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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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쉼없이 움직이는 시계바늘 위에 앉아있는 것 같다고.
그래서 젊음과 늙음을 딱히 느끼지 못하고 시간의 물살에 휩쓸려 가는 것 같다고.
생각해보면 나한테만 국한된 생각은 아니다. 나에게도, 날 낳아주신 부모님에게도, 언젠가 나에게서 태어날 내 아이들에게도 해당되는 거겠지. 늘 시간에 쫓기고 시간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힘들어하는 내가 '두근두근 내 인생'의 아름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시간'이 그저 앞으로 흘러가는 강물일 뿐이라 여겼었다.

'두근두근 내 인생'의 한아름군은 1년을 10년처럼 살아가는 조로증 환자다. 열일곱 소년이지만 몸은 70대를 훌쩍 넘긴, 장기의 기능도 점점 약화되어가고 한 쪽 시력까지 잃어가는 처지다.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하는 신체를 갖고 있어 활발한 활동보다는 내면 속에서 생각을 되새김질하는 게 이 아이의 특기다. 그래서인지 아름이는 70대 노인의 몸을 갖고 있는 사람답게 생각도 연륜있게 한다. 존재하는 모든 생물, 무생물의 이름을 부르는 그 자체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깨닫고 부모님을 항상 웃게 할 수 있는 자식이 되는 것이 소원이라며 애늙은이같은 모습을 보인다. 겉모습이 그래서인지 몰라도 옆집 장씨 할아버지에게는 말동무를 겸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주기까지 한다. 둘의 대화를 살펴보면 대략 이렇다.



"할아버지?"

"왜?"

"늙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

"뭐야 이 자식아?"

"저번에 작가 누나가 저한테 그렇게 묻더라고요. 그래서 뭐라고 어물어물 대꾸했는데, 제대로 대답을 못한 것 같아요."

"별놈의 아가씨가 다 있구나."

"그죠?"

"한마디 쏴주지 그랬냐."

"뭐라고요"

"니들 눈엔 우리가 다 늙은 사람으로 보이지?"

".............."



"우리 눈엔 너희가 다 늙을 사람으로 보인다! 하고."

"하아, 괜찮다! 진짜 그럴걸!"



열일곱인 아름이가 태어나기까지는 열일곱이었던 아름이의 부모님, 미라와 대수가 있었다. 공부만으로도 벅찰 그 시기에 미라와 대수는 학교생활보다 더 처절한 인생에 뛰어들게 되었다. 아름이의 어린 부모가 되었기 때문이다. 부모의 살갗을 대어가며 사랑과 관심을 받아야 할 판에 아름이의 엉덩이를 붙잡고 용변 봐주는 일부터 아이의 시시콜콜한 인생 속에까지 침투해야 했으니, 인생 자체가 남들보다 과부하였을 것은 확실할 터. 열일곱의 엄마, 아빠로서의 인생을 지우기에는 벅찼을 시간 일초일분이 아름이가 시간을 제트기처럼 빠르게 보내는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안 그 순간부터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힘들게 버텨왔을 거다. 17년이 낳은 또 다른 17년, 시간이 멈추지 않는 한 함께 동행할 17년의 인생들.

아름이의 병원비가 만만치 않게 쌓여가자 미라는 예전 친구였던 방송국 PD를 떠올린다. 프로그램에 출연만 해도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도움의 손길을 줄 것이라던 친구의 말. 아름이 출연과 돈을 바꾼다는 게 부모로서 마음 한 구석을 저버려야 하는 일이란 걸, 혹여나 방송 출연으로 인해 아름이가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 머뭇거리는 찰나, 17년 인생을 산 어른아이 아름이가 미라와 대수를 설득해 프로그램 출연을 통해 후원금을 비롯한 애정을 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현재 사회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나타난다. 방송 후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은 물론 아름이에게 응원을 던지는 것도 있지만 아름이의 사기를 꺾어버릴 듯한 말들이 던져진다. ' 방송 중 나온 음악 제목이 뭐예요? 너무 좋아서.....' 와 같은 말들이 그러하다. 아니면 '나 같으면 자살했을텐데...'라던지......익명으로 남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쉽게 올릴 수 있는 인터넷 악성 문화가 고스란히 반영된 부분이다. 가장 가슴 아팠던 내용은 이거다. 아름이에게 온 한 통의 메일. 이름과 문체를 봤을 땐 여자아이인데, 그 여자아이 또한 중환자실에 있을 만큼 중한 병을 앓고 있다고 했다. 서로 응원의 글을 주고 받으며 병원생활을 이어 나가곤 했는데 -아름이는 처음으로 편지를 받고 설레이기까지 했다- 이를 흥미롭게 관찰한 방송국 PD가 아름이를 통해서 그 여자아이를 만나보고 싶다 제안했고 결국 정체를 알게 된다. 다름 아닌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었던 성인 남자. 아름이에게 수십차례 흉기로 찌른 그 아픔보다 더 한 아픔을 건네준 거나 별반 다를 바 없던 몹쓸 짓의 주인공. 비단 아름이만 겪는 문제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더해졌기에 내 가슴마저 무너져 내릴 듯했다. 더 마음 시리게도 아름이는 그 일을 겪은 후 우연이겠지만 시력을 거의 잃어갔고 소통을 멀리하며 자기 자신 속으로 깊게 빠져 들어갔다. 흔히 요즘 청소년들이 빠지는 닌텐도 게임 같은 수단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점점 사그라지는 모래 바람처럼, 아름이는 시들어간다.


어디로 가는지 펄럭이는 깃발의 움직임을 빌려 보여주는 바람이 된 아름이는 나에게 참 깊은 생각을 하게끔 만들어줬다. 인생무상, 다 허무하다지만 숨을 쉬는 생명의 존재 가치는 반드시 있다는 것, 하고자 하는 일에 실패하고 좌절할 때 요즘 사람들이 쉽게 여기는 '죽음'은 헛된 생각이며 내가 내뱉는 공기에겐 너무도 무례한 짓이라는 것, 내 얼굴이 과거 우리 엄마의 얼굴이었고 우리 엄마의 얼굴이 미래 내 얼굴일 것이라는 것, 그리하여 엄마도 나도, 모두도 시계바늘 위에 앉아있다는 것. '두근두근 내 인생'은 내 인생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이야기라는 것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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