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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내가 원한 것
서한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평점 :

창문을 열자 훅- 낯선 공기가 밀려 들어온다. 물기를 잔뜩 머금고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뜨거운 여름의 그것. 쉼 없이 귀를 괴롭히는 매미의 울음이 계절감을 한 숟갈 더하던 한여름의 어느날. 서한나의 〈여름에 내가 원한 것〉을 만났다.
어린 시절에 가족과 묵었던 민박집의 짭쪼름하고 끈적이던 바닷바람도. 여름방학의 끝자락, 방학 숙제를 할 때면 조용히 배경음처럼 깔리던 매미 소리와 달각거리며 돌아가던 선풍기 소리도. 서한나의 글은 오래된 기억들을 꺼내어 조금씩 바래가던 감각에 숨을 불어 넣었다.
〈여름에 내가 원한 것〉은 모두 세 개의 챕터로 구성되었다. 1부 연인들, 2부 감각들, 3부 장소들. 글쓴이의 말처럼 ‘권태와 매혹이 모두 하루에 있고, 한낮과 한밤중이 그렇게 다를 수 없는’ 여름이 담긴 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사랑을 말하는 글이 많았다. 눈부시게 작열하는 태양과 잘 익은 과일의 달콤함을 닮은 열렬한 사랑도, 한바탕 비가 쏟아진 여름밤의 선선함과 은은한 흙내음을 닮은 애틋한 옛사랑도. 지은이는 다양한 형태, 여러 온도의 사랑을 담아냈다.
어쩐지 하필 오늘 거기 가서 혼자 밥을 먹고 싶었다. 머리도 안 감고 마음에 드는 옷을 입지도 않았는데, 혼자 밥 먹는 모습 따위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 사람이 사는 동네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 그 사람도 하필 이 시간에 여기 있겠어? 그럼 진짜 우리가 운명이지, 또는 악연이지’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p.28, 하필 오늘 거기]
그의 집에서 그것은 언제든 먹을 수 있고, 내가 상상한 완벽한 맛의 크렘 브륄레였다.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위해 바닐라빈을 주문하고(곧 수급이 어려워질 거라고 했다) 생크림을 치고 그릇을 닦고 토치를 켜고 뜨거운 그릇을 만지기 위해 주방 장갑을 끼는 모습, 그러고는 맛있다는 말을 듣기 위해 내 주변을 얼쩡거리지도 않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느꼈던 듯하다. 나를 상대로 창업을 시험해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p.42, 완벽한 디저트]
영화와 음악 이야기도 많았다. 처음 접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가장 자주 등장한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이번 여름이 지나기 전에 한 번 만나 봐야겠다.
여름은 좋든 싫든 감각을 건드린다. 너무 덥고, 너무 따갑고, 너무 차갑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워터 릴리스〉는 전혀 다른 영화지만, 여름이라는 계절을 배경으로 너무 원하게 되고 그래서 괴롭고 그래서 마침내 그걸 얻게 됐을 때 원치 않게 다음 단계로 이동하게 되는 젊은 인간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만난다. … 두 영화는 각각 관능적인 여름이라는 장르 속, 몸에 붙어 있는 감각의 기억을 불러낸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는 린넨 셔츠와 살구주스, 풀 냄새가 가장 진해지는 저녁의 식탁, 〈워터 릴리스〉에서는 샤워장과 클럽 신을 기억하면 된다. [p.51, 사랑에 빠진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것]
돌아보면 나는 여름을 꽤 좋아했다. 며칠에 한 번씩 마주하는 비 오는 날의 축축함과 칙칙한 하늘은 그닥 달갑지 않았지만. 따뜻한 볕과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가져다주는 나른함은 늘 반가웠다.
점점 길어지는 여름과 매년 새로운 기록을 써 내려 가는 폭염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 있던 시간, 서한나의 〈여름에 내가 원한 것〉을 읽으며 떠오른 옛 기억과 그 시절 여름 냄새에 더없이 즐거웠다. 살며시 불어드는 선풍기 바람과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의 울음 사이에서 만난 책 덕에 이번 여름은 더 예쁘게 추억할 수 있을 듯하다.
여름의 무엇을 기다리느냐 하면 단연 밤이다. 여름밤은 아무리 써도 닳아지지 않는다. 공용자전거를 빌려 타고 천변까지 갔다 돌아오는 사람도 전화 통화를 하며 계속해서 같은 길을 걷고 또 걷는 여학생이 있다. 습한 날씨가 싫다고 말하지만 정말은 습기가 좋은 거다. 내가 습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유다. [p.116, 집에서 음악 듣기]
여름에는 숨이 턱턱 막힌다. 어릴 때는 그런 느낌이 여름이라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흙바닥에서의 뜀박질, 학교 복도에서의 추격전, 그것을 끝내고 자리에 앉았을 때 후끈하게 피부에 올라오는 열기와 시간이 지나면서 그만큼 시원해지는 감각 같은 것 말이다. 이제는 어릴 때만큼 잘 뛰지 않으니 온몸으로 여름을 느낄 일이 잘 없다. 나는 한여름의 더위와 습기가 최고조에 달한 오후 느닷없이 쏟아지는 비를 좋아했다. [p.154, 소나기]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