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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영역
사쿠라기 시노 지음, 전새롬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 순수의 영역 >
몇몇 지인들의 감정적 파괴력이 높았던 행동들의 귀결로 이어졌던 순수,
나에게는 항상 정의하기 난해했던 감정이였고, '핑계'로 여겨지곤 했던 그것.
순수를 얘기하는 여러 책이 있었지만 정작 순수를 찾을 수 없었었고
이 책 역시 오히려 부제 "억누를 수 없는 질투"가 불러들인 호기심이
흥미를 더해 주었다.
"질투란 멈출 듯 반복해서 밀려오는 파도와 같다
백 명이면 백 가지 형태로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세기로 혼자만의 시간을 괴롭힌다"
질투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점잖은 사감선생님 이미지의 작가 사쿠라기 시노.
탁월한 심리묘사와 필력으로 놀라운 찬사를 받으며 '나오키 상'을 받았다니
뭔가 숨겨진 마력이 있을까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책이 밝고 하얀 이미지의 순수가 아닌
인간 본연의 무채하고 매마른 본성을 드러내는게 아닌가 해서 살짝 뜨끔했건만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이 고향인 쇠락해가는 홋카이도 배경으로 유명하다 하니
배경을 타고 그런 느낌을 강하게 전해오기를 은연 중 기대했다.
(이 책에서는 홋카이도의 구시노 항이 배경이다)
등장인물부터 하나같이 "밋밋"했다. 밋밋 참 적절한 표현 같다.
단 한사람 준카, 순수한 준카를 제외하고.
평생을 서예에 매진했지만 탁월하지 못한 재능과 화려한 학벌,
치매걸린 어머니와 생활비를 책임지는 아내 레이코가 부담으로 다가오는 류세이.
류세이를 자극하는 서예 재능을 가진, 자신을 바보라 하는 준카
(어쩌면 서예에 관한한 서번트의 가능성도 열어둔다).
극성스러웠던 시어머니와 무능한 남편으로 생계를 책임지는 아내 레이코,
동생 준카를 떠맡았지만 오로지 도서관 일에 매달리는 도서관장 노부키.
이들의 만남은, 말 그대로 잔잔하다 못해 멈춰버린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듯
밋밋한 감정으로 살아온 그들의 관계를
서서히 거미줄처럼 얽혀드는 '질투'로 엮어간다.
읽으면서 그 질투와 인물들의 상관 관계들은 이미 예상이 됐지만
(예를 들어 레이코와 노부키의 불륜, 노부키의 오랜 연인 리나와의 관계들)
그럼에도 마지막의 반전은 .. 질투의 정점에 서 있지 않았나 싶다.
순수한 준카의 그 재능.
이야기의 끝은 의외로 파국으로 치닫지 않았고 예정된 수순은 어느정도 밟아갔기지만
이 책이 끝까지 흥미로워던 점은 이렇게 "밋밋"한 이야기들이
상처받고 깨어난 감정을, 그리고 질투를 가득 채웠다는 것이다.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고 준카의 재능을 질투하는 류세이,
노부키와의 관계를 "적당히 상처 받는 관계"로 귀결지으려는 레이코,
준카가 죽기를 원하지 않았으나 바랬던 게 아닐까 자책하는 노부키.
질투는 남녀의 애정전선에만 있는 것은 아니였다.
재능에 대한, 애정에 대한, 신뢰에 대한, 새로운 인연에 대한..
복합적으로 얽혀드는 이들의 질투는,
곧 터져버릴 듯한 얇은 막 속의 아귀다툼 벌이는 속마음을 숨겨야 하는
그런 애처로움이 함께 했던 특이한 느낌이였다.
느슨해진 일상 속의 죽어있다고 느꼈던 마음(질투)을 건드린다니,
깨어난 그 마음은 감정선을 타고 어디로 폭발할까 기대를 많이 했던 책 <순수의 영역>.
늘 피곤하다고 여겼던 순수에 대한 정의, 이번엔 정확히 알 수 있을까하는 기대가 컸지만
역시나 순수는 그저 인간의 감정 저변 저쪽에 있는 것인지
어디까지를 인간적 이해로 가능케하는 부분인지는 나에게는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감정을 따라 읽으며 재미있다고 여겼지만,
자극적인 질투와 뭔가를 찾고자 한다면 이 책에서는 좀 힘들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