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몸으로 살기 - 나를 다듬고 타자와 공명하는 어른의 글쓰기
김진해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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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몸으로 살기. 글을 써서 밥벌이를 하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저 지치지 않고 꾸준하게 무언가를 쓰는 사람이 되는 걸 말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마음대로 써지지 않는 글 때문에 힘들어하면서도 결국 쓰는 일을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의 하나로, 자꾸 마음이 가는 제목이었다. 거기다 평어 수업으로 유명한 김진해 교수라니. 한층 커진 궁금증과 왠지 모를 끌림에 고민 없이 선택한 〈쓰는 몸으로 살기〉. 책은 오랜 시간 말과 글 사이를 지나온 저자가 이야기하는 글 빚는 법을 담았다.




〈쓰는 몸으로 살기〉는 모두 네 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당신에게는 어떤 문장이 있나요’, 2부 ‘좋은 글은 어떻게 구성될까요’, 3부 ‘말해지지 않은 것을 써볼까요’, 4부 ‘쓰는 듯 살고, 사는 듯 읽으세요’. 좋은 글감을 선택해 주제를 담는 것부터 나만의 문장을 뽑아내는 법, 내 이야기를 생생하게 독자에게 전하는 방법까지. 차곡차곡 문장을 쌓아가며 쓰는 법을 풀어낸 지은이의 글은 ‘쓰는 몸’ 이야기로 나아간다.




우리 삶이 그러하듯이 쓰는 몸은 끊임없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닌, 몸으로 쓰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살이 보이고 좌충우돌하는 삶이 녹아 있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p.6]




무엇을 이야기할까. 하고 싶은 말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글을 쓸 때면 언제나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고민하던 부분인 만큼, 글감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마음에 와닿았다. 저자는 우리가 다루는 글감이 대부분 흔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다양한 경험과 연륜이 쓰는 이에게 조금 더 많은 글감을 안겨 줄 수는 있지만. 그 안에서 좋은 글감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비슷함 속에서도 낯섦을 발견하려는 노력과 나만의 생각을 담을 수 있는 재료를 찾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글감은 어디든 있지만 ‘글감 찾기’는 어렵습니다. ‘내 생각이 무엇이냐?’하고 스스로 다그치고 윽박지르지 않으면 찾을 수 없습니다. 쉽게 찾은 글감, 표면에 드러난 글감 뒤에 웅크리고 있는 진짜 글감, 내 생각과 밀착된 글감을 찾아야 합니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서는 잘 찾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내놓을 단 하나의 새로운 생각을 담는 글감이 쉽게 찾아질 리 없습니다. 깃발과 깃발 사이, 불빛과 불빛 사이를 봐야 합니다. 곱씹고 거듭 곱씹어야 합니다. 유일한 삶을 살고, 유일한 이야기를 할 사람은 바로 나이므로, 곱씹을 가치가 있습니다. [p.52]




자신의 문체가 어떠한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여러 벌의 옷을 입다 보면 자기 스타일을 찾아갈 수 있듯이, 반복해서 쓰고 그 속에서 자신이 어떤 스타일의 글쓰기 방식을 좋아하는지 파악해보기 바랍니다. 자신의 문체가 어떠한지 몇 가지라도 말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하다못해, ‘나는 어떤 문체를 갖고 있나?’라고 묻는 것만으로도 더 좋은 글을 쓰게 될 겁니다. [p.102]

문체란 글쓴이의 목소리이자 글쓴이 고유의 표현 양식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많은 글을 썼는데도 자신만의 문체를 찾기 어렵다면 그건 떠오른 생각을 곧장 써 내려 갔기 때문인데. 문체에 대한 감각이 곧 말에 대한 감각이라 이야기하는 저자는, ‘번역하는 마음’으로 말을 외국어처럼 낯설게 바꾸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독창적인 문체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글쓰기가 딱 그렇습니다. 관찰해야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쓴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를 끝없이 관찰하고, 이해하고, 조심스럽게 해석하고, 이 해석이 최선인지 의심하고, 끙끙 앓다가 그 순간 최선의 답을 내놓는 것입니다. 이 과정의 무한 반복입니다. 골치가 아프고 지겹습니다. 그러니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매일 아침 반복해 밥상을 차려도 사랑하는 사람 입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애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처럼요. [p.271]




