 남았을지 모를 세월,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해야겠다는 그 마음을 어느 누가 비난할 수 있으랴.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각자의 ‘진실’이 모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음을 고령화가족은 읽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과거의 ‘진실’들이 허물을 벗고 삼남매에게 드러났을 때 느꼈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으나 결국 ‘진실’로 인해 정말 ‘진실된’가족으로 거듭나지 않았던가.


현재 세상은, 그 속에 속해있는 대한민국은 기술과 문명이 발달하면서 서로 생각을 나누고 의지하고 도움을 주고받는 기회들이 줄어들면서 가족은 대가족에서 소가족으로, 가족주의에서 개인주의로 변모하고 있다. 대화는 침묵으로 변하고 관심은 무관심으로 변하면서 ‘가족’은 그야말로 힘없이 늙어만 가는 고령화의 모습을 띠고 있다. 스스로가 나약해지고 혼자 서기 어려워지면 결국 기댈 곳은 ‘가족’뿐인 것을 사람들은, 나조차도 닥쳐서야 깨닫는 미련한 시간들을 흘러 보낸다.

그래도 돈이라는 것을 벌 수 있고 ‘가족’의 구성원들이 세상에 남아있을 때가 소중한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루빨리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자. 그게 우리가 무미건조해져만 가는 세상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중요한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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