20년 넘게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는 저자는 말한다. 글쓰기에 ‘판타지’란 없다고. 어쩌다 한번 쓴 글이 걸작이 되는, 드라마 같은 결말을 바라기보다는. 일정한 시간, 적당한 장소에서, 꾸준하게 글을 쓰며 스스로를 단련해 언젠가 찾아올 ‘글을 잘 쓸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글을 쓰고 싶지만 시작이 막막했던 사람, 마음처럼 써지지 않는 글 때문에 연필을 잡기가 두려웠던 사람이라면. 〈쓰는 몸으로 살기〉로 꼼꼼하게 풀어놓은 ‘잘 쓰는 법’과 함께, 따뜻하게 와닿는 김진해 교수의 응원과 격려를 만나 보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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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전쟁 - 제국주의, 노예무역, 디아스포라로 쓰여진 설탕 잔혹사
최광용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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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이 동물의 생존을 위한 필수 성분이라면. 설탕은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 바쁘고 피곤한 현대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 감미료가 아닐까. 3시가 조금 넘은 나른한 오후, 쌉싸름한 커피와 달달한 간식을 옆에 두고 펼쳐 본 최광용 작가의 〈설탕 전쟁〉. 책은, 이제는 우리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설탕에 관한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담아냈는데.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를 지나 아메리카까지. 대륙을 넘나들며 촘촘하게 얽혀 있는 역사와 문화는 때로는 흥미진진함과 설렘으로, 때로는 먹먹하고 아린 슬픔으로 마음 깊숙이 와닿는다.








차가 영국에 본격적으로 유입된 시기는 16세기에서 17세기경이었고, 영국인들은 빠르게 차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자 차는 곧 중요한 돈벌이 수단이 되었다. 이에 당시 아시아를 주무대로 활동하던 영국 동인도회사는 본격적으로 차 산업을 발전시켰고, 차 산업으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수식어에 걸맞은 대제국으로 성장할 만큼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차와 함께 영국에 엄청난 수익을 안겨준 또 하나의 상품이 있었다. 바로 설탕이다. [p.17]




산스크리트어로 설탕을 뜻하는 샤르카라. 샤르카라는 원래 자갈이나 모래를 뜻하는 단어였는데, 사탕수수즙을 정제해 만든 설탕이 모래알을 닮아 이를 ‘샤르카라’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페르시아로 전해지며 샤카르, 이슬람에서는 슈카르가 된 샤르카라는 영어 단어 ‘슈거’가 되었고. ‘캔디’의 어원 역시 ‘설탕 조각’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칸다에서 찾을 수 있다고 저자는 전한다.




고대 인도의 설탕은 어떻게 전 세계로 퍼져 나가 사람들의 삶 깊숙이 자리하게 되었을까? 포르투갈의 공주 카타리나가 영국 왕 찰스 2세와 결혼하며 전해진 ‘차 문화’는, 차의 풍미를 해치치 않으면서도 찻잎 특유의 쓰고 떫은 맛을 중화하는 설탕의 확산과 함께 오늘날 영국을 대표하는 문화로 자리잡았고. 콜럼버스의 항해는 카나리아제도의 사탕수수를 히스파니올라에 전했으며. 고온다습한 열대기후에서만 재배 가능해 유럽에서는 생산이 어렵다는 사탕수수의 특징은, 앞다퉈 식민지 영토를 확보하려는 유럽 국가들의 다툼에 불을 지폈다. 우연한 사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 가는 것을 보니, 역사의 커다란 흐름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콜럼버스가 바랐던 인도와의 후추 무역은 얼마 후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가마가 선점하게 된다. 그러나 비록 금이나 후추를 얻지는 못했을지언정, 콜럼버스의 모험은 유럽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가 유럽이 전래한 신대륙의 작물은 감자, 옥수수, 토마토, 담배, 카사바 등인데, 모두 오늘날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인이 즐기는 것들이다. [p.32]







사탕수수는 기본적으로 열대나 아열대 기후에서 자라는 식물이기 때문에 중부 유럽, 특히 프랑스나 독일 본토에서는 재배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카리브해의 섬들을 식민지로 삼아 대규모로 사탕수수를 재배하며 설탕을 생산했던 것인데, 생산량을 더욱 늘리기 위해 사탕수수를 통해서가 아닌 방식으로 설탕을 얻을 방법 또한 꾸준히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사탕로 설탕을 생산하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그야말로 과학이 만들어 낸 설탕이었다. [p.107]




〈설탕 전쟁〉은 달콤함으로 인류를 유혹한 설탕을 통해 들여다본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낸다. 대항해시대의 흥미진진한 모험 이야기는 물론. 제국주의의 탐욕이 불러온 경쟁적인 식민지 건설과 노동력 착취, 100여년 전 하와이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이야기 같은 씁쓸한 역사의 뒷면까지. 이제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재료인 설탕의 면면을 담아낸 〈설탕 전쟁〉은 쉽게 읽을 수 있지만, 절대 가볍지는 않은 책이었다. 이전과는 다른, 신선한 역사책을 찾는 사람이라면 최광용 작가의 〈설탕 전쟁〉과 함께 세계 곳곳에 찍힌 설탕의 숨은 발자국을 살펴 보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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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홍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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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불공평하고 불행은 늘 자신의 몫이라 생각하며 살아가는, 은행의 대출심사역 ‘장’. 본부장의 눈 밖에 나 쉽지 않은 직장 생활에, 결혼을 준비하던 여자친구 해주와 파혼하고 남은 건 집 한 채와 대출금뿐이지만. 좋은 일은 좀처럼 그에게 찾아들지 않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복면을 쓴 이들에 의해 트렁크에 갇힌 채 납치되는 사건에까지 휘말리게 된다. 그러는 사이 죽은 자들이 바다에 나가 거꾸로 박혀 있다는 전설로 전해지는 말뚝들은 바다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바로 눈앞으로 조금씩 다가오는데….




긴급재난문자와 국가 비상사태 선포, 라디오 프로그램 〈배철수의 음악캠프〉, 데이식스 콘서트, 광화문 광장 그리고 군인들. 정신없이 몰아치는 소설의 파란만장 속에 섞여 있는 요소들이 이야기에 현장감을 더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말뚝들과 ‘장’을 납치한 복면을 쓴 이들, 흰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 광장으로 모여든 시민들과 군인들. 불안에 떠는 이들과 진실을 알고 싶은 사람들, 진실을 감추려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자아내는 긴장감으로 한숨에 읽어가다 별안간 날아든 문장에 피식 웃음 짓게 되었던 책. 무엇보다 김홍 작가의 〈말뚝들〉은 우리 개개인과 한국 사회에 아픔으로 남아 있던 사건들이 이제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기억될 수 있겠다는 걸 보여준 작품으로도 오래 마음에 남을 듯하다.




말뚝들의 머리는 털 오라기 하나 없이 반지르르했고 얼굴도 방금 세수한 것처럼 매끈했다. 그것들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뻘밭에 거꾸로 파묻혀 있었다. 공기는 물론 해수와도 접촉한 적 없는 피부가 일체의 부패 없이 미라가 돼 있었다. 기사를 보며 그런 상태를 ‘시랍화’라고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안색이 어둡고 얼굴이 전체적으로 부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방금 눈 감고 잠든 사람 같기도 했다. 눈을 감은 데다 뚜렷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은 탓에 전부 한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다. 혹은 모두의 얼굴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p.84]




그때 사무실의 모든 휴대폰이 동시에 비명처럼 알람을 울렸다. 5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짧은 순간 몇 가지 가능성이 스쳤다. 태풍이 오기에는 늦은 계절이었다. 창문을 힐끗 봤는데 눈이나 비가 오지는 않았다. 붕괴? 화재? 화산 폭발? 지진 같았다. 주위에서 이상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종류의 사건이라는 암시였다. 장은 심호흡하고 휴대폰을 들었다.


긴급재난문자

[서울특별시] 금일 17:04 광화문 일대 말뚝들 다수 출현. 차량 우회 및 해당 지역 접근을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p.130]




김홍의 장편소설 〈말뚝들〉에는 이야기를 관통하는 두 개의 큰 축이 있다.바다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내 앞으로 밀려온 ‘말뚝들’과 이들이 몰고 온 ‘눈물’. 슬픔과 애도를 넘어 새롭게 만들어 가는 기억과 연대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고, 그 중심에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말뚝들이 있다. 조금씩 밝혀지는 말뚝의 정체와 이들의 과거를 보며 여러 얼굴이 기억을 스쳐 지나갔다. 갈등과 분열의 시대. 마음에서 마음으로, 서로에게 진 빚으로. 우리를 잇는 따뜻한 결속을 느끼고 싶은 사람이라면, 김홍의 장편소설 〈말뚝들〉과 함께 작가가 웃음과 눈물로 빚어낸 메시지를 만나 보면 좋겠다.




큰 빚이 큰 부자를 만드는 진리는 언제나 통한다. 하지만 우리의 빚은 저들의 것과 다르다.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가난하다. 서로에게 내어준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노트에 눌러쓰고, 그 빚을 기억하며 평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으로 언젠가 세상을 설득할 것이다.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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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내가 원한 것
서한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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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열자 훅- 낯선 공기가 밀려 들어온다. 물기를 잔뜩 머금고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뜨거운 여름의 그것. 쉼 없이 귀를 괴롭히는 매미의 울음이 계절감을 한 숟갈 더하던 한여름의 어느날. 서한나의 〈여름에 내가 원한 것〉을 만났다.




어린 시절에 가족과 묵었던 민박집의 짭쪼름하고 끈적이던 바닷바람도. 여름방학의 끝자락, 방학 숙제를 할 때면 조용히 배경음처럼 깔리던 매미 소리와 달각거리며 돌아가던 선풍기 소리도. 서한나의 글은 오래된 기억들을 꺼내어 조금씩 바래가던 감각에 숨을 불어 넣었다.




〈여름에 내가 원한 것〉은 모두 세 개의 챕터로 구성되었다. 1부 연인들, 2부 감각들, 3부 장소들. 글쓴이의 말처럼 ‘권태와 매혹이 모두 하루에 있고, 한낮과 한밤중이 그렇게 다를 수 없는’ 여름이 담긴 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사랑을 말하는 글이 많았다. 눈부시게 작열하는 태양과 잘 익은 과일의 달콤함을 닮은 열렬한 사랑도, 한바탕 비가 쏟아진 여름밤의 선선함과 은은한 흙내음을 닮은 애틋한 옛사랑도. 지은이는 다양한 형태, 여러 온도의 사랑을 담아냈다.




어쩐지 하필 오늘 거기 가서 혼자 밥을 먹고 싶었다. 머리도 안 감고 마음에 드는 옷을 입지도 않았는데, 혼자 밥 먹는 모습 따위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 사람이 사는 동네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 그 사람도 하필 이 시간에 여기 있겠어? 그럼 진짜 우리가 운명이지, 또는 악연이지’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p.28, 하필 오늘 거기]




그의 집에서 그것은 언제든 먹을 수 있고, 내가 상상한 완벽한 맛의 크렘 브륄레였다.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위해 바닐라빈을 주문하고(곧 수급이 어려워질 거라고 했다) 생크림을 치고 그릇을 닦고 토치를 켜고 뜨거운 그릇을 만지기 위해 주방 장갑을 끼는 모습, 그러고는 맛있다는 말을 듣기 위해 내 주변을 얼쩡거리지도 않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느꼈던 듯하다. 나를 상대로 창업을 시험해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p.42, 완벽한 디저트]




영화와 음악 이야기도 많았다. 처음 접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가장 자주 등장한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이번 여름이 지나기 전에 한 번 만나 봐야겠다.




여름은 좋든 싫든 감각을 건드린다. 너무 덥고, 너무 따갑고, 너무 차갑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워터 릴리스〉는 전혀 다른 영화지만, 여름이라는 계절을 배경으로 너무 원하게 되고 그래서 괴롭고 그래서 마침내 그걸 얻게 됐을 때 원치 않게 다음 단계로 이동하게 되는 젊은 인간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만난다. … 두 영화는 각각 관능적인 여름이라는 장르 속, 몸에 붙어 있는 감각의 기억을 불러낸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는 린넨 셔츠와 살구주스, 풀 냄새가 가장 진해지는 저녁의 식탁, 〈워터 릴리스〉에서는 샤워장과 클럽 신을 기억하면 된다. [p.51, 사랑에 빠진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것]




돌아보면 나는 여름을 꽤 좋아했다. 며칠에 한 번씩 마주하는 비 오는 날의 축축함과 칙칙한 하늘은 그닥 달갑지 않았지만. 따뜻한 볕과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가져다주는 나른함은 늘 반가웠다.




점점 길어지는 여름과 매년 새로운 기록을 써 내려 가는 폭염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 있던 시간, 서한나의 〈여름에 내가 원한 것〉을 읽으며 떠오른 옛 기억과 그 시절 여름 냄새에 더없이 즐거웠다. 살며시 불어드는 선풍기 바람과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의 울음 사이에서 만난 책 덕에 이번 여름은 더 예쁘게 추억할 수 있을 듯하다.




여름의 무엇을 기다리느냐 하면 단연 밤이다. 여름밤은 아무리 써도 닳아지지 않는다. 공용자전거를 빌려 타고 천변까지 갔다 돌아오는 사람도 전화 통화를 하며 계속해서 같은 길을 걷고 또 걷는 여학생이 있다. 습한 날씨가 싫다고 말하지만 정말은 습기가 좋은 거다. 내가 습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유다. [p.116, 집에서 음악 듣기]




여름에는 숨이 턱턱 막힌다. 어릴 때는 그런 느낌이 여름이라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흙바닥에서의 뜀박질, 학교 복도에서의 추격전, 그것을 끝내고 자리에 앉았을 때 후끈하게 피부에 올라오는 열기와 시간이 지나면서 그만큼 시원해지는 감각 같은 것 말이다. 이제는 어릴 때만큼 잘 뛰지 않으니 온몸으로 여름을 느낄 일이 잘 없다. 나는 한여름의 더위와 습기가 최고조에 달한 오후 느닷없이 쏟아지는 비를 좋아했다. [p.154, 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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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웨이 : 30주년 기념 특별판 아티스트 웨이
줄리아 캐머런 지음, 박미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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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 페이지‘ ‘아티스트 데이트‘와 함께, 내면의 창조성 회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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